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Nov 02. 2023

너의 노래

-

있지.


나는 여전히 네가 선물해 준 옷을 입고 네가 우리 집에 두고 간 스피커로 노래를 듣는다. 몰랐지? 글을 쓰면서 듣는 노래들은 모두, 한때 네 것이었던 스피커에서 흘러나온다. 


그럼 너의 노래이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너의 노래.


-

몰랐지. 


서른의 나는. 

마흔의 내가 가을이면 이런 글들을 쓰게 될 줄은. 

그래도 괜찮아. 좋은 일들이 많았어.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리고 아마 겨울에도.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

어제는 마음이 맞는 좋은 사람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괜찮아. 안주가 좋았거든. 적당히 어둡고 조용한 와인바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어. 삶과 사랑과 꿈과, 나를 아프게 찌르는 것들과- 찌르는 것들을 무찔러 주는 것들에 대해-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지. 

11월 1일이야. 젠장. 


-

오늘은 봄부터 같이 글쓰기 수업을 한 아이들의 책 출간 발표회가 있었다. 무려 열세 명의 아이들이 끝까지 남아 글을 썼어. 참 기특하지? 반년 간 열심히 쓴 글을 책으로 묶었어. 조금 서툴고 수줍은 글들은 서툴고 수줍은 대로 예쁘고,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잘 쓴 글들은 그대로 또 참 예뻐서 나는 내내 '참 예쁘다'라고 중얼거렸지. 


해가 질 무렵에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숲길을 걸었다. 바스락거리며 낙엽을 밟고 환하게 물드는 서편 하늘을 보았지. 전망대에 오르고 싶었는데 다섯 시까지라더라. 아쉽게 돌아서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가을은 돌아서기에 참 좋은 계절이야.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풍경들과 인사하고 이별하며 돌아서야 하겠지. 선선히 놓고 떠나는 연습을 하기에 좋다. 모든 순간들은.


-

네가 쓸쓸한 벽에 붙이라고 주었던 'Merry Christmas' 갈런드를 이번 겨울에 다시 꺼내 보려고 해. 나는 이전 집에서 1년 내내 붙여 두었지. 봄에도 메리 크리스마스, 여름에도 메리 크리스마스, 모든 계절에 메리 크리스마스. 이사 오면서 그걸 놓고 온 걸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는데, 우리 아빠가 마지막에 텅 빈 집을 둘러보다가 떼어 들고 오셨어. 나는 조금 울었던 것 같아. 돌돌 말아서 창고 깊숙이 넣어 두었다. 


그런데 빈 벽이, 빈 벽이 아니더라고. 


무수히 많은 풍경들이 와서 걸리더라고. 

쓸쓸하지 않으니까 그대로 둘까. 


-

있지. 


오늘도 너의 노래가 빈 벽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

어느 별에서 노래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쓰는 글이다, 바보야. 여기까지 썼는데 방금 거짓말처럼 이루마의 'Wait There'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어. 스피커가 고장 나면 버리려고 했는데 고장도 안 나고 성능이 너무 좋아. 왜 이렇게 좋은 걸 준 거야. 


사실 고장이 안 났으면 좋겠어.


-

또 무슨 말을 할까. 


-

잘 지내고 있어야 돼.

좋은 것만 주던 사람아.


매거진의 이전글 허세와 진심의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