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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06. 2023

왠지 오늘 날씨를 닮은 기록

비 오는 날엔 대금 연주가 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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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비가 내리고 흐렸다. 한낮에도 어두운 저녁처럼 무게가 실리는 날이다. 이런 날 조용한 실내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따뜻한 루이보스 차를 마시는 것이 내게는 큰 행복이다. 오전에 운동을 다녀왔고 어제 보낸 원고 관련하여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다행스럽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대한 에세이였는데 분량이 꽤 나왔다. 늘 그렇듯, 쓰면서 괴로운 순간도 많았지만- 즐겁고 좋았다.    


아주 느리지만

어떻게든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 


보이지 않는, 시간의 매듭을 눈여겨보며 이 감각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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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과 일요일에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다녀왔다. 올해로 열다섯 번째 해를 맞이한 이 참신하고 아름다운 시공간은 만날 때마다 새롭고 반갑다. 그 덕분에 그나마 '이런 시대'를 좀 견디고 살아갈 수 있는 것 같다. 초기의 목적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올해는 더욱 '제한이나 경계가 없는' 느낌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창작자들과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눈으로 스치고 지나기만 해도 신기하고 즐거웠다. 다채로운 빛깔을 지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같은 시공간에 머문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고 영감이 된다는 사실.


사람이 사람에게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여전한 사실이 다행스럽고 기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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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리미티드에서 만난 엣눈북스의 신간이 무척 마음에 든다. 하나는 <마녀의 정원> 다른 하나는 <空 비우고 붓다>이다. 전자는 식물 관련 후자는 불교 관련 책인데, 출판사의 넓은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중 <空 비우고 붓다>를 주말 내내 보고 있다. 한때 불화에 꽂혀 관련 책을 사 모았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던 그림들.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친우 K가 동국대에 다녀 나는 20대 초반, 그곳을 밥 먹듯 드나들었다. 재학생들과 어울려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강의실을 빌려 독서토론도 하고. K와 선배들 덕분에 인근 식당에 안 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들을 쏘다녔다. 지금도 남아 있는 <차나무 사이로>에는 2004년 즈음 끼적인 낙서가 '날적이'에 남아 있어 기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역시 흑역사는 잘 사라지지 않고 외려 박제되어 영원히 재생된달까...!) 그러다 한 번은 어쩌다가 불교미술학과 근방의 강의실을 빌리게 되었다. 20대 청춘들답게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며 웃고 떠들다가 복도로 나왔는데, 글쎄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촤라라라락- 불화 작품들이 놓여 있었다. 그 위용에 깜짝 놀라 숨을 죽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발걸음을 옮겼다. 행여 말소리라도 새어 들어가면 작품에 어린 정기라도 흩어버릴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다. 진심이 담긴 모든 작품들에는 그만의 분위기가 서린다. 그것을 오라(aura)라고 하든 정기라고 하든 품위나 품격이라고 하든 아무튼 마음이 담긴 작품에는 흔히 범접하기 힘든 기운이 돈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 살고 싶어진다. 다시 한번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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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는 독서모임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고 발제를 했다. 나까지 3인이 모인 작은 모임이라 매회 발제문을 작성해 가는데 나는 주로 헛발질 담당이다. 왜냐. 명저(<나의 투쟁>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들을 읽고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기에는 내 지식이 얕고 미천하기 때문이다. 겸손이 아니라 애석하게도 '정말로' 그렇다! 특히 0 아니면 100의 삶을 지향해 온 사람답게 관심 있는 분야는 덕후처럼 파고들어 과도하리만큼 깨알 지식까지 지녔으나- 그렇지 못한 분야들에는 기본적인 수준도 채 못 갖춘 것이다. (예: 요리, 패션, 과학...) 이러한 문제점을 깨달을 때마다 괴로워하며 분노하지만 왜 이런 분노는 이다지도 쉽사리 사그라드는 건지. 그럴 때마다 책을 사서 북 컬렉터가 된 걸까? (이상한 결론)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본성vs양육의 문제. 무엇이 히틀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새삼스러운 궁금증.

둘째는 절망 사회와 네오-나치즘의 문제.


사실 가장 궁금한 질문은 발제문의 맨 마지막에 적었다. 그 맥락은 대략 이러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통해 자신의 길이 엄연한 ‘투쟁’의 역사였음을 피력하지만 전혀 와닿지 않는 제목이다.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투쟁’의 의미를 지니려면, 더 나은 방향으로의 조준과 이타성을 기반으로 한 전진이 있어야 했다. 시절이 어렵다고 모두가 히틀러로 산 것은 아니었다. 환경이 엉망이라고 모두가 오조준을 한 채 이기적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이 오늘날 여전히 유의미한 이유는 오조준한 투쟁이 대중의 무비판적인 지지를 얻을 때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얻게 되는지 극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두가 옳다고 할 때 아니라고 손을 들 수 있는 기개는 어디에서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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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인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임이 분명하지만,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즉 무엇을 위한 투쟁이냐는 말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 역시 너무 비장하고 거대해서 무겁기만 하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모르겠다. 그냥 오늘 하루를 또 살았을 뿐이다. 따뜻한 차를 마시고 좋아하는 대금 연주를 듣고 이렇게 왠지 오늘 날씨를 닮은 기록도 한 자락 남겼다. 그럼 됐다.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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