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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31. 2023

허세와 진심의 사이

아니 근데 정말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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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꼭 차를 사겠다. 차종은 아직 모르겠지만 반드시 스페이스 그레이로!


...라는 말을 5년 전부터 하고 있다. 사실 프리랜서 강사로 살면서 차는 진작부터 '상당히' 필요한 도구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들로 계속해서 미루고만 있었다. 정말 필요한가? 없어도 잘 살아왔는데? 그렇지만 살다 보니 필요한 순간들이 있기는 했다. 차가 있으면 1시간이면 가는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가자니 3시간이 넘고, 차가 아니면 못 가는 곳도 있고. 근데 또 구입 비용이랑 유지비를 생각하면- 이래저래 해서 결국 구입 직전에 포기하는 일을 반복해 왔다. 이쯤 되면 차를 사겠다는 말이 내가 부리는 소소한 허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데 주변에는 꽤 진심으로 들렸는지 - 얼마나 열변을 토했을까? 안 봐도 비디오 아니, 이제는 안 봐도 유튜브라고 해야 하나 - 그래서 차는 샀느냐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때마다 '네? 차요?? 아니요???'라고 화들짝 놀랐으니 뭘까, 나는.


이런 일을 반복하다가 재작년 즈음부터는 약간 반 포기 상태로 '뭐, 언젠가는 사게 되지 않을까?'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살아왔다. 대충 꾸는 꿈은 대충 존재하다가 대충 사라진다. 변명을 좀 하자면,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멀리 다니는 일도 익숙해지니 할 만해서 더 그랬다. 물론 먼 지역으로 강의를 나갈 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늘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노트북, 책, 강의 자료와 기타 준비물에 때로는 현장 가서 신을 구두까지 따로 싸 들고 다녔으니 무디다고 해야 하나 바보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그런 길 위의 시간을 달리며 나름 행복했다. 몸은 고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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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엊그제 갑자기 '차'를 사겠다고 아주 또 허세를 부렸다. 이번 해가 막바지로 치닫고 내년부터는 '진짜 뭘 어떻게 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위기감이 몰아닥친 까닭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에 대한 이만 오천 번째 위기감) 아무튼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는지 엄마는 그럼 얼른 차를 알아보라고 하셨고(그래야 내년에 탈 수 있다며), 아빠는 당장 시골로 내려와 본격 운전 연습을 해야 한다며 차를 빤짝빤짝하게 닦아 놓으셨다. 어쩔 수 없이(입이 방정인 죄로) 시골집에 머무는 동안 양평-이천-충주-여주로 이어지는 길 위를 신나게 달리고 왔다. 나흘 동안 500km는 달린 것 같다. 사실 나는 엄지가 낳은 새끼 강아지들을 보러 내려간 건데 말이다. 정작 강아지들은 아직 눈 뜨기 전이고 우리는 밖을 쏘다니느라 집에 없고 뭐 그런 하루들을 보내고 왔다.


차를 모는 동안 당연히 내 귀는 '빵꾸'가 났다. 아빠는 '5 칭찬, 3 호통, 1 역정'(3년 전에는 반대였다)으로 단련시키셨는데, 나도 이제 귀가 두꺼워졌는지 어느 순간 아빠의 불호령에 능청맞게 대답하고 있었다. 아빠는 30년 무사고 무벌금 경력을 자랑하는 '최소 속도로 방어하며 안전 운전하기'의 달인이시다. 내가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왜 이렇게 빨리 가느냐며 호통을 치신다. 그리고 가끔 주어 없이 말씀하셔서 나를 혼돈에 빠뜨리신다.


들어가! 들어가!

네? 어디를요?

저기로!

(들어간다)

너! 왜 이렇게 주춤거리고 들어가냐? 저 사람이 방금 너 욕했겠다!

아잇, 제 귀에 안 들리니까 괜찮슴미다...

저저, 분명 욕했을 거야!

아, 그럼 오래 살겠네요 저...


주차감도 꽤 좋아졌다. (내 생각) 한 번 주차하는 데 핸들을 약 150바퀴 돌린 것 빼고는. 물론 아빠는 왜 이렇게 후방 주차를 못하느냐며 또 호통을 치셨다. 아니, 근데 진짜 스타렉스 주차 너무 어렵다. 차가 너무 크고 길고 후방 카메라도 없고 오른쪽 백미러도 42.195km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목이 거북이처럼 길게 늘어났으면 좋겠다. (이미 거북목인 것 같긴 한데) 어찌 됐건, 아빠는 예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며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화려한 칭찬과 함께 꼭 막걸리를 시키셨다. 내 운전 연습도 연습이지만 실은 팔도 막걸리를 차례로 맛보시기 위한 큰 그림은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아빠는 그렇게 양평 막걸리, 충주 막걸리, 여주 막걸리를 차례로 맛보시고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단풍이 예쁘다며 기분 좋게 웃으셨다. 단풍색 아빠 얼굴. 나 참! 하며 웃는 엄마 얼굴.


원래는 아빠가 스타렉스를 주겠다고 하셨다. 이제 농사일도 줄고 12인승 차를 크게 쓸 곳이 없어 작은 차로 옮겨 가겠다고 하시며 그런 결론이 난 것인데 나는 차가 생긴다는 생각에 앞뒤 안 재고 덜컥 승낙해 버렸다. 워후! 좋죠! 그렇게 대뜸 스타렉스를 가지게 되는 듯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12인승을 끌고 다녀서 뭐 한담. 이야말로 특대왕 허세가 아닌가. 빡빡한 주차장 사정은 또 어쩌고. 주차하다가 괜히 다른 차 툭 건드려서 돈만 날릴 수도 있다. 결국 잠깐 떠올랐던 '차의 대물림' 이야기는 쏙 들어가고 나는 이번에도 반짝 허세로 얼결에 가을 나들이를 마무리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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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커피(둘 중 덩치가 큰 녀석)가 눈을 째끔 떴다. 태어난 지 열흘쯤 되었을까. 처음에는 눈을 뜬 줄도 몰랐다. 그냥 이대로 서울로 올라가겠거니 하고 포기한 상태로 기념사진이나 찍자 해서 두 마리를 안아 들었던 것인데- 사진을 찍고 보니 커피가 조그만 눈을 앙증맞게도 뜨고 있었다. 우리가 안는다며 부산을 떠니까 뭔 일인가 해서 귀찮은 듯 슬쩍 눈을 떠 본 걸까? 엄지는 제 새끼를 어떻게 할까 봐 옆에서 종시 안절부절. 얼른 사진을 찍고 집에 잘 넣어 주었다. 둘 다 몽실몽실 초코빵처럼 잘 크고 있다.

아무래도 얼결에 눈 뜬 듯_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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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좀 허세였어도 아빠는 늘 진심이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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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로 올라간다고 하니 엄마가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강아지 한 번 더 안아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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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차 이름부터 지었다. (허세 1)

캬- 끝내 준다. 작명소 해도 되겠다. (허세 2)


정작 뭔지는 쑥스러워서 말 못 하겠다. 나중에 정말로 차를 사게 된다면 짠- 공개해야지. (안물안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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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바람이 차다.

바람에서 겨울 내음이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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