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Nov 15. 2023

때로는 확실하고 분명한 기억으로

꾹꾹 눌러쓴 세 글자

-

얼마 전 봄이와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봄이는 중3 때 만난 친구다. 같이 교환일기를 썼고 그린피스에 가입하기로 약속했고 나중에 세계 일주도 같이 가자고 했었다. 지나고 보니 이룬 것보다 못 이룬 약속들이 더 많지만 지금까지 여전한 친구로 남아 서로의 곁을 지켜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좋지 아니한가.


봄이,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고등학교 진학을 코앞에 둔 2월. 그때 무슨 수업이 되겠는가. 영화를 빌려 보고 일부는 만화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수다를 떨며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친한 친구들 한 무리끼리 롤링 페이퍼를 썼다. 빈 종이를 하나씩 나누어 가진 후 위쪽에 이름을 쓰면 그 아래로 친구들의 메시지가 채워졌다. 한 명 한 명 정성 들여 썼다. 모두가 애틋했다. 봄이에게도 물론이었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 가기를 무척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봄이는 먼 곳에 떨어진 여고에, 나는 당시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던 남녀공학에 배정되었다. 무척 속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내게로 다시 돌아온 롤링 페이퍼. 어딘가에 지금도 남아 있을 텐데.  


친구들의 메시지를 읽으며 이별을 실감했다. 우리 오래오래 만나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대학에 가서도, 어른이 되어서도. 가수 김경호의 팬이었던 내게 한 친구는 20년 후에 김경호를 꼭 데리고 오라고 했다. '경호 부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덕담과 함께. 승호 부인과 희준 부인도 있었고 당시 일본 문화를 좋아하던 친구들에게는 라르크 앙 시엘의 하이도나 엑스 재팬의 요시키 부인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모두가 참 그 나이답게 순수하고 뜨거웠구나 싶다. 그렇게 한참 메시지를 읽고 있는데 봄이가 갑자기 오더니 내 종이를 가져갔다.


내가 까먹고 안 쓴 게 있어! 잠깐만!


얼마 후 돌아온 종이에는 까맣고 진한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따랑해.


-

누구에게나 삶의 고비가 찾아온다.


내가 저 파도를 넘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정말 틀렸다, 아무래도 넘어지겠다, 잠겨 버리겠다, 어쩌면 이대로 그냥 주저앉고 말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때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한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은 너무나도 희미하고 불투명해서 잘 안 보이니까. 잘 안 보이는데 억지로 보려 하면 괜히 눈만 나빠진다. 그러느니 확실해서 잘 보이던 때를 회상하는 것이 낫다.


내게는 봄이가 롤링 페이퍼를 주던 순간이 그랬다.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이던 세 글자. 그걸 건네어 주던 얼굴도 손짓도 모두 생각난다.


-

열다섯이던 우리는 어느새 마흔이 되었다. 그린피스에도 못 들어가고 세계 일주도 못했지만 이십오 년 동안 각자의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 여전히 곁에 머무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니까, 보다 확실하고 분명한 기억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거면 됐다. 충분하다.


-

어떤 말들은 사람이 사라지고 계절이 변해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시간의 힘을 이기는 것들은 대체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다. 사랑, 미움 어쩌면 미안함과 괴로움. 어느 쪽이든 아주 나중에는 이 모든 것을 선선히 내려놓고 사라져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원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말이다. 글이란 게 그렇다. 쓰기 전까지는 쓰는 사람 자신도 무엇을 쓰게 될지 모르는 순간들이 있다. 오늘의 내가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봄이를 떠올리면 그 세 글자가 함께 떠오르나 보다. 어쩌면 내 친구는 롤링 페이퍼가 아니라 내 마음에 그 글자를 새겨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

여담인데, 봄이는 내 흑역사도 모두 함께했다. 고1 학교 축제에서 귀신 분장을 하고 난타 공연을 했을 때 그 먼 길을 와서 기꺼이 관객이 되어 주었다. 에어컨도 없고 6층이나 되는 어두컴컴한 시청각실에서 환하게 웃으며 사진도 같이 찍었지.


연말에 집에 놀러 갈게.

올해도 보고, 오래도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혼술하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