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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5. 2023

수능 상념

길은 어디로든 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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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나절 독감 예방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다녀왔다. 오가는 길에 어쩐 일로 중고등학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이 시간이면 대부분 학교에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그러다 오늘이 벌써 15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아! 내일이면 수능이구나. 올해도 다 갔네, 다 갔어. 마을버스에 올라타 창밖을 보며 속으로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는데 닫힐 뻔한 문이 다시 재빠르게 열렸다.


"아악! 감사합니다아!"

"아, 살았다! 고맙습니다!"


시끌벅적하게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올라탔다. 근처 학교에서 몰려나왔음이 분명했다. 청소년 2명이요! 야, 고맙다! 그 와중에 먼저 올라탄 친구가 뒤따르는 친구 요금을 내 주기로 했나 보다. 삐빅- 하고 들어가려는데 그 순간 이어지는 멘트.


잔액이 부족합니다.


"아씨, 뭐야?"

"야, 걱정 마! 내가 할게!"


당황한 아이들 뒤로 멋진 흑기사가 나타났다. 도합 세 명의 몫을 한번에 찍은 흑기사는 아, 뭐야 1,800원밖에 안 하네! 하며 귀여운 허세도 부려 본다. 그 와중에 먼저 올라탔던 두 명의 친구가 머쓱하게 '내가 600원 바로 보내 줄게!' 를 외친다. 가장 마지막에 탄 녀석은 '왜 600원이냐?' 묻고, 그 말을 들은 흑기사가 '마을버스잖아!'라고 대답하는 사이 버스가 부르릉 출발했다.


나는 일련의 소동을 보며 마스크 속에서 내내 웃고 있었다. (쓰고 보니 약간 음침해 보이네? 그런 거 아니었는데??) 잔액 부족도 귀엽고, 1,800원 허세도 귀엽고, 600원 바로 보내 준다는 건 더 귀엽다. 그래, 친구 사이에도 금전 문제는 확실하구나. 다들 오래오래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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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를 타고 여러 정류장을 거쳐 집으로 달려가는 사이, 길가 곳곳에 붙은 수능 응원 현수막과 시험장 안내 현수막이 눈에 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꼭 수험생이 아니더라도 많이들 상념에 젖을 것이다. 자신의 수험생 시절을 떠올릴 수도 있고, 직간접적으로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은 생각들에 잠기겠지. 그러하므로 대체 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무엇이기에 해마다 이다지도.


그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은 이제 안다. 수능 성적이 인생 성적은 아니고, 수능을 안 본다고 해서 인생이 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반대로 수능을 잘 본다고 해서 그것이 곧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요, 진리요, 영원한 결말은 정말로 아니라는 것을.  수능 역시 우리 인생길 위에 놓인 여러 이벤트 중 하나이고 물론 잘 보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인생길이 끊어져 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했으면.


길은 어디로든 또 이어진다.

내가 걷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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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작품 중 <REAL>을 좋아해서 한동안 사 모았었다. 당시 다른 작품과 동시 연재를 했는지 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 중도에 멈추었지만, 중간중간 마음을 사로잡는 글귀들이 많아 오래 빠져 지냈다. 그중 백미는 6권이라고 생각한다. 휠체어 농구 만화이기에 멤버들 각각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노미야'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노미야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한 상태에서 휠체어 농구를 하는 다른 친구들을 만난다. 당연히 (스토리 전개 상) 이 친구들은 최약체 팀 소속이다. 아무리 봐도 우승과는 거리가 먼 팀인데 노미야가 농구장에 나타날 때마다 사활을 걸고 경기에 임하는 중이다. 연습도 사실 보잘것없다. 제대로 갖추어진 게 없는 팀을 위해 애쓰는 한둘의 힘으로 '타이거즈'가 망하지 않고 그나마 여기까지 온 듯하다. 그야말로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생명줄처럼 농구를 붙잡고 매일매일 코트 위에 선 것.


그리고 노미야는 한 이삿짐 업체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업한다. 노미야 또래 청년들이 함께 일하지만, 다들 곧 떠나갈 철새처럼 군다. 인사를 해도, 회식을 가도 서로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노미야가 어느 순간 독백처럼 읊조린다.


어딘가에 내 길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찾아내면 거기서부터 나다운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빈스. 나가노. 얼마 전 니들을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타이거즈가 언젠간 강팀으로 불릴 날이 올 것 같다는. 더 나아가 이런저런 운도 따라서 언젠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지도.

 

그렇다면, 얼마 전 너희들의 보잘것없는 연습도 최고의 길과 연결돼 있다는 것. 별 볼 일 없지만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길은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 나의 길은 지금과 하나의 땅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

나도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야. 지금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는 녀석이 어떻게 '나의 길'을 말하겠냐구.

 

아직 보이지 않는, 그러나 하나의 땅으로 이어진 나의 길.   - <REAL> 제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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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야의 말에 기대어 살던 시기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나도 노미야와 다르지 않았다. 어딘가에는 내게 꼭 맞는 길이 있을 거라고 믿었고, 그 길만 찾아내면 훨훨 날아가듯 살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드나들었고 결과적으로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했다.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내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많은 상념과 푸념을 거듭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모든 길이 내 길이었고 나는 여러 길이 아니라 내 길 하나만을 걸어온 것이었다. 노미야의 말대로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은 하나의 땅으로 이어져 있었으므로. 


처음 글을 써서 돈을 벌었을 때가 생각난다. 교육 회사에 다니며 미친 듯이 출장을 다니던 때이다. 한 원고당 3만 원을 받고 카드 뉴스에 들어가는 15컷 정도의 스토리를 각색해 쓰는 일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처음 쓴 원고가 반응이 좋아서 제법 핫한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 뭉클한 이야기로 많이 공유되고 조회수도 높았다. (제목도 마침 <잔액이 부족합니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엄마는 커뮤니티 같은 거 잘 하실 줄도 모르시면서 어렵게 가입을 해 댓글도 남기셨다.


그 일을 3년 가까이 했다. 원고가 까이기도 하고, 담당자 실수로 내 이름 대신 다른 사람 이름이 올라가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원고료는 제대로 들어갈 테니 걱정 말라는 답변을 받았다. 마음이 참 오래 아팠다. 그게 아니에요. 돈은 상관없어요. 제가 쓴 글인데 다른 사람 이름으로 올라간 거, 그게 문제였어요. 하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알겠다고 했다. 그런 날들에 노미야의 일화를 떠올렸다. 가끔 이렇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길 위에서 내려오지만 말자. 계속해서 걷자. 그래야 길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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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곳에 다다르고 싶다고 이 길을 건너뛰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끔은 걷는 대신 뛰고, 뛰는 대신 나는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부럽고 좋아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신의 몫이 있다. 그걸 인정하지 못하면 살아가는 내내 괴롭다. 어디에 눈을 두고 무엇을 보며 걸어야 할지 선택하는 일. 이 선택을 우리는 가치관이나 신념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극비수사>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김중산 도사로 나오는 유해진 배우가 공길용 형사 역의 김윤석 배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신(所信)이 뭔지 아십니까. 믿음(信)이 거기(所)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해진 배우는 나뭇가지로 바닥에 소신이라는 한자를 쓴다.  


내 믿음이 그곳에 있다면 그걸 보며 걸을 수 있지 않을까. 흔들리고 넘어져도, 끝끝내 내려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 보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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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비장해지지 않기로 하지 않았었나?!

모르겠다. 요지경 같은 세상인데, 나 같은 놈도 하나 있는 거지 뭐.


모든 수험생들의 건투와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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