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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8. 2023

빈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삼십 년 만의 안과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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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안과에 다녀왔다. 다른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책을 보는데 눈이 부옇게 흐린 느낌이 들어서 오랜만에 시력 검사도 받아볼 겸 방문했다. 그러고 보니 안과는 성인이 되고 나서 처음이었다. 그러면 그전은 언제였는가 떠올리다가 깜짝 놀랐다. 무려 여섯 살 때다. 아니 그럼 삼십 년 넘게 안과를 한 번도 안 갔단 말인가? 놀랍게도 그랬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그러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여섯 살 이후 처음으로 안압과 동공 체크 등을 하면서 새삼 알게 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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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 때 엄마 손을 잡고 난생처음 안과에 갔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가장 큰 이슈는 동공에 거미줄 같은 막이 있어서 시력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진단이 내려진 것. 엄마는 깜짝 놀라 그게 뭐냐고 물었고, 원래 태아 시기에 없어져야 하는 동공막이 가끔 나처럼 그대로 남아 동공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질 수도 있고 그대로 남을 수도 있는데 일단 시력 검사를 해 보고, 보는 데 지장 없으면 그대로 두어 보자는 결론이 났다. 걱정이 태산인 엄마 속도 모르고- 나는 시력 검사용으로 쓰게 된 빨간 테 잠자리 안경이 신기해서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던 기억만 난다. 엄마는 그때 겁이 나서 의사가 가리키는 내 동공 사진도 못 보겠다며 손을 내저었다고.


다행히 시력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살아오며 시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크게 나빠지지 않고 지금까지도 그냥 나안(裸眼)으로 살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동공막 어쩌구에 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진료 전 내 눈을 먼저 체크하던 간호사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만 해도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 동공 사진 다시 한번만 찍을게요.

네? 아, 네에. (뭐지? 왜 나만 다시 찍지?)

어? 동공이 너무 작은데...? (혼잣말인데 다 들림)

네? 동공이 작다구요? (내 동공 무슨 일이야...)


나 참! 눈이 작은 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는데 하필 동공마저 작을 게 뭐람! 세상에 동공이 얼마나 작으면 사진까지 다시 찍어야 하는 거야? 좀 충격이었지만 순순히 다시 찍었다. 나에 대해 새롭게 안 사실이구만. 눈도 작고 동공도 작은 사람. 젠장! 이러면서 구시렁구시렁 진료를 기다리는데 곧 내 차례가 왔다. 의사 선생님이 흠 하며 내 사진을 보고 계셨다.


어, 일단 여기 보시죠.


히익! 저게 뭐람??? 살면서 내 동공 사진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눈이 뭐 저렇게 생겨먹었담?' 할 정도로 이상했다. 눈앞에 모래폭풍이라도 머물러 있는 듯, 뭔가 흑갈색 막 같은 게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엉켜 있었다. 동공이 작으면 원래 저런가?? (아니었음)


이게 원래 정상적인 형태인데요. 동공막 잔존증이라고 아직 동공막이 남아 있네요.

아! 저게 아직 있었네요?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앞은 잘 보이시죠?

네, 문제없이 잘 보여요.


심지어 시력 검사 때마다 찍기 신공이 발휘되는지 시력이 유지되거나 좀 더 좋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검사 시 또렷하게 잘 보이는 것만 말해야 한다고 들은 것 같기는 한데요. 간호사 선생님의 막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방정맞은 제 입은 멈출 줄 몰랐고요... 또렷하지 않아도 대충 이런 모양인데 싶은 걸로 말하다 보니...!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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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걱정했던 눈 흐림 증상은 계절이 건조해지면서 건조 염증이 생긴 거라고. 안약 처방으로 진료가 끝났다. 의사 선생님은 보는 데 문제없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남겼다.


다행이네요. 원래 동공이 다 가려지면 조치가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요. 요기 빈틈들 보이시죠? 다행히도 가려진 막 사이사이에 빈틈이 있어서 지금 이 빈틈으로 세상을 보고 계신 겁니다. 사람들은 동공 전체로 보고 있다면, 지금 요 구멍들로 보고 계신 거죠.


선생님의 막대가 내 동공막 사이 송송 뚫린 구멍들을 톡톡 짚었다. 호오, 그렇군요. 호기심이 생겨 사진을 유심히 보았다. 이건 마치 신혼 첫날밤을 몰래 구경하고 싶어서 손가락에 침 발라 창호지 문을 뚫고 보던 그런 느낌인 건가? (이봐, 그럴 리가 없잖아...) 아무튼 잘 보이니 다행이었고, 아주 작은 틈새들을 놓치지 않고 열일하고 있는 내 눈이 좀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공이 작다는 표현은 좀 그렇군. 그저 가려져 있을 뿐이에요! (갑자기 당당해짐) 


집으로 돌아오며 엄마한테 그 얘기를 하니 놀라는 한편으로, 좀 안타까워하셨다. 예전 안과에서 조산아들한테 많이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들었던 것을 기억하신 까닭이었다. 나는 성질이 급해서 여덟 달 반 만에 튀어나왔는데 사실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된 것일 뿐. 아기 때만 작게 태어나고 지금은 아주 건장한 청년(몇 살까지 청년이더라...?)이 되었으니까요. 게다가 열일하는 눈이 좀 귀엽지 않나요? 혹시 동공막이 싹 걷혔으면 시력이 2.0 아니었을까요? 아, 갑자기 좀 아깝네! 등지의 쓸데없는 신소리를 하며 그날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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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특히 그날 하루가 참 감사했다. 삼십 년이 넘도록 안과에 갈 일이 크게 없었던 것도 감사하고, 어쨌든 건강하게 잘 살고 있으니 그것도 참 감사했다. 그러면서 새삼 빈틈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빈틈'은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뜻으로 많이 쓰이니까. 예를 들어, 허술하고 부족한 사람을 빈틈이 많다고 하거나 어떤 일을 할 때 빈틈없이 꼼꼼하게 하라는 식이다. 그런데 빈틈이 이렇게나 소중하고 감사할 줄이야! 내 동공막 사진을 떠올리니 좀 웃기기도 하고. 어쩜 그렇게 구멍이 뚫려서는 크크- 아무튼 빈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형신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살면서 동공 작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며 웃다가 점점 진지해졌다. 그러다 결국 우리 좀 더 빈틈이 있는 사람이 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안과에 가서도 깨달음과 교훈을 얻어오다니 그만 좀 배우자며 질색하다가 서로 낄낄 웃으며 마무리.


어쩌겠나. 삶의 모든 순간이 이렇게 예기치 않은 깨달음을 던져 주니 말이다. 언제나 '나'와 '세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더 잘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만하면 잘 알았지 하고 안심하면 또 이렇게 전혀 몰랐던 나와 세상을 발견하니- 그래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배우는 존재라는 말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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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이 있어야 환기도 되고 활기도 찾아온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틈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알게 되는 순간들은 많다. 너무 흔한 결론이지만, 뭐 그렇다.


삶에서 감사가 사라지고 불평불만이 쌓일 때는 나조차 빈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인간임을 상기해야겠다. 그만하면 되었으니 이제 내려놓고 음악을 들으며 한 템포 쉬어가자고 중얼거리는 것도 좋을 테다. 그 한 템포가 꽤 괜찮은 빈틈이 되어 줄 것. 혹시 아는가. 그 틈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 하나로 또 내일을 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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