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Dec 08. 2023

진짜인 것 하나

남의 것 말고 나의 것

-

형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깨달은 바가 있어 기록해 둔다.


-

얼마 전 형신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최근 바디로션을 새로 구입했다가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향에 관심이 있어 오래전부터 한번 써 보고 싶었던 제품이 있었다. 찜해 두고 기회만 엿보던 찰나, 마침 써 오던 제품이 동이 났다. 오, 그럼 이제 이걸 사서 써 볼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용량 대비 가격이 비싼 것 같아서 왠지 망설여졌다. 그냥 기존에 쓰던 제품을 쓸까 어쩔까 하는데 눈에 들어온 후기글이 있었다. 눈여겨봐 둔 제품과 거의 흡사한 향의 제품이 있는데 가격은 절반이라는 것! 좋은 대체품이 될 것이라는 말에 혹해서 찜해 둔 제품 대신 그 제품을 샀다. 며칠을 기다려 드디어 손에 넣었는데! 그런데!


전혀 달랐다. 


만일 염두에 둔 제품이 없었다면 그것대로 괜찮았을 텐데 바라던 것이 있고 그 모습을 전혀 다른 제품에서 찾으려니 괜스레 실망이 컸다. 그래도 이왕 산 거 그냥 여기에 적응해 보자 하고 쓰는데 웬걸. 쓰면 쓸수록 '본래'가 생각나는 것이다. 좋은 대체품이라니,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다시 그걸 사야 하나 고민 중이지 뭐야. 내 말에 형신이 웃으며 답했다.


비슷한 것 열 개보다 진짜인 것 하나가 나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본질적인 것을 두고 다른 것을 선택했을 때 결국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곤 했던 시간들. 변죽을 열 번 울려도 제대로 된 음 하나를 내는 것이 끝내 답이 되던 시간들.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레 '진짜인 것'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그 말을 들으니 정민 교수님의 책이 생각나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고.

핵심을 찌르는 말이군.

그렇지. 진짜가 지닌 걸 오리지널리티라고 하던가.

그런 걸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하겠지.

그러려면 계속해서 내 것을 해야 해. 남의 것 말고.

그렇지. 내 것이 아니면 오래 못 해.

맞아. 잠깐은 가능하지. 하지만 결국 들켜 버리고 오래 못 가더라.

그런데 어떤 경지에 가면 진짜와 가짜의 구별도 무의미해지지 않을까.


내 말에 형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마 그런 차원을 넘어설 거야.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깊이 공감이 되었다. 정말 맞는 말이지 않은가. 모든 차원을 넘어서는 차원, 이란 건 어떤 걸까. 그런 경지는 엄청나게 대단하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외로울 것 같다. 내가 '그래도 그런 경지에 다다라 보고 싶다'라며 웃자 형신이 진지하게 말했다.


일단 오늘 하루부터 잘 살고.


그래, 그는 현실적이고도 이성적인, 내가 사랑하는 T형 인간. 창밖으로 짙은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평생 이런 이야기들이나 하고 살았으면 좋겠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형신이 웃었다. 하면 되지. 그 말이 참 좋았다. 그래, 하면 되지. 안 될 건 또 뭐람.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번 '진짜인 것' 하고 되뇌어 보았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살면 진짜가 된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으로 살고 싶은지 제대로 알기가 힘들다는 것. 그래서인지 유독 남의 것을 따라 하고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에 이목을 빼앗겨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처음에는 이러한 풍조가 시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최근 다시 무협을 집중해 보며 생각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그 옛날에도 돋보이고 싶어 하고 천하제일이 되어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군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리고 갖은 시기 질투 끝에 타인을 미워하고 이간질하며 분란을 조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비교하는 마음, 누군가를 미워하고 해하는 마음, 질투하고 폄훼하는 마음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인정 욕구'와 관련해 형신과 또 한바탕 대화를 나눈 바가 있는데, 그것은 다른 글에서 써 보아야겠다. 소름이었던 것은 그는 한 한국 위인의 사례를, 나는 무협에서의 한 인물을 들었는데 놀랍도록 똑같은 행보를 보였다는 것. 두 인물 모두 어떤 경지에 오른 선인이자 대인배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며 아주 즐거운 토론 시간을 가졌다. 무협 에세이를 쓰기 시작한 후로 형신에게 무협 이야기를 오십 번은 했는데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어줘서 감동이고 고맙다. (앞으로 그 백 배만 더 할게요......)  


-

오늘은 또 바디로션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군. 좋은 배움들이 이어지는 겨울이다. 진짜로 살겠다는 뭐 그런 강박이나 다짐도 버리고, 하늘이 좋을 때는 하늘을 보고 좋은 사람이 있을 때는 좋은 시간을 함께하며 살면- 조금씩 내려놓고 놓여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그래도 이 같은 헤맴을 이해하고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어 기운이 난다. 오늘은 그 힘으로 22분을 뛰었고, 글도 썼다.


좋은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 5분 정도면 더 뛸 수 있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