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파 라히리의 <로마 이야기>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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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카?"
"로커, 로커! 롹커...?"
"라까? 롸카? 하하하!"
이리저리 발음을 굴려 보던 친구와 나는 그만 당황하고 상심한 얼굴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중년을 넘긴 금발의 여인들은 우리의 발음을 따라 하며 웃었다. 역 안에 혹시 짐을 맡길 수 있는 로커가 있는지 물었을 뿐이다. 놀리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못 알아들어서 다시 물어본 것일 수도 있지만 그때 우리는 왠지 주눅이 들었고 서글퍼졌다. 스물둘 겨울,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 지 보름 즈음 되던 날, 로마 떼르미니 역에서의 일이었다.
겨우 한 달 남짓이었지만 그런 순간들은 많았다. 스위스에서는 사복 경찰에게 갑자기 불심 검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 하필 가방을 바꿔 들고나와 여권을 숙소에 두고 나왔던 나는 타고 가던 기차에서 내려 한 시간 가까이 경찰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가까스로 신분을 증명하고 검문소 같은 곳에서 풀려나올 때 경찰은 요즘 미싱 차일드(!)가 많아 그랬다며 미안한 듯 말을 건넸다. 당황해 눈물 자국이 잔뜩 찍힌 얼굴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그곳을 나왔던 그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차적으로 여권을 놓고 나온 나의 책임이 컸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나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밤이 길었다. 나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검문의 대상으로 택하게끔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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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책 <로마 이야기>를 읽으며 새삼 그때가 떠올랐다. 이 책은 마음산책 북클럽을 통해 처음 접했다. 나는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을 우연히 읽고 완전히 빠져들어 몇 해 전에는 북클럽까지 가입했는데,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동일 작가의 책이었다. 띠지에 나온 그녀의 얼굴은 무척 강렬하고도 신비롭다. 첫 책을 받고 작가의 이름만 들었지 생애나 이력을 잘 몰랐기에 책날개부터 먼저 유심히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 이어 이번 책도 그에게는 외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썼다. 전혀 다른 말과 문화를 지닌 곳에 살면서 그 나라의 언어로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만약 그런 시공간을 가지게 된다면- 무척이나 새롭고 다양한 감정들 속에서 낯선 나를 만나게 될 것 같다. 그러자 <로마 이야기> 속 편편의 글을 읽으며 그 행간을 넘나드는 일이 왠지 난생처음 발을 디딘 타국에서의 여행처럼 낯설고 새롭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한국어이고 부드럽게 잘 읽히는데 왜 낯선 땅을 밟은 것처럼 조금은 어렵고 불편한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일까.
바로 이것이 줌파 라히리의 글이 지닌 힘이다. 익숙한 글과 문장 안에서 서걱이는 불편함을 느끼며 나와 내 세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힘.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정말로 누구인가'를 묻는 목소리는 그의 소설 안에서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총 3부 9편의 단편들은 이 질문을 향해 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성별과 나이, 성격과 상황 모두 다른 각각의 주인공들은 그러나 공통적인 특징을 지닌다. 모두 '경계'에 선 사람들이다. 대부분 자신이 나고 자란 익숙한 문화와 말을 떠나 다른 도시, 로마로 이주해 와서 어떤 시절과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는 <경계>에 나오는 서술자의 가족처럼 다른 가족을 관찰하는 가운데 지나간 아픔을 떠올리고 다독이는 시간일 수도 있고, <재회> 속 교수처럼 분명히 '더 나은 상황' 임에도 끊임없이 슬픔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P의 파티>에서는 원주민이라 부를 수 있는 서술자가 외국인인 L과 그의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낯선 자'가 어찌할 수 없이 지니는 돌출성을 조명한다. 이 돌출성은 다름을 보여주는 기제인 동시에 때로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P의 파티> 속 나에게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느껴진 것일까.
어느 쪽이든 저변에 깔린 '다름'과 이로 인한 '구별 짓기'의 순간은 이후의 단편들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외부에서 기인한 것이든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인식하며 '나와 타자'를 구별하고 그 경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 모두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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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집>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오래 아팠다. <밝은 집>을 꿈꾸었던 한 이민자 가정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 까닭이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며 건실하게 살아가던 한 이민자 가족이, 자신들이 지닌 '타자성' 때문에 끊임없이 돌출되고 배제되며 끝내 어떠한 방식으로 추방되는가 - 그것이 자의이든 타의이든 간에 - 를 보여주는 담담하지만 강렬한 소설이었다. 소설 속에서 아내는 처음에 도처에 깔린, 위협적으로 자란 '나무'를 무서워했지만 그것은 곧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환된다. 사람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 눈빛이 지니는 온도에 누군가는 얼어 죽거나 타 죽을 수도 있는 것. 이 소설을 통해 나는 '무엇이 정말로 사람을 두렵게 만들고 망가뜨리는가'에 대해 새삼 돌이켜 보았다.
그러면서 떠오른 기억. NGO 활동가로 일할 때 나는 외국인 노동자 지원 사업의 담당자로 일하며 많은 외국인 노동자 친구들과 가까이 지냈다. 대부분이 가족을 위해 타국에 와 성실히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타국 살이의 팍팍함, 고된 노동, 고국에 대한 그리움, 때로는 신분의 불안정함까지 그들을 괴롭게 만드는 요소들은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럼에도 늘 밝게 웃었고 자신은 괜찮다며 오히려 아직 어리고 젊어 툭하면 일렁이던 나를 걱정하곤 했다. 몇몇과는 주말에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를 스쳐가던 눈빛, 내 친구의 얼굴에 감돌던 긴장을 기억한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내 어찌할 수 없이 지녀야 하는 긴장감 어린 마음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고 있던 내게도 그대로 전이되곤 했다. 버스 대신 지하철을 타고,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일부러 돌아서 갈 때 내가 잠시 이방인이 되었던 로마에서의 겨울, 스위스에서의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다. 스산하게 얼어붙었던 마음. 누군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이 위축되었던 것은 그 계절이 겨울이라 그랬던 것만은 아닐 테다.
2부 전체를 관통하는 <계단>은 계단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작처럼 보여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차례로 바뀌지만 이들 모두 계단을 오가는 가운데 그와 관련된 일화가 전개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계단은 그런 곳이다. 오르거나 내려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 누구도 그곳을 영원한 거처로 여기며 상주하지는 않는다. 이따금 쉬어가거나 잠시 몸을 피하는 정도의 소임을 하는 곳. 나는 계단을 거쳐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계단이 바로 그들의 삶을 은유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는 사람,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며 계단에서 낄낄대는 한 무리의 사람, 사람들. 잠시 스쳐가는 그 풍경 속에서 위태롭고 평안한 삶의 모든 장면들이 피고 진다. 서로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아는 이야기들의 산실이다, 계단은.
3부에서 이어지는 네 편의 단편이 모두 기억에 남지만 그중에서도 <행렬>과 <쪽지>는 밑줄을 많이 그었다. 모두 고통에 대한 직접적인 언술이 있다. <행렬>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는 평화로운 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성모마리아의 행렬을 기다리는 모습에서는 언뜻 기대감도 비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머무는 공간은 위태롭기만 하다. 잠긴 방, 무서워 보이는 샹들리에. 아내는 행렬을 기다리며 만난 많은 여자들을 보며 남편에게, 저들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한다. '저 여자들은 삶의 표시가 있고 삶에 붙어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니야?'라고 되묻는 남편에게 아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다(<행렬> 203p-204p). 아내는 어린 날 로마에 와 공부를 하고 지금의 남편 전에 로마 남자도 만났다. 50세가 되는 동안 로마는 그녀 삶의 일부(194p)였지만 여전히 부표처럼 떠돌며 어디에도 붙지 못한 아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는 샹들리에가 언제라도 떨어질 수 있다고 여기며 '허공에 붙어 있는 것 같아'라고 불안한 듯 말한다(197p). 그녀의 삶이 오랫동안 그러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 부분이다.
<쪽지>는 읽고 나서도 마음에 깊이 남았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장성한 쌍둥이 아들들과 떨어져 살며 홀로 삶을 꾸리고 있는 이민자 여성의 이야기. 그녀는 양장점에서 일하다 잠시 한 초등학교에서 1시간 정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된다. 어느 날 익명의 쪽지를 받는데, 서툰 글씨로 쓴 내용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철렁한 것들뿐이다. '우리는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너는 더러워'... (227p-228p) 주인공은 지구 반대편에서 이십 년을 살았고 여전히 그 지역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만의 오해였을까? 제2의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곳에서 '당신이 이곳에 머무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메시지를 받을 때의 마음이란. 그녀는 냅킨을 입에 넣어 녹이곤 하던 어린 시절의 습관대로, 그 쪽지를 입안에서 녹여 삼켜 버린다. 그렇게 그녀는 종이가 풀어져 녹을 때의 신맛과 함께 메시지를 삼킨다. 이는 고통을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소화해 해결하려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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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나니 먼 곳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기별을 받은 듯 마음에 파문이 인다. 과거에 내가 잠시 머물렀던 시공간, 그 안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과 언어도 떠오른다. 어떤 순간에 나는 원주민이 되어 이국의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또 다른 순간에는 더듬더듬 외국어를 내뱉으며 현저히 느린 속도로 낯선 땅의 풍경을 읽기도 했다. 내 이름은 각 나라의 언어에 따라 잠시 변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 성격도 그랬다. 어디에 머무는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의 외형을 바라볼 때 내 안의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 당신은 정말로 누구인가?'
우리는 정말로 누구일까. 나의 정체성은 무엇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애초에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가, 규정될 수 있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은 좋은 책이 지니는 특징이다. 줌파 라히리의 글이 그렇다. 끊임없이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고 여기와 저기, 이곳과 그곳의 구별을 재해석한다. 그러면서 독자는 은연중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나의 것으로 가져와 몰입하며 보게 된다.
위에서 던진 질문은 내게도 큰 화두이다. 여전히 답을 구하기 위해 살아가는 중이다. 답은 어디에 있을까. 글쎄, 이렇듯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삶에 대한 궁구는 결국 각자의 몫으로 남는 게 아닐까. 무엇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집중하면 그나마 길이 좀 보이려나. 모르겠다.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나는.
마지막으로, 이 땅의 누구도 '내가 나이기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에 대해 쓰고 싶다. 그래서 <택배 수취>의 이민자 소녀가 마지막에 느낀 '가슴 한가운데 총알 하나가 박힌 것' 같은 통증을 지니고 사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고통이 끝내 해소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방법이 쪽지를 삼키고 난 후의 '신맛'은 아니기를 조용히 바라 보는 저녁이다.
날이 부쩍 추워졌다. 같고도 다른 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각자의 계절을 무탈히 지나가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