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건너는 일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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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라는 단어가 새삼스러운 시대이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할 때 우리는 '낭만적이다' 혹은 '낭만이 있다'라고 하는데 현시대에 '현실'에 매이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팍팍한 현실 속에도 분명 낭만은 있다. 그러고 보면 낭만은 행복하고도 꽤 근접한 개념이 아닐까.
존재하는데,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만 발견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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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케이와 오랜만에 만나 좋은 저녁을 보내며 새삼스레 낭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케이와 나는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볼까 말까 하지만 횟수가 별로 중요치 않은 사이이다. 만나도, 만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늘 진심인 걸 알기 때문이다. 관계의 깊이가 만남의 횟수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몇몇의 친구들을 통해 깨닫는다. 무엇보다 케이와는 낭만이 있는 사이이다. 낭만이 있는 사이? 그게 뭐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케이와의 만남에서 낭만을 느끼는 것일까.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케이와의 만남에는 아무런 사심도, 어떤 의도도 없다.
순수하게 서로의 만남이 즐겁고 좋아서 만나기에 현실에 매이지 않고 만날 수 있다. 충분히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말들을 해도 무척이나 안전하다. 오래된 친구여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잊고 있었던, 낭만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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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와는 열일곱에 만났다. 고1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은 반이 되고 케이는 이과로 나는 문과로 진학하여 다시는 한 반이 될 수 없었지만 한 번도 멀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왔다. 전적으로 케이 덕분이다. 어느 날 불현듯 연락을 해 어제 본 것처럼 담백하게,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내는 그의 인사법을 나는 참 좋아한다. 명쾌한 다정함이 있다고 할까.
올봄, 케이에게서 엽서 한 장이 날아왔다. 언젠가 선물해 주마 약속했던 음악 CD와 함께.
벽에 기대어 앉아 천천히 엽서를 읽으며 오직 사람의 손을 거쳐야만 전해지는 소식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어떤 감정들은 얼마간의 기다림, 시간, 거리가 존재한 후에야 탄생하는 것 같다. 애틋함도 그렇다. 이 시대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마음이 팍팍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까. 기다림의 폭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만남에 대한 설렘과 기대도, 그 이후의 기쁨도 함께 줄어들고 있는 것만 같은 날들. 그래서 케이의 엽서가 더 반가웠다. 케이의 글은 그의 성격처럼 명쾌하고도 다정했다. 그중 눈길을 오래 머물게 한 글귀가 있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좋은 것이 많은 것도 알게 되었지만, 슬픈 것도 많은 걸 알게 되어 버렸어.
그때 잠시 엽서를 내려놓고 창가를 서성이며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천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것 같다. 그래, 많은 일이 있었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이제 그 시간들도 멀리 흘러가 버렸구나. 어떤 시간들은 여전히 곁에 머물며 때로 어제 일처럼 치달아 오지만- 그래도 건너 건너 여기까지 왔다. 그때마다 함께 웃고 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며칠 사이를 두고 답장을 쓴 뒤 부쳤다. 봄날의 끝에 부친 엽서는 초여름에 도착했다. 계절의 사이를 건너는 일도 조금은 낭만적인 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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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진심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엽서에 담긴 글들이 특히 그렇다. 정해진 규격 안에 몇 줄의 글을 담으려면 언어를 고르고 골라야 한다. 정말로 필요한 말들, 진심인 단어들을 조심스레 골라 적고 못다 한 말들은 후일을 기약할 때 우리는 흔히 '이만 줄인다'라는 말을 쓰곤 한다. '이만 줄인다'에 담긴 마음을 헤아려 볼 때- 내 마음도 어딘지 모를 먼 곳으로 잠시 떠났다가 돌아온다. 이제는 자주 보기 어려운 단어들, 문장들을 만날 때 깊이 새겨 두고 오래오래 꺼내 보고 싶다.
눈바람이 몰아치는 하루였다.
입간판이 쓰러지고 사람들의 종종걸음이 이어졌다. 봄날이 아득하게만 느껴져 늦봄, 어떤 날에 찾아든 엽서에 대해 써 보았다. 겨울에도, 우리는 어떤 계절로든 떠날 수 있다. 그런 일도 조금은 낭만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이만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