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억에 남는 건 이유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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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향 한 묶음을 사서 오래오래 향내를 맡는 꿈을 꾸었다.
꿈에 어쩌다 절에 가 있었고 사람들이 많아 나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줄을 섰다. 법회라도 끝난 후였을까. 웅성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여러 절 용품들 중 하나씩을 골라 들기 시작했다. 어엇! 그럼 나도 하나 선택해야 하나? 덩달아 고심하며 뭐가 있나 둘러보니 대략 좋은 글귀가 적힌 절 수건, 향, 염주 팔찌와 같은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수건을 손에 들었는데 시골집에도 이런 건 많지 싶어서 굳이 줄을 이탈해 향으로 바꾸어 왔다. (약간, 향에 미친 자라...) 향이 한 묶음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코를 대고 깊숙이 향내를 맡았다. 향이 아주 좋아서 오래오래 고개를 묻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 조금 신기하기도 하고 흥미로워서 수첩에 짧게 기록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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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잘 꾸는 편이지만, 주로 서사 없이 번잡한 컷으로 뒤죽박죽 나오는지라(소위 개꿈) 평소에는 딱히 기록할 게 없다. 그런데 지난번에 친구 씸이 <꿈을 기록하는 모임>에 나간다고 했던 기억이 나서 얼마 전의 꿈을 기록해 보았다. <꿈을 기록하는 모임>에서는 그 주에 꾼 꿈을 자세히 기록하고 이에 반영된 심리와 철학, 정서적인 부분들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고 했다. 기회가 되면 한번 가 보고 싶은데 자리가 있을는지.
확실히 꿈은 그 당시의 마음과 정서를 크게 반영하는 것 같다.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절 꾸었던 꿈 하나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매 순간 쫓겼다. 일정이 빡빡하기도 했지만 함께 논문을 준비하던 5인 중 나만 질적연구 방법을 택해 진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큰 위안이 된 한편으로, 나만 못 쓰면 어떡하지, 나만 통과를 못 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과 근심도 만만치 않았다. 모두 통계 모형을 잡고 결과를 내 논문 작성에 들어간 동안, 나는 사람들 인터뷰를 겨우 마치고 녹음 파일을 컴퓨터로 옮기는 전사 작업을 하느라 녹음기와 전쟁 중이었다. 지금은 녹음 파일을 올리면 알아서 문서로 출력해 준다고 하니 기술의 발전이 놀랍기만 하다.
그때 모두가 올라탄 버스를 나만 놓치는 꿈을 참 많이 꾸었다. 분명 정류장에 서 있어서 내달렸는데 나를 뻔히 보면서도 야속하게 문이 닫히던 버스. 한 번은 이미 탄 버스에서 내리라는 꿈도 꾸었다. 4년 동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그 생활에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마음이, 외려 큰 부담으로 작용해 그런 꿈을 꾸었던 걸까?
버스를 놓치는 꿈이라니. 참 정직도 하다. 그때, 꿈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크게 웃으며 또 안타까워하며 위로해 주었던 오후가 생각난다. 태주야, 할 수 있어! 우리 같이 졸업하자! 그 말에 힘입어 결국 끝까지 썼고 무사히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졸업식 날 우리들은 다 같이 사진관에 가 기념사진을 남겼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애틋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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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꾼 지 십 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생생한 또 다른 꿈 하나를 기록해 본다. 이 꿈은 꾼 날 글로 남겨 두어 정확히 날짜까지 적혀 있다. 2014년 11월 18일. 제목은 <달 밝은, 꿈>. 꿈에서 비행을 했던 걸까. 어느 순간 수풀이 우거진 아마존 정글 같은 곳에 불시착해 버린 내가 아무런 걱정 없이 오래오래 달구경을 하던 꿈이었다.
그대로 잡아먹혀도 좋겠다고 여겼을 만큼 크고 환한 달이었다.
- 여긴 어딜까.
달이 사라지면 곧장 어둠 속에 처박힐 법한 농도의 밤. 나는 왜 비행기를 몰고 있었나. 그리고 어째서 비행기는 그토록 낮은 고도를 유지하다가 그만, 불시착하고 말았나. 발밑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누런 강물과 가끔씩 머리를 치받아대는 악어들. 치렁치렁한 나무 등걸들이 시작도 끝도 없이 아무렇게나 얽혀 있고, 내가 그러쥐는 족족 나를 누런 물에다가 박아버릴 기세로 죽죽 늘어지는 것이었다.
물에 닿기 전에 이쪽으로, 악어가 잡아채기 전에 다시 저쪽으로. 어서 높은 곳에 올라 누구에게든 연락을 해야지.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선 높이에는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올라서면 다시 늘어져 수면 위에 닿고, 다시 올라서면 다시 떨어져 수면 위에 닿고. 힘은 점점 빠져만 가고 그 와중에도 달이 참 밝아서 이따금씩 달을 올려다보곤 했다.
- 달, 참 밝다.
이제는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으로 등걸을 다시 그러쥐었을 때, 발끝에 채는 무언가가 있었다. 남은 힘을 간신히 모아 툭 하고 건드려 보니, 뚝 잘려나간 통나무가 두둥실 떠올랐다. 물살에 자꾸만 밀려나는 것을 몇 번의 발길질 끝에 겨우 붙잡아 두고 위로 올라섰을 때,
- 악어 떼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나무를 따라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몇 번을 털어내다가 그냥 내버려 두었을 즈음 여전히 달은 밝았다. 넘실넘실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통나무 위에 올라 어디선가 나타난 커다란 나무줄기에 두 팔을 괴고 달을 바라다보았다.
- 달, 참 밝다.
희한하게 크고 밝은 달이었다. 그대로 잡아먹혀도 좋겠다고 여겼을 만큼, 크고 환한 달.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데 문득 마음을 스치고 지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 아무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겠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즈넉한 밤이었다. 저 달이 지고 나면 금세 어둠에 휩싸일 텐데도 그런 걱정 하나 없이 나는, 그저 달이 좋아 달만 바라보고 있었다.
- 이상스레 크고 밝은, 환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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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닿지 않는 밤에 달만 보고 있었는데도 마음이 참 편안했다. 드디어 끝에 다다랐구나, 라는 마음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 너무나 환하고 밝았던 그 달이 가끔 생각나는 밤에 이 글을 찾아 읽어 보곤 한다.
언젠가는 모두 끝에 다다를 텐데, 자신도 타인도 너무 괴롭히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 자주 잊지만 꿈 이야기를 빌려 다시 한번 새겨 본다.
오늘은 하늘이 흐리구나. 눈이 흩날려 그런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