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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Dec 02. 2023

그래, 5분 정도면 더 뛸 수 있지

달리기를 시작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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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고 나면 반드시 좋아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은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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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시작은 5분도 못 뛰고 멈출 것만 같다. 예전에 멋모르고 막무가내로 뛰다가 후유증으로 조금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몸이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달리기를 못했다. 그래도 늘 마음은 남아 있어서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다시 뛰기 시작했고 30분 달리기를 끝으로 또 오래 쉬었다.


그러다가 봄 무렵부터 슬금슬금 운동을 시작해 12월까지 왔다. 이제 10개월 정도 되었나 보다. 이렇다 할 목표 없이 내키는 대로 하다 보니 눈에 띄는 진전은 딱히 없지만- '아무튼 일단은 하고 있다'라는 사실에 방점을 찍으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 볼 수 있다.


첫째, 3월부터 시작한 플랭크를 지금까지 꾸준히 하고 있다.

> 오오,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 그, 글쎄요. 코어 힘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섰을 때 힘이 들어가 있는...? (나만 아는 느낌적인 느낌)


둘째, 달리기는 20분까지 왔다.

> 오오, 그럼, 내년 3월 10km 마라톤도 거뜬합니까?

 >> 예???? '거뜬'이라는 단어의 뜻이... 그사이 바뀌었나...


셋째, 망했다 싶은 마음이 오래가지 않는다.

> 오오, 이건 진짜 좀 괜찮군요.

>> 하루의 끝에 찾아드는 마음들 있죠? 그 마음들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야! 운동 하나 했음 됐지!


뭔가 더 써 보고 싶은데 더 이상 생각나는 게 없다. 다른 거 다 못해도 운동 하나만큼은 끝까지 해 보자, 라는 마음이다. 쌓이고 쌓이면 오늘보다 더 나은 날도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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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만 해도 달리기를 시작하려는데 도저히 못 뛸 것 같았다. 몸도 무겁고 뻐근하고. 그래도 일단 러닝 머신 위에 올라가서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생각한다. 뛰지 말까? 하, 오늘은 그냥 걸어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는다. 뛰고 싶지 않거나 겁이 날 때는 일단 5분만 뛰어 보자 주문을 걸면 된다. 나 자신아, 5분은 뛸 수 있잖니?  그럼 내가 또 순순히 답한다. 그래, 5분은 뛸 수 있지. 그럼, 5분 뛰어 보고 나서 결정하자. 그렇게 5분을 뛴다. 그 첫 5분이 제일 힘들다. 와, 역시 안 되겠어. 오늘은 진짜 20분 뛰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그런데 얼마 후 내 안에서 다시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지. 힘들긴 한데 그래도 5분만 더 뛰어 보지 않을래? 5분은 뛸 수 있잖아. 그러면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 그래, 5분 정도면 더 뛸 수 있지.


그렇게 10분이 되고, 그러면 다시 또 5분을 연장한다. 어어어 하다가 15분이 되는 셈이다.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디폴트 값에 어느새 도달해 있다. 그래, 15분 정도 뛰었으면 이제 빨리 걷기로 바꾸어도 무방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내 안의 나가 또 슬며시 입을 연다. 그래, 15분이면 훌륭하긴 한데 그래도 5분만 더 가 볼까? 그럼 20분인데 오늘 목표량 도달인 걸? 알다시피 20분을 찍으면 30분까지도 갈 수 있잖아. 안 그래?


그렇게 오늘 20분을 뛰고 왔다. 포기하고 싶어 하는 것도 나이고, 그걸 또 달래 가며 아무튼 하게끔 만든 것도 나이니 이건 뭐 운동이 자아 분열의 시간이로군. 결과적으로, 20분을 뛰었으니 23분, 25분도 가능할 것이고 어쩌면 올해의 끝에는 30분 대로 진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적어 두자. 그러면 비슷하게라도 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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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시작할 때의 마음은 늘 그렇다. 와, 오늘은 또 어떡한담? 그럴 땐 주문처럼 '일단 5분만'을 외쳐야겠다. 일단 5분만 해 보자. 딱 5분만. 책 읽기도, 달리기도, 글도 딱 5분만 마음먹고 진입부터 하면 의외로 순항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의 명언인지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나 보다. 예전에는 무슨 시작이 반이야! 반의반의 반도 안 되겠구만! 했는데 말이다. 이래서 사람이 오래 살고 봐야 한다. 생각도 참 변화무쌍하고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하구나.


얼마 전 쓴 글이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아 다시 쓰려는데 도무지 손에 잡히질 않았다. 마음 가득 울적함이 차올랐는데 한바탕 달리기를 하고 와서 메모에 이런 글을 남겼다.


슬프고 울적하지만 어쩌겠어. 다시 써야지. 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계속해서 쓸 거면 이 시간을 견뎌야 한다. 더 많이, 더 열심히 써 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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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모를 마지막으로 가을이 끝났다. 즐거운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렵고 긴 날들이었다. 그래도 보내고 나니 홀가분하다. 겨울을 대비해 손난로를 주문하고 무릎 담요를 눈여겨봐 두었다. 멀리 가 버린 여름이 그립지만 겨울에도 여름처럼 뜨겁게 타오를 수 있는, 살아서 기쁜 날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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