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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23. 2023

아름다운 것들은 금세 사라진다

존재하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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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되면 꼭 한번 가 봐야지 하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곳들이 있다. 대부분 크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시끄럽지 않은 곳들이다. 그런 곳들은 또 대부분이 구석에 숨어 있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서, 골목을 걷고 걸어서, 지도를 이리저리 살펴보아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곳들은 대개 그러하였다. 잘 눈에 띄지 않아서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기뻤고 소중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꿈처럼 잠시 존재하다가 금세 사라져 간다. '시간이 되면'이라는 조건을 달지 말 걸 그랬다. 작고 여린 것들이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에 그럼에도 꿋꿋하게 존재해 온 것들을 더 이상 놓치지 않고 싶다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작년 이맘때, 내 어려웠던 마음을 달래 주었던 독립서점 하나가 그만 문을 닫고 만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슬픈 인간>이라는 책을 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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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마음이 유독 힘들었던 시기에 불현듯 찾아가 거닐다 온 독립서점이 있었다. 집에서 멀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알아만 두고 오랫동안 가지 못했던 곳이다. 일주일에 사흘만 열어 때를 잘 못 맞추다가 어느 일요일 저녁에 마침내 그곳에 닿았다. 나는 종일 따라다니던 불안을 문밖에 던져두고 서점 안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곳은 작고 밝고 환했다. 양옆으로 책들이 가득 찬 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말랑한 젤리 하나를 쥐여 주며 천천히 보세요 했다. (젤리는 지구를 구한다!) 오랜만에 마음 놓고 그 시간을 거닐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아무런 결심도 없이, 이 책 저 책에 눈길을 던지며 그날 저녁을 지났던 기억. 모든 것이 무탈한 시기였다. 일도 하고 있었고 글도 쓰고 있었다. 몸도 건강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 이렇게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날 때마다 아득해지곤 한다. 어쩌면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는 질문 같은 것들이 생길 때마다 답을 구하는 심정으로, 마음에 묻었던 시공간들을 찾아갔는지도 모르겠다. 밝고 환한 그곳에서 나는 <슬픈 인간>을 들고 꽤 오래 서성이다가 나왔다. 나보다 더 오래전 시간을 살다 간 외국의 작가들이 슬퍼서 쓴 글들을 읽으며 크게 위안받았다. 왜 슬픈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슬프네요. 그런데 백 년 전에도 슬펐나 봐요. 그럼 아마 백 년 후에도 슬프겠죠. 아, 슬프다. 


감정이 언어가 되어 나오면 마음이 좀 괜찮아진다. 나는 슬픈 인간들이 슬퍼서 쓴 슬픈 글을 보며 슬픈 감정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그러자  어느 순간 슬픔이 가셨다. 그러고는 그날을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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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그런 말을 습관처럼 하게 되었다. 누군가 '고맙다, 내가 잊지 않고 꼭 갚을게'라고 하면 나도 모르게 그러는 것이다. '갚지 않아도 되고, 잊어버려도 되는데 그저 사라지지만 마.' 제발 사라지지만 마요. 존재해 줘요. 잘 존재할 필요도 없고 그냥 있기만 하면 됩니다. 무슨 유행가 가사처럼 그러고 있다. 내가.


그냥 존재하기. 있기. 사라지지 않기. 


하지만 이조차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잘 사는 건  둘째치고 사는 것조차 힘든 시절이라니. 그래서 슬픈 마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친구들(소위 'T'인 분들이랄까)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면 한참 이야기를 듣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 툭 건넨다.


그렇지. 근데 뭐, 살아야지. 살 수 있어. 늘 그래 왔듯이.


그 말이 듣고 싶었다. 그렇지. 늘 그래 왔어. 또 살 수 있다. 존재할 수 있고. 우리는 끝까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낼 거다. 좀 덜 아름다워도 되고 대충 막 살아도 되니까, 사라지지만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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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야겠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야겠다. '시간이 되면'이라는 조건 없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겠다.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나도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결심을 어느 순간 또 잊겠지만, 잊으면 좌절하면서도 다시 또 기억하는 수밖에 없지. 기억하고 다시 기억해야지. 이 세상의 모든 풍경들이 다, 너무나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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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무척 추워진다고 한다. 일주일 뒤면 겨울이 온다. 사실 11월이 되면서부터 나는 이미 겨울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나도 모르게 겨울, 겨울 한다. 그사이 달리기는 17분대로 늘었고, 어제까지로 정해 두었던 원고도 일단 마무리했다. 그럼 대체로 무탈한 하루인가? 그렇다. 무탈하다. 감사한 일이다. 


이번 겨울에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보려 한다. 그렇게 12월을 넘으면 다시 슬픔이 와도 다 함께 넘고 넘어 끝까지 존재할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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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저녁으로 뭘 먹지. 매일매일 오늘은 또 뭘 해 먹나가 진짜 고민이다. 역시 그냥 존재하는 것도 쉽지 않다.  


* 최근 카카오브런치에서 저작권 규정 관련하여 공지가 있었다. 고민 끝에 앞으로 유튜브 링크 인용은 하지 않기로 했다. 혹여 저작권 문제에 걸리지 않더라도 그냥 '언급'으로만 두는 것이 좋겠다. 

** 이 글을 쓰면서 들은 음악은 '전진희'의 연주이다. 목소리가 참 아름다운 가수. 온스테이지 유튜브에 가면 <breathing in june, breathing in october>이라는 제목의 멋진 영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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