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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Dec 14. 2023

무엇이 '정'이고 무엇이 '사'인가?

김용의 <의천도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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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소설 <영웅문> 제3부 중원의 별 제4권을 옆에 두고 쓴다.


이 대작에 대해서는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지만, 그래도 몇 자 적어 보자면- <영웅문> 시리즈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제1부는 몽고의 별이자 <사조영웅전>, 제2부는 영웅의 별이자 <신조협려> 그리고 제3부가 바로 중원의 별이자 <의천도룡기>이다. 순서대로 읽으면 가장 좋지만 나는 3부를 제일 먼저 만나는 바람에 거꾸로 읽었다. 하지만 각 편마다 주인공이 달라 순서를 무시하고 읽어도 사실상 무방하다. 게다가 순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재미있어 고교와 대학 시절에 아주 푹 빠져 지냈다. 오죽하면 <영웅문> 중 일부를 필사할 정도였다.


그때에도 다이어리 꾸미기(약칭 '다꾸')가 한창 유행이었는데 친구들이 대체로 아이돌 노래 가사를 적어 놓을 때 나는 <영웅문>에 나온 시를 정성스레 옮겨 적었다. 그러면서 감탄도 무한 반복. 그렇다면 <영웅문>도 시리즈 전부를 소장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현재는 제3부 중원의 별 그러니까 <의천도룡기>만 소장 중이다. 시리즈를 출판했던 고려원이 문을 닫는 바람에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3부는 어찌어찌 헌책방을 돌며 수집했는데 나머지는 책방에서 빌려 보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샀어야지!)


그 후 출판사 고려원은 사라졌지만, 김영사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영웅문> 시리즈가 재출간되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라는 제목 아래 근사한 장정으로 나왔는데, 얼마 전 오빠네 집에 갔다가 이 모든 시리즈가 촤악 전시되어 있어 깜짝 놀랐다. 게다가 <소오강호> 시리즈까지 있어서 크게 반성하고 돌아왔다. 아니, 언제 저 시리즈를 다 모았지? 역시 어린 시절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같이 무협을 본 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나 보다. 뿌듯(?)하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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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도룡기>는 장무기라는 청년이 주인공이다. 큰 줄거리는 '의천검'과 '도룡도'를 갖기 위한(이 둘을 합해 '의천도룡기'가 된 것) 무림 고수들의 한판 승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이면에 자리한 세부적인 사건들을 보면 내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저 검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혈전 이전에 '인간의 인간 됨'이랄까. 혹은 '영웅의 면모'랄까. '사랑과 정의'랄까. 그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의천도룡기>를 보다 보면,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인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무협의 세계에서 정파와 사파의 구별은 중요하다. 이때의 '파'란 말 그대로 하나의 집단을 의미하는데, 무림에는 대체로 정의를 행하고 무질서를 바로잡는 '정파'가 존재하고 그 반대의 의미로 '사파'가 존재한다. 한자도 '간사할 사'를 쓰는 것을 보면 이야기 구조상 주로 어떻게 취급받고 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정파에는 무당파, 아미파, 곤륜파, 화산파, 소림파 등등이 있고, 사파는 소설들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 같다. <의천도룡기>에서는 명교, 천응교(명교의 일파) 등이 사파로 나온다.  


자, 그럼 위에서 언급한 주인공 장무기라는 청년은 정파일까 아니면 사파일까?


흥미롭게도 그는 정파 '무당파'의 일원인 장취산과 사파인 천응교 교주의 딸 은소소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럼 장무기는 어디에 속하는 걸까? 작가가 장무기의 탄생을 이렇게 설정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제4권에서(개인적으로 이 편이 백미라고 생각함) 장무기는 '명교'를 비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6대 정파와 맞선다. 그리고 나중에는 명교의 교주 자리에까지 이른다. 앗! 하고 탄성이 나오는 부분이다. 당연히 정파에서 활동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독자의 추측을 뒤집는 스토리.


또 하나 주목해 볼 것은 정파라고 해서 그닥 올바르게 보이지만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명교 즉 사파라고 해서 정의를 모르거나 인간 됨의 도리를 완전히 묵살하는 행위도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결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상대의 목숨 줄을 쥐고 흔드는 장면들은 존재하나, 이는 정파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나중으로 가면 독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과연 무엇이 '정(正)'이고 무엇이 '사(邪)'란 말인가?


우리가 정통이요, 올바름의 상징이다, 라고 외치는 쪽도 사사롭기로 말하면 그지없고, 반대로 '사'라고 취급되는 쪽도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선을 위해 싸우는 순간이 있다. 그렇다면 정과 사의 구별은 의미가 없는 것인가? 최근 창작되고 있는 많은 작품들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신무협에서는 점점 더 이 구별이 모호해지고, 오히려 정파가 아닌 사파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글들도 많다고 들었다. 이는 시대의 반영 같기도 하다. 선과 악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한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현실. 윤리와 법도만 강조하는 주인공이나 그 틀에 갇혀 마음껏 요동치지 못하는 평면적 인물은 우선 재미가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탈선을 일삼으며 위법의 끝을 달리는 주인공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실제 삶도 그렇다. 윤리와 법도가 다 소용없는 세상이니 대충 마음대로 살다 가자? 이것이야말로 이상하고 위험한 결론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서평에서도 썼지만, 시대가 어렵다고 해서 모두가 히틀러로 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정(正)을 향해 가고자 하는 의지와 마음은 중요하다. 글을 쓰다 보니, 정이든 사이든 일단 그 과정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러한 구별조차 결국 인간들이 만든 것인데, 인간사에 순수한 선과 순수한 악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작은 선했지만 끝이 악한 일들도 많고, 그다지 선한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선행이 된 일들도 존재한다. 요는, 세상사를 늘 깨어 있는 눈으로 면밀히 살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 정인지 사인지, 선인지 악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지켜보고 있을 것. 그게 꼭 무협이 아니더라도, 이 나라와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말이다. (요샌 현실이 무협의 세계보다 더 혼란한 암흑 속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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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장무기에 대해 하나만 더 언급하고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는 '착하고 여린 영웅'의 면모를 보이며 명교 교주로 살아간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전통적인 무협 소설에서 영웅은 보통 강인하고 담대한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인간적인 면모도 드러나지만 대체로 무림의 정의를 수호하고 강호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기개가 있는 모습으로 나오게 마련. 그렇다면, 장무기는 어떨까?


무척이나 우유부단하다.


때문에 독자들 가운데는 이 장무기라는 인간형을 상당히 답답해하는 이들도 여럿 존재한다. 나도 처음에는 '아니, 이 친구는 왜 이리 유약해?'라며 혀를 찼다. 특히 소설에 등장하는 여인들과의 관계에서 유독 취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작품에는 조민, 주지약, 소소, 은리 등 다양한 여인들이 등장해 장무기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랑(?)을 보여 준다. 장무기는 그때마다 이 여인들에게 휘둘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확실히 1부나 2부의 주인공들에 비해 장무기는 상당히 유약한 면이 있다. 마음도 약하고 자주 흔들린다. 그래서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측면도 있다. 작가 김용도 바로 이 부분을 염두에 둔 듯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음을 보여 주려 했다고. 그렇다. 확실히 영웅이라고 해서 모두 다 멋지고 찬란한 것만은 아니다. 어느 순간에는 그래 보일지 몰라도 그 이면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둠도 있고 그림자도 짙을 것.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깊은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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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이다. 책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정과 사의 구별이나 의천검과 도룡도를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아래와 같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아닐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싸우고 있는가'


욕망의 추구? 권력과 지배? 그게 무엇이든 인간이기에 일단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위 질문은 반드시 '그렇게 싸워서 무엇을 취하고자 하는가'와 '그렇게 취한 것을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로 확장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정'과 '사'가 구별되고 날 선 판단이 가능해질 것이다. 시작도 선, 끝도 선이면 좋겠지만 그러기 어려운 세상이라면 어쨌든 결말만이라도 선을 향하기를. 이것이 진부하지만 결코 놓거나 포기할 수 없는 정도이자 왕도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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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전히 공허한 결론이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이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공허한 말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여담으로, 이 <의천도룡기>는 드라마 시리즈로도 매우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나는 1986년판 <의천도룡기>의 특대왕 팬이다. 장무기는 무려 스무 살 약관의 나이였던 '양조위'가 맡아 열연했다. 이후로 연도를 달리해 여러 버전들이 나왔지만 양조위 버전의 아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라고 믿는 중). 글쎄, 가장 최근 나온 2019년판은 아직 보지 못해 모르겠다. 내게는 장무기 하면 양조위가 떠오르니 너무 오래전 이미지를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데 마침 오빠에게서 사진 한 장이 전송되어 왔다. <의천도룡기> 1986 버전 DVD 세트 사진이었다. 아닛! 이건 또 언제 샀대?? 하! 이 정도면 누가 팬인지 모르겠군. 나는 당장 답장을 날렸다. 조만간 보러 가겠음. (생활사 박물관은 이쪽이 차려야겠군) 그동안 너무 소극적으로 무협을 대했다. 내년에는 하나씩 차곡차곡 다시 수집해 봐야지. 음, 이야말로 이상한 결론이다.


비가 내려 잔잔한 밤이다. 오랜만에 <영웅문>과 함께 밤을 지나야겠다.


다음은 이우혁 작가의 <퇴마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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