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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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혁의 <퇴마록>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뭐라고? 지금도? 그렇다. 90년대의 광풍에 비하면 그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후대의 작품들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의 장르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무협과 스릴러, 미스터리와 전설, 권선징악과 휴머니즘.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때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사의 고독과 아픔까지 서늘하게 스며들어 있다. 이 모든 게 고르게 담긴 이 작품을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전술한 내용들은 '퇴마'라는 핵심 키워드와 맞물려 아주 특이하고도 오묘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바로 그게 미치도록 재미있어 독자로 하여금 감탄을 내지르며 몰입하게 만든다. 어디에선가 <퇴마록>을 오컬트 문학의 시초로 명명한 것을 본 것도 같은데, 나는 다 떠나서 그냥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게 보았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들에 휩싸여 한동안 이 책을 곱씹으며 살았다. 왜 그런지 조금 슬펐던 것 같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리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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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흐릿한 기억이지만, 아직 중학생이었던 시절 반 친구 누군가가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을 우연히 얻어들은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뭐? 퇴마록? 제목이 무서운데 혹시 괴담집 같은 거야? 한때 그런 책들이 유행했다. 오싹오싹 공포 이야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동물 이야기 뭐 이런 책들. 가끔 기괴하고 무서운 사진들도 같이 실려 있어 기겁을 하면서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조잡하게 편집된 가짜 사진일 가능성이 컸지만 그때는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세기말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유행했다. 새 천년이라는 무게를 버티는 방법들 중 하나였을까?
친구는 긴 설명 없이 다 읽고 빌려주겠다고 공언했다.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좀 무서운 부분도 있지만 재미있어. '무서운 부분'이라. 그 정도와 깊이가 어느 정도일까. 매운 걸 잘 먹는 사람들이 '하나도 안 매워' 하는 것과 '우리 개는 착하고 순해서 안 물어요' 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하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하면 알 수가 없다. 내가 견딜 수 있는 정도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책도, 영화도, 음식도, 사람도 그 무엇도 말이다.
그렇게 <퇴마록> 국내편을 빌려 왔다. 1권이었는지 2권부터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하다. 둘 중 하나였고 한 권을 읽고 나자 나머지가 궁금해서 결국 모두 빌려 보았다. 책 대여점이 성행하던 때였는데 <퇴마록>이 인기가 많아서 한참 걸려 완독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의 출판사는 '들녘'이었다. 현재는 출판사와 판본 모두 달라졌다. (지금은 문학동네 브랜드 중 하나인 엘릭시르 출판사) 개인적으로 초판 버전의 어두운 분위기와 금장으로 새겨진 제목이 더 마음에 든다.
<퇴마록>은 국내편 세 권을 시작으로 세계편, 혼세편, 말세편으로 이어지고 외전도 나왔다. 현재 집에는 국내편 3권만이 남아 있다. 국내편도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세트로 구해 들여놓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 2001년에 발간된 중쇄본인데, 이전 주인이 책을 아끼며 깔끔하게 보는 사람이었던지 세 권 모두 하트 무늬가 새겨진 투명 커버로 포장되어 있었다. 덕분에 퇴마록이 조금 귀여워(?) 보이는 효과. 나도 굳이 커버를 뜯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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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내용 이야기를 잠시 해 보자면- <퇴마록>은 한 마디로 말하면, 네 사람이 한 팀을 이루어 '마(魔)를 물리치는 일(退)에 대한 기록'이다. 네 사람이란 박신부, 현암, 준후, 승희이다. 이들은 각각 나이도 성별도 숨겨진 사연도 다르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우연히 한자리에 모이게 된 이들은 악을 처단하는 데 힘을 모으기로 의기투합한다. 이렇게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 같다. 악에 맞서는 일단의 무리와 그 대결에 대한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어져 왔으니까. 하지만 <퇴마록>에는 이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과연 무엇일까?
나는 이를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캐릭터' 다른 하나는 '서사' 즉, 사연이다. 뭐야, 너무 뻔하잖아? 그렇다. 이 두 가지는 이야기를 힘 있게 끌고 가는 가장 고전적인 요소이다. 하지만 <퇴마록>은 이를 '정말로 잘' 살렸다.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짜임새 있는 서사와 맞물리고, 여기에 캐릭터의 독보적 사연들이 결합되면서 수많은 마니아들을 양산해 냈다. 세기말로 치닫는 시대도 한몫했겠지만 스토리가 힘이 없으면 시대가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퇴마록>에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철학'이다. 작가는 <퇴마록> 곳곳에 '선(善)과 선의(善意)' 즉 선한 의지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았다. 이는 인물의 말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악인을 통해 역설적으로 강조되기도 한다. 그 방식이 세련되어서 마음에 든다. 대놓고 교훈적으로 읽히면 촌스러울 텐데 그렇지가 않다. 가령, 국내편 1권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중 제일 첫 번째 이야기 <하늘이 불타던 날>에 나오는 장호법의 말에서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장호법은 박신부와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한다. 너무 자세한 설명은 스포가 될 수 있으므로 그 부분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미래를 읽는 따위의 방법이 아니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구요?"
"그건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 덕을 쌓고 도를 쌓고 자비심을 갖고 남을 가련히 여기는 등등, 선한 마음을 갖고 용기를 가지는 것만이 작지만 가장 큰 힘을 갖는 겁니다. 그 커다란 운명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퇴마록> 국내편 제1권, 34p
또 다른 대목에서는 현암이, 자신의 힘을 선(善)을 위해 쓰고자 재차 다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박신부는 물론이고 현암, 준후, 승희가 퇴마행에 나서는 이유가 명확해진다. 작가가 주인공들을 어디로 인도할지, 어떤 사건들 앞에 이들을 놓아 둘지가 보이는 장면 중 하나이다. 닳고 닳은 주제인 권선징악. 그러나 현실의 세계에서 정말로 선이 승리하는가? 악은 그만한 죗값을 치르는가? 당당하게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실제로 '선의'가 무력하게 스러져 가는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한 개인이나 사회를 탓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이제는 무엇인 선이고 악인지, 선의이고 악의인지를 판단하기조차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다시 '선의'이다. 여전히 선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고, 선한 의지는 선한 행동과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퇴마록>의 편편들은 복잡한 사건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해관계를 스피디하게 풀어내며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애틋하게 여기고 선한 방향으로 힘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를 <퇴마록>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본디 철학의 어원은 '지혜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것. 그리하여 내게 주어진 것들을 타인을 위해 쓸 줄도 알게 되는 것. 결국 나만을 위해 살지 않는 것.
문득 <어머니의 자장가> 편이 떠오른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현암이 퇴마 후 조용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리는 장면이다.
현암은 눈을 감으며 염했다.
'평안하시기를...... 내내 평안하시기를......'
<퇴마록> 국내편 제1권, 10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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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캐릭터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마무리하려 한다. 이들은 모두 어딘가 결함이 있고 결핍이 있는 존재이다. 박신부는 파문당했고 현암은 기공이 막혀 오른팔에만 힘이 몰려 있다. 준후는 밀교에서 은밀하게 자라 여러 술법에 능통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라 심력도, 체력도 기복이 있을 때가 많다. 승희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 여자다. 때문에 강하지만, 강하지만은 않다. 이게 핵심이다.
사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만큼 유약하고 비리비리한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생물학 잘 모름 주의) 태어나서 수년간은 누군가의 절대적인 보호와 조력이 없으면 생존하기 어렵고, 다 자라기까지의 시간도 어마어마하게 소요된다. 물리적인 건강은 둘째 치고, 사람의 마음이란 건 또 얼마나 알 수 없이 위태롭고 이상한가. 가장 강력한 동시에 가장 유약한 것. 그게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앞서 살펴보았듯 작가는 <퇴마록>의 장을 여는 첫 번째 이야기 <하늘이 불타던 날>에서 사람의 마음에 대해 언급하며 바로 이를 명확히 짚었다.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지녔지만 <퇴마록>의 주인공들도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통받는다. 박신부의 경우 자신이 지키지 못한 존재 '미라'라는 아이 때문에, 현암은 동생 '현아' 때문에 준후도, 승희도 자신을 괴롭히는 사연들로 결정적인 순간에 혼란에 빠지고 괴로워한다. 주인공들의 결핍은 이러한 고통의 발단이고 전개이자 위기, 절정이다. 그 과정에서 독자는(나 포함, 필시 퇴마력(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일반인이 대부분일) 주인공들의 경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며 그 인간적인 면모에 동요하게 된다.
독자인 '나 자신'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모두 결핍과 결함이 있는 존재이기에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불완전하기에 인간이다. 결핍과 결함이 있는 존재들이 같은 인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다. 신이나 영웅이어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지닌 힘이 선한 방향으로 쓰이기를 바라고, 그렇게 살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크게 남거나 기억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면 즉시 이들은 떠난다. 뇌리에서 잊히고 사라진다. 생각해 보면 일상의 영웅들은 늘 그랬다. 이름 없이, 표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져 갔다. 우리들은 또 잊겠지만, 선한 방향으로 힘을 쓰기로 선택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어떻게든 존속하고 돌아갈 것이다. 이들에 크게 빚지고 있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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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고 눈도 내리는 이상한 하루였다. 아침에는 봄이었다가 오후에는 가을이 되더니 저녁에는 다시 겨울이었다. 밤늦게 질펀한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주문처럼 외었다.
선한 방향으로, 그럼에도 다시 선한 방향으로.
선, 정의, 사랑, 신뢰와 같은 말들이 여전히 유효함을 믿고 싶다. 이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강하지만 강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에게서 혹은 약하지만 약하지만은 않은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을까. 결국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용기를 내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길 위에서 평안하기를. 현암이 그랬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