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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27. 2024

노플랜주의자의 무작정 시즈오카 (1)

2024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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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평안한 하루 보내셨는지요. 저는 그제 밤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비행기였는데 비행기가 지연되는 바람에 자정이 넘어서 집으로 들어왔네요. 집 온도가 15도더라구요. 보일러를 틀고 목말라하는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집한테 '잘 있었어? 나 오니까 좋지? 그치?' 하고 쓸데없이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시즈오카에 있을 때 한 편 정도 더 쓰려고 했는데 결국 귀국 후 여행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지막 날 밤에 야심 차게 (1)편을 시작은 했었는데요. 다 못 끝내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척, 쓰던 이야기를 이어서 쓰고 (1)편은 마무리해 보려 합니다.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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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시즈오카입니다. 한국은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곳도 어제부터 갑자기 바람이 쌀쌀하게 불더니 부쩍 추워졌습니다. 어제 현지인들이 주로 온다는 가게에서 밥을 먹는데 오가는 사람들마다 '날씨가 추워졌네요.' 하며 어깨를 수그리고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추워요, 추워.' 하며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요. 저는 그런 일상의 모습을 보는 게 좋더라구요.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보내면 좋을 텐데 익숙해지면 또 잊게 되겠지요?


시즈오카 여행기를, 어디에서부터 시작해 볼까요?


제가 하는 여행이나 벌이는 일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번에도 시작은 아주 사소했는데요. 갑자기 꽂힌 한 장의 사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해서 자주 즐겁게 보고 있는 여행 블로거 님의 시즈오카 여행기를 읽다가 녹차 아이스크림 사진에 완전히 꽂혀 버린 것이지요.


사실 저는 한때 '그린 티 걸'이라는 ID를 썼을 만큼 녹차를 좋아합니다. 그린 티 걸이라니! 참 놀라운 ID가 아닐 수 없습니다. ID가 왜 이따구인가 하면요. 때는 바야흐로 1999년 세기말. 메일 주소를 처음 만들었을 때 저는 고작 중3이었죠. 그때는 이렇게 오랫동안 쓰게 될 줄 모르고 뭐,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었습니다. 녹차 좋아하니까 녹차 소녀다!!! 참 단순하고 철이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소녀일 줄 알고.


아무튼 제가 꽂힌 녹차 아이스크림의 정체는 바로 시즈오카의 '나나야'라는 곳에서 판매 중인 제품으로 녹차의 진하기에 따라 1단계에서부터 7단계까지 있다고 합니다. 시즈오카에 도착한 이튿날 다녀왔습니다. 일단 사진 한번 보시지요. 녹차 7단계(가장 진한 맛)와 호지차 맛입니다.


시즈오카 <나나야>_녹차 7단계와 호지차 아이스크림


색깔이 무척 초록초록합니다. 녹차 마니아로서 꾸덕한 녹차 맛이 아주 좋았습니다. 가장 마지막 단계라고는 해도 막 쓰거나 그렇지는 않았구요. 맛나게 잘 먹었습니다. 호지차는 제 입에는 조금 달았는데 녹차와의 조화가 괜찮았습니다. 한 가지 맛과 두 가지 맛 가격에 큰 차이가 없어서 두 가지 맛으로 골랐습니다. 대부분 두 가지 맛으로 드시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이날 커피와 녹차 7단계, 녹차 라떼, 냉녹차의 카페인 컬래버레이션 덕분에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새벽 4시에 잠들게 됩니다. 미쳤습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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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떠나왔다고 말씀드리기는 했지만 사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해 보자!'라는 나름의 고민은 있었습니다. 일생 동안 생각해도 결론이 안 난 주제이기는 하지만 혹시 또 모르니까요! 그랬더니 친구 R이 귀중한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어차피 결론은 안 나고 결정도 안 될 테니까 그냥 재미있게 놀다 와. 저는 그럴 리가 없다는 듯 크게 대답했습니다. 응!!!  


네, 사실 불합격 통보를 받고 약간 충동적으로 표를 끊은 것도 있습니다. 2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이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의 '사립학교 교사 임용 도전기'를 참고해 주세용. (1)편부터 보시면 재미와 감동(?), 교훈(?!)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artistzen/193


시즈오카행을 결정한 건 홍콩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지요. 노트북 바꾸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털었습니다. 2014년도 모델이라 10주년 기념으로 바꾸려고 했는데요. 그냥 안 켜질 때까지 쓰죠, 뭐. 다행히 아직은 쓸 만합니다. 엄마한테는 출발 당일에 말씀드렸습니다. 타이밍을 계속 놓쳐서요. 그냥 가서 말씀드릴까 하다가 전화가 안 되면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무려 당일 아침에 짐을 싸며 통보를...... 오늘 일요일인데 뭐 하니? 하셔서 아, 사실 저 그... 시즈오카에 가요. 그러자 엄마는 정확히 '므엥??'이라고 하셨습니다.


므엥?? 어디?

어, 시즈오카라고... 일본 도쿄 근처의 소도시예요. (사실 저도 처음이라 잘 몰라용)

어디 근처?

도쿄요.

교토?

도쿄요, 도쿄!

허이구 참!

하하,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대화가 잘 끝난 것처럼 보였으나! 탑승구 앞에서 마지막으로 전화드렸더니 안 받으시더라구요. 문자로 '저 공항이에용. 잘 다녀오겠습니다.' 했더니 전화가 왔습니다. 너 내일 간다며! 네? 오늘인데요? 오늘이야?? 바깥에 계신지 시끌시끌한 사운드와 함께 나 참! 잘 갔다 와! 하셨습니다. 진심 어린 응원... 늘 감사합니다.  

2024. 1. 21_탑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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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오카에서의 첫날은 크게 기억에 남은 게 없습니다. 오후 4시 비행기라 저녁 6시가 다 되어 공항에 내렸거든요. 작고 귀여운 공항에서 따뜻한 홍차를 하나 사서 쥐고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오, 진짜 와 버렸군! 처음 와 보는 낯선 도시의 저녁 풍경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고 있으려니 별로 현실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시즈오카 공항에 내리면 저녁 7시 정도에 시즈오카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더라구요. 공항으로 나가서 바로 보이는 3번 정류장에서 기다리면 버스가 옵니다. 저 같은 특대왕 길치도 찾을 수 있는 곳이니 걱정 마시고 요금만 잘 준비하시면 됩니다. 요금은 시즈오카 역 앞까지 갔을 때(거의 종점) 1,100엔이고 2,000엔 내도 거슬러 주는 것 같은데 이왕이면 맞춰 내려고 공항 편의점에서 홍차 하나 사서 동전을 만들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동전이 많이 쓰이지요. 저는 도착한 즉시부터 동전 1톤을 들고 다니는 처자가 됩니다. 계산 시, 동전을 맞추어 내도 충분히 기다려 주시는데 혼자 못 견뎌서 조급증에 늘 지폐를 내고 말거든요.


숙소는 시즈오카 역 바로 앞에 딱 붙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공항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전면에 보입니다. 저 같은 길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위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무척 만족했구요. 싱글룸 기준으로 가성비도 아주 훌륭했습니다. 이번에는 침대를 헝클어뜨리기 전에 사진부터 찍어 보았습니다. 오, 어쩐 일로? 약간 발전한 기분이 듭니다. 캐리어도 무사히 잘 열었습니다. (홍콩 여행기 (1)편 참조)


갇혀서 글을 쓰기에 딱 좋습니다. (칭찬이에요)


책상을 보자마자 '오호!' 하고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누가 밥만 제때 넣어주면 장편 소설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허세) 실제로 시즈오카에서 쓴 두 편의 글 모두 이 책상에서 바깥을 내다보며 썼습니다. 나름 운치가 있더라구요. 심심해서 TV도 켜 보았습니다.


TV_왠지 귀여운 설명


제가 결정을 무릅쓰러 온 걸 또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상세히 설명을... 감사합니다. 여행의 막바지 즈음에는 아무 결론이 안 나도 일단 무엇이든, 어떻게든 결정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행 첫날밤을 보냈습니다. 약간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내일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걱정 반 기대 반을 안고 잠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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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아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고 그런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정처 없다'라는 말만큼 고단하고 애달픈 느낌을 주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간 이에 대해 깊이 숙고해 본 적이 없었는데, 요즈음 제 마음이 조금 그랬던 것 같아요. 사실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는 누구나 정처가 없는 법인데 말이지요. 정해졌다 하더라도 결국은 잠시일 뿐이지요.


이번 시즈오카에서도 그랬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바깥을 한 번 내다보고 날씨를 가늠한 뒤 오늘은 어디를 가 볼까, 어디에서 무엇을 할까 그때그때 결정했고 발길이 닿으면 잠시 머물다가 떠났습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수첩에 끼적이고 사람들 구경도 하고요. 카페에서 누군가 연주하는 비틀즈의 <Yesterday>를 들으며 턱을 괸 채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하늘이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좋더라구요.


그런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다음 편부터 본격적인 시즈오카 여행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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