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Jan 29. 2024

노플랜주의자의 무작정 시즈오카 (2)

2024년 1월 22일

-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웬 법률사무소에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가입해 있던 한 사이트가 해킹당해 정보가 꽤 털렸거든요. 보이스 피싱인가 하고 전화번호를 조회해 보니 정말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뭐지? 왜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다가 그냥 잘못 걸린 전화겠거니 하고 두었는데 역시나 지금까지 무소식입니다.


초연결 사회는 문득문득 굉장한 피로감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즈오카 두 번째 날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

두 번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즈오카라는 도시를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일어나서 바깥 풍경부터 보았는데요. 날은 흐리고 차도 사람도 어디로들 가는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다가 첫날 같은 두 번째 날인 만큼 도시를 걸어봐야겠다 마음먹고 방을 나왔습니다. 시즈오카 시내는 도보로 걸어 다니기에 딱 좋은 아담한 규모입니다. 보통 후지산을 보러 많이 오고 온천을 하려면 차를 가지고 교외로 나가야 한다는데 저처럼 그냥 시내 중심으로 보시려면 도보로도 충분한 것 같습니다.


첫 행선지는 슨푸성이었습니다. 숙소에서 슨푸성까지 도보로 15분 정도 걸렸고, 중간중간 도로가 많아서 길을 건널 때 조금 애를 먹긴 했습니다만 금세 닿을 수 있었습니다. 날은 흐려도 바람이 없고 대기가 잔잔해서 걷기에 좋았습니다. 느리게 슬렁슬렁 걸으니 모두가 제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도 좋더라구요.

슨푸성 가는 길
시즈오카를 걷다가 만난 풍경들

아무래도 길을 걷다가 바오밥나무를 발견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즈오카에서도 커다란 나무를 발견해 찍어 보았구요. 그 위 사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래 머물렀다는 '슨푸성'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몰랐는데, <마루코는 아홉 살> 만화의 배경이 바로 이 시즈오카라고 하네요. 2023년이 시즈오카 시의 하수도 사업 100주년이었나 봅니다. 곳곳에 다양한 이미지의 맨홀 뚜껑이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이 하나밖에 보지 못했어요. 주로 하늘을 보면서 걷는 타입이라.  


슨푸성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습니다. 공원처럼 빙글 돌아보기에 좋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서점에 가 보니 이와 관련된 드라마가 있었는지 홍보를 크게 하고 있더라구요. 고등학교 때 저는 선택 과목으로 <정치>와 <세계사>를 택해 공부했었는데요. 세계사가 좋아서 시작했는데(정치와 세계사가 하나, 사회문화와 세계지리가 또 하나로 묶여 있어서 한 과목을 선택하면 나머지 과목도 세트로 공부해야 했습니다) 공부하다 보니 정치가 더 재미있고 성적도 괜찮게 나와서 나중에는 정치 중심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래도 세계사 시간에 열중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견제로 인해 조용히 은거하며 힘을 길렀다고 들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이나 아니나 상관없이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런 것 같습니다. 견제하고 견제당하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그런 마음들만큼 사랑과 존경, 의리와 우정 이런 것들도 존재하는 거겠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동상 앞에 우두커니 서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떠났습니다.


-

그리고 슨푸성을 떠나 시즈오카 현청 전망대에 왔습니다. 이곳에 올라가면 시즈오카 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고 해서였는데요. 슨푸성에서 약 5분 정도 걸으면 바로 현청 건물이 나옵니다. 별관 21층이고 무료예요. 수줍음(?)이 많은지라 현청 건물에 들어서는 것부터가 조금 어려웠는데요. 여행자는 뭐 그런 거 없어야죠. 대뜸 들어갔더니 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안내하시는 분이 친절하게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대충 무슨 일로 왔느냐는 것 같아서 '뷰!!!!'를 외쳤습니다. 사실 '생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요. 오랜만에 가니 없었습니다...... 역시 언어란 시도 때도 없이 계속해야 늘지(아니, 적어도 줄지는 않지) 안 그러면 0을 넘어 마이너스로 가더라구요.


뷰?!

어...... (어떡하지??)


파파고도 있는데 당황하니까 생각도 안 나고 뷰뷰 거리다가 결국 두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두 눈에 갖다 댔습니다...... 뭐, 급할 땐 역시 보디랭귀지 아니겠습니까? (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그랬더니 안내원분께서 아하! 투애니 원! 하셔서 문득 산다라 박 님은 잘 계신가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찍은 게 아래의 사진입니다. 구름이 많지만 하늘빛은 괜찮죠? 옆 사진은 감동받아서 찍었습니다. <시즈오카현 기능 마이스터 인정자> 명단인데요. 아래에 사진도 있더라구요. 각 부문별로 현이 인정하는 장인들의 분야와 이름, 사진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보다가 뭔가 뭉클해져서요. 보면, 분야가 참 다양합니다. 목공예도 있고 중화요리도 있고 미용도 있고요. 얼마만큼이나 한 길을 오롯이 노력하며 걸어야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걸까요. '마이스터'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현청에 가시면 한 번쯤 보고 오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게시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도, 지금부터 30년 정도 주욱 그렇게 한 길을 걸어가서 '마이스터'까지는 아니지만 일단의 경지에 올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그러려면 그게 무엇이든 지금부터 시작해야겠네요.

시즈오카 현청 21층 전망대

날이 좋으면 현청 전망대에서 후지산도 볼 수 있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역시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후지산을 보면 만족하고 가려 했는데, 못 보았으니 다음 날은 후지산에 좀 더 가까이 가 볼까 어쩔까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

그러고는 서점에 들렀습니다!!!


현청에서 또 10분 정도 걸어가면 <츠타야 서점>이 나오더라구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엄청 설레는 마음을 안고 초고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지도를 잘못 봐서 좀 헤매다 가기는 했지만요. 시즈오카의 번화가라는 고후쿠쵸 거리에 있고, 바로 옆에 스타벅스가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사진부터 보시죠.

와, 서점이다!

연초라 그런지 점성술과 같은 운세 관련 책들이 한 코너에 집중적으로 나와 있었고 밸런타인데이 관련 물품들도 많았습니다. 서점이기는 하지만 문구류도 많고 이모저모 구경할 게 많더라구요. 살짝만 둘러보고 나간다는 것이,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주구장창 돌아다니며 꽤 오래 머물렀습니다. 표지만 봐도 즐겁더라구요. 애니메이션 강국답게 만화와 애니 관련 책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흥행한 책이나 이야기들이 꽤 많이들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가 결정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띠지에 '영화화 결정!', '드라마화!' 이렇게 크게 홍보되더라구요. 하나의 스토리가 여러 채널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왠지 일본은 그 빈도가 더 높다는 느낌? 그러고 보니 양국이 서로 리메이크를 해 릴리스 된 작품들도 꽤 많이 눈에 띄고요. 어느 쪽이든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탄생해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신호 같습니다.


그러다가 몇 가지 책들은 집어서 유심히 보기도 했습니다. 수험 서적과 교과서 코너에 가니 눈에 띄는 게 있었는데요. 책들이 참 예쁘더라구요. 그냥 보면 문제집이나 수험서, 교과서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여러 책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인생의 목적......

한국어 책들도 찍어 보았구요. 그중에 <인생의 목적>이라는 어마어마한 제하의 책을 발견하고 경건하게 담아 보았습니다. 노화, 병, 죽음을 넘어서는 행복이라. 그러게 말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보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하나의 사실 즉, '필멸성'을 향해 가는 여정이지요. 필멸의 존재에게 노화나 병, 죽음은 당연하게 거쳐야 할 운명과도 같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삶은 저마다 다른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겠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을 위시한 자본만큼 한 개인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것도 없겠습니다만, 그것만이 전부라면 이 삶은 얼마나 허무하고 공허할까요. 물론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론에서처럼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먼저 충족되어야 그다음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다른 차원, 더 높은 차원의 욕구도 함께 이야기되어야 하겠습니다. 돈을 벌고 나면, 그다음은요? 그리고 그다음은?


오늘 신문 기사에서 마크 맨슨이 한국을 '가장 우울한 사회'로 진단했다는 글을 보았는데요. 상당 부분 공감했습니다. 미국과는 또 다른 역사적 경험 때문에 불가피하게 여기까지 온 것도 있기는 하지만요. 그래서 이 같은 논의와 진단들에 지금부터라도 귀를 기울여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남들보다 더 멋지게! 더 훌륭하게! 더 많이! 를 외치기 전에 과연 우리 같은 '필멸의 존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을 고민해 보는 것이지요.


이를테면, 철학입니다.


철학이 부재한 사회는 그냥 '필멸'이 아니라 '파멸'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개인은 철학이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지만 사회는 다르지요. 개인의 방향은 조금 잘못되어도 어느 정도 수정이 가능하지만 사회는 다릅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

저도 부족한 주제에 그냥 이런저런 말들을 끼적여 보았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서점을 보고 나와서 스타벅스에서 녹차라떼도 한 잔 했습니다. 녹차 카페인의 컬래버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던 녹차 전문점 <나나야>를 홀린 듯이 찾아갔구요. 녹차 7단계 아이스크림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저는 녹차 러버라서요. 이와 관련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에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조해 주세용!


https://brunch.co.kr/@artistzen/195


-

저녁은 <이치란 라멘>이었습니다. 예전에 엄마와 둘이 후쿠오카에 간 적이 있는데요. 그때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나서 다녀왔습니다. 모든 좌석이 1인석으로 마치 독서실처럼 되어 있어서 칸막이를 옆에 두고 '맛있으세요??'를 외치며 먹었던 생각이 나네요. 24시간 영업이고 문 앞에서 티켓 발매기를 통해 음식을 미리 결정하고 들어가 티켓을 내면 음식이 나오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세트 메뉴 같은 것도 있는데 저는 그냥 기본 라멘에 달걀 1개와 생맥주 하나를 추가해서 먹었습니다. 맥주가 빠질 수 없죠. 사진이 부담스럽게 크지만 올려 보겠습니다. 라멘의 맛과 토핑 양을 조절할 수 있는 체크 용지가 있는데 한국어도 있어서 어려움 없이 작성할 수 있습니다. 티켓과 함께 용지를 내면 그에 맞는 라멘이 딱! 나옵니다.


저는 모두 기본으로 했고 다만 양념이라고 하나요. 라멘에 올라가는 빨간 양념은 1~10 중 5로 했습니다. 그런데 성에 차지 않아서 다다음 날 한 번 더 먹었을 땐 7로 했습니다. 칼칼하니 좋더라구요. 매운 걸 잘 먹고 좋아하는 편이라서요. 아! 마늘도 1쪽 추가로 했습니다.(한 개까지는 무료였던 것 같아요)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마늘도 한 서너 개 추가했으면 싶었습니다만. (역시나 마늘의 민족)  


얼큰하게 잘 먹고 시원한 맥주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어둑해진 거리를 걸으며 여러 상점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습니다. 이만하면 하루를 잘 보냈다 싶기도 하구요.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우유 푸딩과 소소하게 젤리 사 가지고 밤에 TV 보면서 먹었습니다.


예전에는 여행을 오면 막 많이 보고 하나라도 더 구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좀 있었습니다. 안 그러면 왠지 시간을 날린 것 같고 아깝고 그랬거든요. 뭐, 그때도 엄청 계획적이지는 않아서 남들에 비하면 슬렁슬렁한 플랜이기는 했지만 마음만은 조급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촌 언니의 조언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런 마음의 고삐를 조금 늦추게 되었는데요.


여행을 다시는 못 올 것처럼 다니지 마.

다시 또 올 거라는 마음으로 좀 천천히 봐도 돼.   


정말 멋진 조언이지요. 무엇이든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이 아니면 안 돼, 꼭 해야만 해, 마지막이야 이런 마음가짐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고 절실함이 때로는 큰 성취를 내도록 돕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랬어요. 뭔가 잘하고 싶고 꼭 해내고 싶으면 그만큼 긴장이 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그러다 결국 잘 안되고 망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


-

두 번째 날은 이게 끝입니다. 슨푸성에 초록 모자를 쓴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라 놀러 나왔더라고요. 귀여운 목소리로 서로를 부르며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데 평화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평화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마음이지 않겠습니까.


내면의 평화는 그 누구도 줄 수가 없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그 누구도 침범하거나 흩어버릴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걸 지켜 가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는 저녁입니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생각이 많을 땐 뭐다? 운동이다!


운동 다녀오겠습니다. 오늘 저녁도 평안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노플랜주의자의 무작정 시즈오카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