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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20. 2024

스무 살의 내가 이십 년 후의 나에게

<공각기동대> 영화에세이

(*결말에 대한 스포 있음)


<공각기동대>는 복잡한 퍼즐과 같다. 조각들을 꿰어 맞추는 퍼즐처럼, 마지막 한 조각이 들어찰 때까지 뚜렷한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공각기동대>를 감상하는 관객들은 상영 시간 내내 내용의 난해함에 몸을 비튼다. 무엇이 <공각기동대>를 이토록 복잡하고, 난해하게 만드는가. 이는 <공각기동대>가 다분히 ‘보여주는 영화’라는 데서 해답을 구할 수 있다. 실제로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는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들에게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개연성을 부과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다만 무수히 많은 영상들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이를테면 무수히 많은 퍼즐 조각들을 하나씩 하나씩 던져주는 격이랄까? 감독은 이렇게 관객들의 사고(思考)를 자극하고, 상상력이 물꼬를 틀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다. 던져진 퍼즐 조각을 맞추는 것, 다시 말하면 스치듯 흘러가는 영화를 보고 이해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난해한 작품에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가장 먼저 등장인물들과 그 특성을 살피자면 이렇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등장인물이 둘 나온다. 쿠사나기와 인형사가 바로 그들이다. 쿠사나기는 <공각기동대>에서 부드러운 곡선미의 형체와 미끈하고 풍만한 가슴을 지닌 여성으로 표현된다. 특히 그녀가 지닌 생생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관객들의 가슴에 한 줄기 따스한 인간애마저 불러일으킨다. 같은 인간으로서 일종의 동질감이랄까. 그러나 불행히도 그 동질감은 얼마 안 가 깨지게 된다. 쿠사나기를 비롯한 일련의 등장인물들이 실은 기계이고, 그들의 몸이 쇳소리가 나는 철 조각으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관객들은 상당히 미묘한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피부를 덮고,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게다가 비록 만들어졌을망정 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쇳소리와 냉랭함으로 가득 찬 철제 기계이다. 뜨거운 피도 흐르지 않고, 심장 또한 뛰지 않는다. 말하자면, 보는 이의 가슴에 인간애와 동질감을 불러일으킨 외양은 파괴되면 그만인 한낱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이쯤에서 부제인 ‘Ghost in the shell'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껍데기 속의 혼 혹은 영혼'쯤으로 해석하고 그냥 넘기기엔 무언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이는 사실 위에서 짚어 본 쿠사나기로 대표되는 현대의 인간상(人間像)을 명확히 투영시킨 부제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겉껍데기는 말도 하고, 말랑한 피부도 가진 사람이로되 그 안은 차가운 기계에 의해 조종당하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 삶을 표현한 것이다.


누구나 인간에겐 자유와 자유의지가 있다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빠르게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자유와 자유의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고, 그러자면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좋아서 하는 일보다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펼쳐져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버트, 나카무라, 이시가와와 현대인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부제 'Ghost in the shell'은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쿠사나기를 비롯한 등장인물 자체를 말하기보단, 겉껍데기 속 자유의지가 부족한 영혼을 지닌 현대의 인간 군상을 표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형사는 어떠한가. 본디 이용 수단으로 생성되었던 ‘인형사’는 어느 순간엔가 스스로 자의식을 형성하여 처치 곤란이 되어버린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 자의식을 형성하였다? 말도 안 된다며 웃어 넘기기엔 섬뜩한 측면마저 있다. 굳이 프랑켄슈타인의 예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쉽게 ‘인간의 기술 지배 현상’을 떠올릴 수 있다. 나아가 인간이 창출해 낸 프로그램에 휘둘려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공각기동대> 속 인형사의 모습 또한 바로 현대의 인간 군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공각기동대>는 단순히 현대사회의 단면을 그려내고, 인간 군상의 모습에 주목한 미래 지향적 영화인가? 이쯤에서 분석이 끝난다면 무언가 아쉬울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쿠사나기와 인형사를 통해 그래도 무언가 길이 있음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 길을 찾기 위해 우선 쿠사나기가 절대 고독과 혼란, 방황의 심리를 겪는 장면을 주목해 보자. 이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진보를 원하고, 무언가를 갈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쿠사나기의 잠수 신(scene)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쿠사나기는 몸이 망가질 위험마저 무릅쓴 채 바닷물에 잠수하길 즐긴다. 흔들리는 선상에서 버트와 나누는 그녀의 대화는 술에 취한 듯 몽롱하기까지 하다. 바닷물 깊이 잠수하였다가 물과 뭍의 경계에 이르고, 다시 뭍으로 나오는 과정까지 그녀는 자신이 새로 태어나길 바란다며 고독한 웃음을 머금는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위에서도 언급했듯, 바로 인간이 스스로 나아지고, 새로이 탈바꿈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속한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을 향해 전진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때로는 쿠사나기가 바닷물에 들어가는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미래를 향해 내달린다. 그 결과 <공각기동대>에서 나온 대사처럼 ‘가능성만 있다면 무엇이든 기술로서 현실화하려는’ 현재의 모습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쿠사나기의 고독한 모습과 혼돈 그리고 방황에서, 종내 자신의 틀에 갇혀 살아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찾게 된다.


그렇다면, <공각기동대>가 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던 길은 무엇인가.


쿠사나기와 인형사가 결합하는 결말을 보자. 결말에서 쿠사나기와 인형사가 결합함으로써 생성되는 제3의 그녀를 통해 꽤 혼란이 많았을 줄로 안다. 저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이렇게 생각해 본다. 영화에서 쿠사나기는 인형사에게, 인형사와 결합하는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둘이 결합함으로써 생성된 제3의 인물이 전혀 새롭다는 것에 주목하면 그 둘은 서로에게 분명히 이득이 되었다. 인형사는 쿠사나기에게 자유를, 그리고 쿠사나기는 인형사에게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의체를 내어준 것이다. 이는 버트에게 제3의 인물인 그녀가 ‘나는 소령도 아니고 인형사도 아니다’라고 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만약 쿠사나기 그대로였다면, 그녀는 제9과에 소속된 기동대의 일원으로서 그녀가 그토록 원한 자유를 얻지 못한 채 늘 새로운 탄생을 염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인형사는 인형사대로 자신이 안착할 수 있는 의체를 찾아 위험 속에서 떠돌아야 했을 것이다. 그 둘의 결합은 즉 - 상호 간에 이득이 되는 한편, 새로운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공각기동대>의 결말 구실을 톡톡히 한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어디로 갈까.’라고 중얼대는 제3의 그녀에게서 우리는 전혀 다른 새로움과 자유를 엿볼 수 있다.


전혀 다른 새로움과 자유, 바로 이것이 바로 <공각기동대>가 제시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선, 더 이상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지 않아야 함과 현대 사회는 물론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탄생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금의 쿠사나기도 조금의 인형사도 남아 있지 않고 전혀 새로운 인물이 탄생했듯이 전면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공각기동대>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큰 변화를 원한다면 기존의 나를 버릴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텅 빈 공간에 전혀 새로운 나 자신을 수립하고, 외쳐 보자. ‘자, 오늘은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라고. <끝>


<여담>

스무 살이었던 2003년 가을에 쓴 글이다.


대학 1학년 국어작문 시간에 '분석적 글쓰기' 과제로 제출했던 기억. 당시 담당 교수님은 하재연 시인이었다. 장르별로 다양한 글을 써서 제출했는데, 이 글도 그중 하나였다. 생각지도 못한 주제의 과제들이 많아서 가끔 고통도 받았지만(?) 그만큼 흥미로웠고 즐거웠다. 특히 이 과제를 통해 <공각기동대>를 처음 접했는데 평소 취향과는 사뭇 다른 내용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보고 또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공각기동대>가 무슨 내용이었는지조차도 희미하다. 그래서일까. 내가 썼지만 이게 대체 뭔 말인가 싶은 부분들도 꽤 된다.


특히 마지막의 '외쳐 보자'는 대체 무엇?! (미쳤나?) 읽으며 두 눈을 의심했다. '기술 지배, 기계 종속'은 또 왜 이렇게 좋아함? 생각해 보니 세기말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고, 대학 논술고사와 면접을 준비하며 자주 입에 올렸던 단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아직 십 대의 기운이 남아 있었던 패기 넘치는 글, 정도로 정리해 두자. 거슬리는 부분들도 원문 그대로 두었다. (예: '그렇다면' 이 말 없이는 문단을 시작할 줄 모릅...)


그래도 마지막 몇 줄은 스무 살의 내가 이십 년 후의 나에게 해 주는 말 같아서 몇 번 다시 읽어 보았다. 이제는 '기존의 나'를 버리지 않아도, 그렇게까지 비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쪽으로 변화해 갈 수 있음을 알지만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외치고 싶지는 않아! 그냥 마음속으로 나 자신한테만 들려주는 정도로 만족하겠습... 그나저나 오늘은 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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