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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22. 2024

계절의 사이에서

누가 만든 눈사람인지 궁금할 때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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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한창 꿈속을 헤매고 있는데 난데없이 전화가 울렸다. 헉! 이 시간에 누구지? 실눈을 뜨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친구 R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할 친구가 아닌데? 순식간에 덮쳐 오는 걱정, 불안, 염려. 벌떡 일어나 앉아서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일어났니? 뭐 해?


R의 목소리는 쨍하게 빛나는 해처럼 밝았다. 오, 일단 안심.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버어어얼써 일어나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아아아, 진작에 일어났지! (대략 17초 전에) R은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태주야, 눈이 정말 예쁘게 내렸어. 얼른 나가서 봐봐.


눈? 맞다, 눈! 어제 폭설을 주의하라는 메시지가 계속 뜨던데 정말 많이 왔나? 커튼을 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이 온통 눈이었다. 와, 눈이다! 눈! R은 차에 쌓인 눈을 치우느라 삼십 분도 더 걸렸노라며 밝게 웃었다. 아니, 눈이 쌓이면 차 막히고 힘들지 않아? 내 말에 R이 답했다. 힘들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예쁘잖아. 나는 전화인 걸 잊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R의 장점이다. 예술을 하면서도, 분명하고 정확한 사고형 인간인 R은 늘 명료한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그래, 눈이 와서 힘들지만 어쩔 수 없지. 어떤 생각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눈이 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좋은 쪽을 보아야지. 전화를 끊고 얼른 밖으로 나가 눈 내린 풍경을 사진에 담았다. 자연을 좋아하는 민이에게 보내 줄 차례.


민! 오늘 눈이 너무 예쁘게 내려서 사진 몇 장 보내.


환기를 시킬 겸 베란다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민에게 답이 왔다. 와, 정말 예쁘네. 조선 시대 수묵화 같아!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주고받으며 2월의 아침을 보냈다. 그 후로도 눈 내린 풍경이 메시지로 부지런히 오갔다. 서로 나도 찍었다며 보내오는 사진들. 하나하나 보며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남쪽에서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에서 저마다 눈에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담느라 분주했을 모습을 상상하니- 왜 그런지 사람들이 참 귀엽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래, 애틋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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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해가 살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R에게 메시지가 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찍었다는 사진 두 장과 함께였다.

남산 공원 가는 길목, 누가 만든 눈사람일까_친구 R이 보내온 사진


우리나라 사람들 참 귀엽지?


R의 메시지를 읽고 한참 동안 사진을 보았다.  아, 정말 착하고 귀엽다. 천천히 답장을 남겼다. 착하고 귀여워. 눈 내린 풍경이 예쁘다며 녹기 전에 얼른 보라고 연락을 하는 것도,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사진으로 남겨 서로에게 보내 주는 것도, 소복하게 쌓인 눈을 보면 동글동글 굴려 눈사람을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도. 다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


누가 만들었을까? 내 말에 R이 답했다. 어느 엄마랑 중학생 정도 되는 아들 같았어. 조금 떨어진 데서 썰매 타고 있더라. 썰매? 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엄마와 중학생 아들이라. 한창 자라느라 퉁퉁거릴 나이인데 엄마랑 썰매라니 좋겠다.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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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였다.


그냥 말로만 전하는 인사가 아니라 정말로 좋은 하루 말이다. 겨울이, 못내 아쉬웠나 보다. 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멋진 풍경도 남겨 주고. 이런저런 생각들 끝에 시 하나가 생각나 R에게 전화를 했다. 정지용 시인의 시 중에 <춘설>이라는 시가 있어. 말 그대로 봄눈인데, 겨울과 봄 사이에 선 화자가 눈 내린 산을 보는 시거든. 지금이 딱 그런 것 같아. 계절의 사이에 우린 서 있는 거지. R이 조용히 듣더니 탄성처럼 내뱉었다. 와, 너무 좋다. 이런 이야기 너무 좋아! 나도 신이 났다. 이런 이야기 좋아? 그럼 계속 한다? 그러다 같이 깔깔 웃어 버렸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고, 생각 끝에 연락을 하고, 서로 반기며 좋은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한 하루였다. 나는 오늘 남산 공원도 안 갔고 친구들이 사는 지역 어디에도 머물지 않았으나, 그 모든 곳에 머물 수 있었다. 계절의 사이에 선 사람들 마음이, 꼭 봄눈 같았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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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절의 사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뜨겁거나 춥거나 분명하고 명확한 계절을 탐냈지 겨울에서 봄, 여름에서 가을과 같은 애매한 절기는 얼른 지나가라며 움츠리고 다녔다. 낯설고, 때로는 위태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보니 계절의 사이에도 분명한 아름다움이 있다. 글쎄. 그건 어쩌면 자연과 인간의 합작품이 아닐까. 자연이 만든 바탕에 사람들이 그려 놓은 풍경들.


오늘처럼 봄을 앞둔 절기에는 그냥 이런 글도 써 보는 것이다. 나의 이런 소소한 일상도, 자연 속에 남겨 둔 하나의 풍경이겠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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