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그러졌지만 여전해서요(feat. 텀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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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텀블러 이야기를 잠깐 해 보려 한다. 광고 아니고 후원 더더욱 아니고 리뷰단 더더더욱 아닙니다. 완벽한 내돈내산 10년 사용 후기입니... 근데 갑자기 텀블러는 왜죠! 소설 합평 다녀와서 마음이 복잡한 김에! 맥주 한잔 하며 영화 <중경삼림>을 본 김에! 그러다 홍콩 여행에서 새로 사 온 텀블러가 생각난 김에!
'김에 김에 김에' 한번 써 보는 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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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외로(?) 무척 덜렁대는 성격이라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고 망가뜨리고 고장 낸다. 바로 앞의 포스팅에서 완벽주의 어쩌구 한 것은 그럼 어찌된 일? 그냥 일이나 공부 등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만'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것으로... 아무튼 이 같은 덜렁댐의 역사는 꽤 유구한데, 때는 바야흐로 일곱 살. 그때 한창 유괴 사건도 많고 그래서 엄마들 사이에서 그런 게 유행했다. 이른바 미아 방지 목걸이라고 할까. 목걸이 펜던트 뒤에다가 아이의 이름과 보호자 연락처를 새겨서 목에 걸어주는 것이다. 엄마도 이웃 아주머니들과 의기투합하여 무려 아주 예쁜 '은목걸이'를 사서 내게 걸어주셨다.
태주야, 이거 꼭 잘하고 다녀야 돼, 알았지?
넹!
그러고 한 일주일 하고 다녔나? 철봉에서 거꾸로 매달리기 하다가 잃어버렸다. 실종 방지를 위한 목걸이를 실종시켜 버린 것. 초등학생 때는 또 선물 받은 은반지를 이틀 만에 깨 먹었다. 뛰어다니다가 어디에 부딪혔나 떨어뜨렸나 해서 두 동강이 나 버렸는데 엄마는 대체 뭘 하고 다니면 그럴 수가 있느냐며 나한테는 쇠로 된 반지가 어울리겠다고 한숨을 쉬셨다. 그때 나는 쇠반지를 하면 번개 칠 때 반지 때문에 감전돼서 죽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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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10년째 쓰고 있는 텀블러가 있다. 이전까지는 텀블러를 거의 안 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친구의 추천으로 우연히 하나를 사서 지금까지 아주 요긴하게 잘 쓰고 있다. 텀블러를 살 당시 나는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며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기준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벼울 것. (끝)
사실 기준은 딱 하나였다. 무조건 휴대하기 좋을 것. 그러니까, 가벼울 것. 텀블러이니만큼 보온과 보냉 기능도 살펴봤음직 한데 아무 생각이 없었다. 친구가 추천하기도 하고, 또 다른 것들과 비교해 봤을 때에도 탁월할 정도로 가벼워서 고민 없이 바로 고른 게 오늘 이야기할 텀블러이다. 근데 사진을 참 없어 보이게 찍는 재주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진이 영 이상한 것 같아서 괜히 책장 가서 다시 찍어 보았는데 큰 차이 없었구요. 이 사진 때문에 오히려 판매량이 줄지는 않겠지......? (고도의 안티 아닙...)
써모스(Thermos) JNL 모델이고, 무척 가볍고 컴팩트하다.
이리저리 우당탕탕 들고 다니다 보니 여기저기 까지고 찌그러졌지만 지금까지 매우 만족하며 쓰는 중이다. 용량은 아주 많이 들어가는 편은 아닌 듯하다. 가끔 카페에서 용기가 좀 작은데 그냥 맞추어 넣어 드릴까요?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도 부족했던 적은 없다. 게다가 가벼운 것뿐만이 아니라! 보온과 보냉 특히 보냉 기능이 미치도록 좋다!!! 진짜 좋다. 어느 정도냐면, 아이스 음료를 담아 오면 그다음 날 혹은 다다음 날 오전까지 얼음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얼죽아 열성 회원으로 아이스커피를 정말 좋아하는데, 오전에 이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서 운동을 하는 짬짬이 마신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그다음 날까지 쭉 이어 마시는 패턴을 즐긴다. 그러니까 이틀에 한 번 꼴로 커피를 담아 마시는 셈인데 그러니 얼마나 자주 이 텀블러를 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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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너무 찬양글 같아서 흠칫하는 중이다. 담담하게 사실을 기반으로 한 정보 위주로 쓰려고 했는데 이건 그냥 누가 봐도 텀블러에 미쳐 있는 자로군. (망했네요?) 뭐, 쓰고 싶어서 쓴 글에 망하는 게 어딨담. 그만큼 오래 잘 썼다는 이야기. 그리고 위에서도 밝힌 바, 이번 홍콩 여행에서 나를 위한 선물로 딱 이거 하나 사 왔다. 같은 종류 텀블러이고 솔직히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서 처음에는 안 사려고 했다. 스타벅스에서 사서 더 그런 것 같다. 같은 모델을 그냥 인터넷 등지에서 구매하면 좀 더 싸지 않을까. (안 찾아봤음) 그런데 왜 굳이 스타벅스였는가! 라고 한다면 여행 중 어쩌다 스타벅스에 갔을 때 꼭 눈에 띄어서 생각난 김에 사서 그렇다. 왜 음료 기다릴 때 괜히 컵이나 텀블러 구경하게 되잖아요... 근데 이제 한번 사면 주구장창 쓰는 타입.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스타벅스 망할 듯. (안티 아니에요.....)
어쨌든 한국에서 사면 4만 원대 극후반인데, 환산해 보니 홍콩에서는 그보다도 한 2만 원 정도를 더 줘야 했던 것. 힉! 이렇게 비싸게 살 수는 없어! 그러면서도 못내 아쉬워서 들었다 놨다 했다. 그레이 색을 좋아하는데 딱 그 색이어서 미련이 컸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R이 그랬다.
너 이거 사면 또 2034년까지 쓸 거잖아.
그렇지.
이거 볼 때마다 홍콩 생각도 날 거 아냐.
그렇지.
그렇게 사게 됐다. 그러고는 다짐했다. 15년 써야지! 2039년에 다시 인증해 보겠다. (까마득하군)
안쪽은 위와 같이 생겼고 물기는 세척 직후 바로 찍어서 그렇다. (새는 거 아님) 이중 잠금이어서 잘 닫기만 하면 샐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세척 시 저 고무 패킹을 분리해서 잘 닦고 말려서 쓰면 완벽하다. 나처럼 대충 사는 인간도 할 수 있는 정도니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다. 원래 이 새로운 텀블러를 쓰게 되면 기존에 쓰던 블랙은 안 쓰려고 했는데(주변에서 이제 제발 좀 버리라고 해서) 여전히 기능이 너무 좋아서 번갈아 쓰고 있다.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용.
뭐야, 이 글. 다 쓰고 나니 왜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며 썼는지 모르겠다. 오늘 소설 합평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아닌데? 즐거웠는데? 하하하하. (정신 승리) 그냥 한번 써 보고 싶었다. 혹시나 텀블러 구매를 고민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구매 시 참고하시라고... 그런 의의라도 두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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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물건에도 기운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 물건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 마치 사람과 맺은 인연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굴러가던 차가 폐차를 결정하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니 그때부터 엔진이 나가고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야기들.
오래되고 찌그러지고 여기저기 긁혀서 볼썽사나워도 그럴수록 애지중지하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만큼 편하고 익숙해서 그런 걸까. 끝내 놓아 버릴 수가 없다. 무엇이든 오래오래, 물건도 사람도 오래오래 곁에 두고 같이 시간을 통과하고 싶다.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