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주 Mar 13. 2024

마라톤 D-4

아무렴, 상 중에 제일은 참가상이지!

-

마라톤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왜 벌써 3월 중순이란 말인가? 나는 아직도 결심과 다짐을 반복하며 1월의 초입에 서 있는 것만 같은데! 그래서일까. 왠지 쌀쌀한 것 같아서 롱패딩을 입고 거리로 나섰더니 슈퍼 사장님이 웬일로다가 말까지 걸어 주셨다. 엄청 무뚝뚝하셔서 3년 동안 고작 두어 마디 섞어 본 게 다였던 분이다.


추우셔?

네??

춥냐구.

아하! 제 옷이 좀 두껍죠? 하하.

난로 켜는 인간도 있는데, 뭘.


그러면서 발치에 놓아둔 조그마한 전기난로를 무심히 가리키셨다. 우리 둘은 마주보고 킥킥댔다. 마치 봄날의 도래를 막고 겨울날을 사수하려는 2인조 방해꾼들처럼.


-

그동안 마라톤을 잊은 건 아니었다. 잊을 만하면 주최 측에서 문자를 보내 줬고, 또 까먹을 만하니 이번에는 그 언젠가 신청했던 기념품 옷과 배 번호가 도착했다. 배 번호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큼지막한 폰트로 내 이름 석 자가 박혀 있었다. 오 마이 갓! 이거 원래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온 천하에 알리며 뛰어야 하는 걸까? 가끔 이름을 걸고 최선을 다하라는 등지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그게 하필 마라톤이 될 줄이야! 게다가 저는 뛰는 폼도 이상하고(팔자걸음) 속도도 느리고(100미터 19.9초) 지구력도 좋지 않아요. 심지어는 달리기 공포증도 있는데 망했군.


이쯤 되면 대체 마라톤은 왜 신청했나 싶은데, 그건 아래의 포스팅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https://brunch.co.kr/@artistzen/167

마침 제목도 <마라톤, 이대로 괜찮은가!>이군.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그래도 이때는 4개월 정도 남은 시점이었네. 지금은 무려 4일 남았습니다. D-4이지요. 아니, 그동안 대체 뭘 했죠? 글쎄 말이다. 원래 내 목표는 마라톤 전까지 1시간 달리기를 채우는 것이었는데 대략 40분 정도에서 멈추었다. 아니, 솔직히는 38분 정도. 내 속도라면 내일모레 83분은 뛰어야 할 것 같은데 큰일이다. 주변에서는 대놓고 가지 말라며 걱정이고, 엄마도 너 그거 왜 신청해서 스트레스를 받느냐며 혀를 끌끌 차신다. 아빠는 이백 년 만의 통화에서 마라톤은 어떻게 됐느냐며 그냥 대충 걸어서 참가상이나 받아오라고 하셨다. 솔깃했다.


아무렴, 상 중에 제일은 참가상이지!


같이 나가는 지수한테 한번 연락해야 하는데 하며 걱정만 하다가 오늘까지 왔다. 그런데 아침나절에 마침 지수가 연락을 해 왔다. 일이 너무 바빠서 준비를 제대로 못했다며 같이 천천히 뛰자고 하는데 눈물 나게 고마웠다. 지수는 이미 기록이 있어 나와 다른 코너에서 출발을 한다. 이른바 실력자들의 코너랄까. 나는 무기록자라(이번이 첫 참가) D 구역에서 출발하는데 배 번호에 이름과 함께 또 매우 또렷하게 D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제 이 번호를 휘날리며 뛰어나갈 것이다. 하하.


-

배 번호가 너무 재밌어서 몇 명에게 자랑(?)한 결과, R은 미친 듯이 웃었고 민은 이공계답게 바람의 저항을 많이 받게 생겼다며 속도 저하가 우려된다는 말을 전해 왔다. 가족 단톡방에도 올려 이름을 빛내고 오겠다고 큰소리쳤는데 다들 아무 대답이 없었다. 아주 나중에 엄마가 하트 모양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셨다. 나를 불쌍히 여기셨음이 틀림없다...


중간에 속탈만 안 났어도 더 잘 뛸 수 있었을 텐데- 라는 근사한 변명 거리를 떠올렸다가 얼른 지워버렸다. 그게 아니었어도 뛰는 건 그닥이었을 것. 냉정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마라톤을 생각할수록 왠지 컨디션이 저하되는 느낌인데, 괜히 검색창에 '10km 마라톤, 10km 달리기, 마라톤 실패' 이런 걸 검색해 보다가 관두었다.


그냥 가볍게 다녀오자.


그러면서도 걱정이 되어 나름 전술도 짜 보았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타입) 이른바 '4-3-3 전술'인데 초반 4km를 뛰고 3km를 걸은 뒤 다시 3km를 뛰어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완벽한 계획인가! 문제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 연습 없이 실전에 바로 투입해 보는 용감무쌍한 달리기 무식자여... 중간에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힘들면 그냥 걸어서 10km를 완주하는 기염을 토해 보기로 한다.


-

이렇게 마라톤 걱정과 더불어 그동안 네 권의 책을 읽고,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좀 더 속도를 내 책과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자. 이번 주부터 말일까지 이런저런 일들이 많다. 강의 자료를 준비하고, 마라톤도 잘 마무리해 보자. 못 뛰더라도, 뛰려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받아올 수 있을 것이다. 뭐든 참가상을 타러 가는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재미난 봄이 될 것 같다.


내일은 롱패딩을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운동에 나서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