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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26. 2022

그런 마음도 사랑이겠다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


새해가 되고 처음 K를 만났다. K를 만날 때는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1. 운동화를 신을 것.

2. 가방은 무조건 가볍게 들 것.


가방을 챙기며 <공정하다는 착각>을 넣었다가 빼고, <이별 없는 세대>를 넣었다. 무조건 더 작고 가벼운 책을 넣어야 한다. K와 만나면 앉아서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몇 배는 더 많기 때문이다. K가 '영혼의 고향'으로 명명한 서촌에서 만나 일단 걷기 시작했다. 큰 보폭과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면, 그보다 훨씬 키가 작은 나는 한참을 종종거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걸음이 좋아 처음 만났던 열일곱 봄 이래로 늘 곁에서 종종대며 함께 걷고 있다.


이번 달만 해도 출장으로 전국 팔도의 여러 도시를 찍고 온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여행을 좋아해서 전국 방방곡곡 다양한 곳을 가 본 그가 오늘도 내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며 가 보자 했다. '인왕산 초소책방'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외향형 사람들이, 주로 집에 박혀 있는 내향인들을 불러내 같이 잘 논 다음에 다시 곱게 넣어 놓는다고. 비 오는 날이면 더욱 꿈쩍 않는 나를 서촌까지 불러내 하루 동안 맛난 거 먹이고 좋은 거 보여 주고 걷기 운동까지 알뜰하게 시킨 다음, K는 저녁이 깊어진 후에야 이제 그만 들어가 쉬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하면서도 돌아보고 돌아보는 마음들이란.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은 이름만 들었던 곳이다. 서촌에서 점심으로 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길을 나섰다. 부슬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야트막하게 난 길을 따라 꼬불꼬불 오르다 보니 제법 지대가 높다. 길눈 밝은 K가 앞장서서 가며 이렇게 저렇게 길을 알려 주는데, 왕 길치인 나한테는 무용지물. 어어어- 고개를 끄덕이며 헐레벌떡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책방이 나왔다. 오후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아침 8시부터 여는데, 오픈 시간에 맞추어 와도 이미 주차장은 만원이란다. 1층 한편에 카페가 마련되어 있고 맞은편에 다양한 책들이 깔끔하게 큐레이션 되어 있다. 주로 기후 변화, 식물, 환경 등에 관한 책들이 있었는데, 늘 그런 것인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계절에도 한 번 더 가 봐야지.


K 주로 루프탑에 머문다고 했다. 올라가 보니 비는 그치고  풍경이 잔잔하게 젖었다. 루프탑에는 테이블이 대여섯  정도 있었는데 테이블마다 투명한 텐트 같은 것이 씌워져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바깥에서 호시탐탐 텐트가 비길 기다렸다가  팀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잽싸게 뛰쳐 들어갔다. 성공이다! 마주 보며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나이는  어디로 먹었는지. 1 축제  같이 난타 리듬을 짜며 퉁탕거리던 깨복쟁이 친구만 있다. 텐트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니 빗방울이 몽글몽글하다. 루프탑 난간을 밝히는 불빛도 톡톡 붓질을  것처럼 촘촘하게 번졌다. 유화 같다.


커피 한 잔을 하고 먼 곳의 풍경을 보고 한참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날이 어두워 내려왔다. 미끄럽고 어두우니까 조심해! 휴대전화 램프를 켜고 언제나처럼 앞장서는 K의 뒤를 따라 주춤주춤 내려왔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 때나, 유럽 배낭여행 때나 K는 늘 내 앞에 있었다. 앞에 서는 사람은 늘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그 덕분에 뒷사람들은 좀 더 따뜻하고 수월하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게,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렇게 오늘도 같이 18,377 걸음을 걸었다. 지금까지 함께 걸은 걸음의 수는 얼마나 될까. 헤어질 때 손을 흔들며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안녕, 안녕- 할 때 아쉽고 서운해 자꾸 돌아보는 마음도 사랑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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