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더숲 초소책방
새해가 되고 처음 K를 만났다. K를 만날 때는 잊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1. 운동화를 신을 것.
2. 가방은 무조건 가볍게 들 것.
가방을 챙기며 <공정하다는 착각>을 넣었다가 빼고, <이별 없는 세대>를 넣었다. 무조건 더 작고 가벼운 책을 넣어야 한다. K와 만나면 앉아서 이야기하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몇 배는 더 많기 때문이다. K가 '영혼의 고향'으로 명명한 서촌에서 만나 일단 걷기 시작했다. 큰 보폭과 빠른 걸음을 따라가려면, 그보다 훨씬 키가 작은 나는 한참을 종종거려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걸음이 좋아 처음 만났던 열일곱 봄 이래로 늘 곁에서 종종대며 함께 걷고 있다.
이번 달만 해도 출장으로 전국 팔도의 여러 도시를 찍고 온 그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쳤다. 여행을 좋아해서 전국 방방곡곡 다양한 곳을 가 본 그가 오늘도 내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며 가 보자 했다. '인왕산 초소책방'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외향형 사람들이, 주로 집에 박혀 있는 내향인들을 불러내 같이 잘 논 다음에 다시 곱게 넣어 놓는다고. 비 오는 날이면 더욱 꿈쩍 않는 나를 서촌까지 불러내 하루 동안 맛난 거 먹이고 좋은 거 보여 주고 걷기 운동까지 알뜰하게 시킨 다음, K는 저녁이 깊어진 후에야 이제 그만 들어가 쉬라며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안녕- 하면서도 돌아보고 돌아보는 마음들이란.
인왕산 더숲 초소책방은 이름만 들었던 곳이다. 서촌에서 점심으로 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길을 나섰다. 부슬비가 조금씩 흩뿌렸다. 야트막하게 난 길을 따라 꼬불꼬불 오르다 보니 제법 지대가 높다. 길눈 밝은 K가 앞장서서 가며 이렇게 저렇게 길을 알려 주는데, 왕 길치인 나한테는 무용지물. 어어어- 고개를 끄덕이며 헐레벌떡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책방이 나왔다. 오후 시간대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아침 8시부터 여는데, 오픈 시간에 맞추어 와도 이미 주차장은 만원이란다. 1층 한편에 카페가 마련되어 있고 맞은편에 다양한 책들이 깔끔하게 큐레이션 되어 있다. 주로 기후 변화, 식물, 환경 등에 관한 책들이 있었는데, 늘 그런 것인지 시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른 계절에도 한 번 더 가 봐야지.
K는 주로 루프탑에 머문다고 했다. 올라가 보니 비는 그치고 온 풍경이 잔잔하게 젖었다. 루프탑에는 테이블이 대여섯 개 정도 있었는데 테이블마다 투명한 텐트 같은 것이 씌워져 아늑하고 따뜻해 보였다. 바깥에서 호시탐탐 텐트가 비길 기다렸다가 한 팀이 떠나는 것을 보고 잽싸게 뛰쳐 들어갔다. 성공이다! 마주 보며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나이는 다 어디로 먹었는지. 고1 축제 때 같이 난타 리듬을 짜며 퉁탕거리던 깨복쟁이 친구만 있다. 텐트 안에서 바깥의 풍경을 사진에 담으니 빗방울이 몽글몽글하다. 루프탑 난간을 밝히는 불빛도 톡톡 붓질을 한 것처럼 촘촘하게 번졌다. 유화 같다.
커피 한 잔을 하고 먼 곳의 풍경을 보고 한참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날이 어두워 내려왔다. 미끄럽고 어두우니까 조심해! 휴대전화 램프를 켜고 언제나처럼 앞장서는 K의 뒤를 따라 주춤주춤 내려왔다. 제주도 자전거 여행 때나, 유럽 배낭여행 때나 K는 늘 내 앞에 있었다. 앞에 서는 사람은 늘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그 덕분에 뒷사람들은 좀 더 따뜻하고 수월하게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그게, 사랑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렇게 오늘도 같이 18,377 걸음을 걸었다. 지금까지 함께 걸은 걸음의 수는 얼마나 될까. 헤어질 때 손을 흔들며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안녕, 안녕- 할 때 아쉽고 서운해 자꾸 돌아보는 마음도 사랑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