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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24. 2022

몰라, 난 내가 좋은 걸 할 거야

린이의 아침


엄니가 서울에 올라오셨다. 오빠네를 들르신다기에 그럼 저도 오랜만에 가 볼까요 해서 잠시 합류했다. 새해가 되고 처음으로 만나는 조카들은 그새 또 쑥 자라 있었다. 똥강아지들 언제 또 이렇게 컸니? 나와 쌓인 시간이 좀 더 많고 도타운 율이는 바로 와서 안기는데, 린이는 또 수줍어 머뭇거린다. 한국 나이로는 벌써 다섯 살이지만 태어난 해로 치면 이제 4년을 겨우 채운 막둥이. 모든 게 작고 둥글둥글한 귀여운 생명체다. 사람은 모두들 원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세모도 되고, 네모도 되었다가 직선과 곡선이 되며 나름의 형체를 갖추게 되는 걸까.


복닥복닥 저녁을 차려 먹고 나니 린이는 벌써 자러 갈 시간이다. 옷을 갈아 입자, 세수를 하자, 이를 닦자 정신이 없는데 우당탕탕하는 와중에도 린이는 분하고 억울하다. 아무래도 저만 먼저 자러 가는 게 속상한가 보다. 네 살 위인 언니는 취침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어 사실은 아빠랑 고모랑 할머니랑 몰래 더 놀기로 했지. <보난자> 보드게임을 하기로 쉬쉬 눈빛 교환을 하는데, 뭔지는 몰라도 낌새가 이상하다. 엄마아- 언니도 자요? 기어이 언니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간다. 율이는 그 와중에 내게로 후다닥 달려와 5분만요, 고모! 5분! 진짜 자는 거 아니에요! 자는 척하러 가는 거예요! (속닥속닥) 혹시나 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 아이는 마음이 바쁘다. 정말 5분 만에 달려 나온 율이와 함께 <보난자> 게임 한 판을 했다. 린이가 자러 간 저쪽 방에서는 내내 린이 목소리가 들리고(억울해서, 언니가 들어올 때까지 계속 쫑알대며 분통을 터뜨렸다는 막내 어르신).


<보난자> 게임 결과:

눈치 없는 고모는 콩밭을  일구어 금화 16개를 획득, 1등을  버렸다(미쳤군!!). 그다음으로 눈치 제로인 아빠가 금화 15개로 2(남매가 쌍으로 대체  이러는...?), 할머니와 율이가 금화 9개로 공동 3. 율이는 자러 들어가고 '조카를 상대로 승부욕을 불태웠다' 자책하는 고모에게 우리 엄니이자 율이 할머니께서는 '괜찮아,  아빠도 2등을 했는데 '이라며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심...


그리고 다음 날 아침.

6시 59분까지 아무런 기척이 없던 집안이 7시가 되자 율이의 기상을 필두로 우당탕탕 난리가 났다. 급히 아이들 아침이 차려지고, 몇 번인가 방안을 오가던 오빠는 금세 출근룩으로 변신해 현관을 뛰쳐나갔다. 다음은 율이 차례. 린이가 엄마와 밥을 먹는 사이, 율이는 할머니와 함께 등굣길에 올랐다. 할머니, 제가 학교를 간 사이에 고모가 집에 가면 어쩌죠? 율이가 그러길래 내가 점심 먹고 율이 보고 갈 테니 걱정 말라고 했다. 네? 저 점심 먹고 가나요? 나도 모르는 내 스케줄 순식간에 생성.


다음은 드디어 린이가 어린이집에 갈 차례인데, 이 똥강아지는 밥을 먹다 말고 한쪽 구석에 태평하게 앉아 갑자기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흘끔흘끔 의식하며 휙휙 책을 넘긴다. 뭐지? 칭찬해 달라는 건가? 그러는데 저쪽에서 언니와 엄니의 목소리가 동시에 날아왔다. 아이구우- 우리 린이는 책도 잘 읽고, 밥도 잘 먹지요오- 린이의 얼굴에 뿌듯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린아, 고모가 한발 늦어서 미안. 시간은 벌써 9시를 향해 가는데 린이의 '보여주기 식 독서'는 끝날 줄 모르고, 괜히 내가 다 애를 태운다. 린이는 몇 시까지 가나요? 아, 어린이집은 그래도 좀 자유로워서 일어나서 밥 먹고 준비되는 대로 일단 부지런히 가면 돼요. 아, 그런가요. 그래도 9시를 너무 넘기면 안 되지 않나. 규칙과 원칙에 익숙한 그리고 아직 아기를 키워 본 적 없는 성인 1은 '그래도'를 연발하며 린이를 위태롭게 본다.


사실 린이는 전혀 위태롭지 않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 하고야 마는 이 천진하고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엄마는 속이 터질 테지만)에서 위태를 보다니. 위태로운 건 오히려 나다. 린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이다. 린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책장을 쥔 손에 힘을 준다. 조그만 손마디에 주름이 잡히고, 작은 손에 자라는 손톱마저 사랑스러워 몰래(물론 자기 찍는 거 다 알고 있음) 사진을 찍었다. 사진 제목은 이힛, 몰라 난 내가 좋은 걸 할 거야.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이 사진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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