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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28. 2022

아무튼 그런 밤이 있는 법이다

140번 버스


천천히 돌아오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런 날에는 버스를 탄다.


Ra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남에서 북으로 불꽃을 쏘아 올리듯 가로질러 올라와야 하는데, 왠지 버스를 타고 싶었다. 금요일, 설 연휴가 시작되는 저녁이다. 길은 초입부터 꽉 막혔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아무래도 버스를 타기에는 무리이지 싶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몇 번인가 멈칫거렸다. 지하철을 타면 두어 번 갈아타야 하지만 적어도 막히지는 않겠지. 하나쯤 놓쳐도 전혀 상관없다. 금세 다시 오니까. 하지만 재미는 없을 거다. 여기가 어디인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하나도 알 수 없겠지. 그저 2분 단위로 뚝뚝 끊어진 시간을 흐르다가 어느 순간 도착해 있을 것이다. 자, 그렇다면-


버스다.


조금 아니 많이 늦더라도 어쨌든 집에만 가면 된다. Ra와 헤어진 장소에서 한참을 걸어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버스 노선 하나를 찾았다. 파란색, 140번 버스다.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지만 노선을 보니 종로를 지나 혜화까지 간다. 오랜만에 혜화, 좋다. 혜화는 어쩌면 이름도 혜화일까. 꽃 이름 같다. 혜화, 혜화 중얼거리다 보니 휘파람도 불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버스다!


퇴근길 사람들 속에 섞이어 전투적인 태세로 140번 버스를 기다렸다. 새로운 버스 하나가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가 우르르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멀리 사라져 갔다. 모두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각자의 번호를 찾아 올라타고 각자의 정류장을 찾아 내리고 다시 타고. 그렇게 돌아간다. 집으로. 각자의 은신처로. 이 밤을 또 하루 살기 위하여.


한참만에 140번 버스가 도착하고 빈자리가 있어 앉았다. 버스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도로가 차들로 꽉 찼다. 마침 신호도 자주 걸렸다. 창 밖 풍경도 덩달아 천천히 흘렀다. 조심조심 내려앉던 어둠이 어느 순간 세상을 완전히 덮었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에서 환한 불빛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한 강남역을 지나고, 신사역도 지났다. 한남대교를 거쳐 남산 터널 안도 달렸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어느 순간 버스 안이 빽빽해졌다가 한산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이렇게 아주 찰나의 순간을, 낯 모르는 삶들과 섞이어 지난다.


한참을 달려 혜화역에 내렸다. 집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일부러 천천히 혜화를 걸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그래도 천천히 걷는다. 오늘 내 하루의 어디에도 혜화는 없었지만- 이렇게 하루의 끝에서 우연처럼 만나고 보니 또 반갑다. 시간을 놓으니, 참 괜찮은 귀갓길이다. 중고서점에 들러 고심 끝에 책 세 권을 샀다. 집에서 들고나간 책은 한 권인데, Ra에게서 빌린 책 한 권과 새로 산 책까지 총 다섯 권을 들고 돌아왔다. 큰일났다. 책이 자꾸 새끼를 친다. 분명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에는 이제 책 그만 사야지, 집이 무너질지도 몰라 하며 스스로에게 주의를 주었는데, 부질없다. 그런 주의 따위 못 들은 척하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이건, 갑자기 혜화를 들른 탓이다. 기어코 귀가가 늦어진 탓이다. 갑자기 버스를 탄 탓이다. 문득 천천히 돌아오고 싶어진 탓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일을 행한 내 탓이다. 아니,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냥 그런 밤이 있는 법이다. 문득, 한 번도 타 본 적 없는 버스를 타고- 대충 알 만한 곳에 내려- 어디로 간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느릿느릿 걷다가- 예정에도 없는 곳들을 들러-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책들을 사서- 고픈 배를 달래며 돌아오고 싶은 밤이 있는 법이다. 오늘처럼.


아무튼 그런 밤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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