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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an 31. 2022

더 오래된 내가 오고 있다

연희동 책바(Chaeg Bar)


추운 날이었다.


신촌에서 J를 만나 연희동으로 향했다. 술 한 잔과 함께 묵묵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바가 있다고 했다. 입구를 찾기가 어렵기로 유명하다고. 정말로 어려웠다. 아니, 저기 간판이 있는데? 아, 그럼 여긴가? 어, 막혀 있는데? 그럼 어디로 들어가야 하지? 한참을 뱅글뱅글 돌다가 웃음이 터졌다. 눈앞에 빤히 목적지가 보이는데 가는 길을 모르다니! 우리네 인생사 같았다. 깔깔 웃으며 우여곡절 끝에 찾아낸 입구가 반가워 동시에 여기다! 를 외쳤다. 처음 만났던 스무 살 언저리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입구에 귀엽고 작은 입간판이 서 있었다. 들어가니 적당한 어둠과 줄지어선 책들이 반긴다. 오픈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책을 읽고 있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조용조용한, 그림자 같은 안내를 받았다. 바 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져온 책을 꺼냈다. J는 김영민 교수의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를, 나는 정여울 작가의 <상처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택했다. 이 책은 엊그제 우연히 들른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고른 우연한 책(과연... 우연일까...)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그저 정여울 작가의 이름만 보고 얼결에 산 책이라 사면서도 얼떨떨했는데, 집중해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좋았다. 사실, 그 기회란 것도 결국 내가 만드는 것이지만- 집에서는 왠지 잘 안 읽게 되어서(라는 핑계는 이제 그만).


메뉴판이 독특했다. 술 한 잔을 하며 책 읽는 시간이 좋아 이곳을 열었다는 주인장님의 취향이 오롯이 반영된 메뉴. 책에서 딴 술들의 이름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었다. 고심 끝에 나는 <설국>을 모티브로 한 칵테일을, J는 헤밍웨이의 칵테일을 골랐다. <설국>은 따뜻한 코코아 속에 달큰한 위스키 향이 잔잔하게 감도는 술이었다. 칵테일 위에 띄운 하얀 마시멜로가 눈, 로즈마리 잎이 나무, 코코아가 땅을 의미한다고 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떤 겨울날이 생각났다. 무척 추웠는데 이상하게도, 춥지만은 않았다고 기억하는 날들.


누군가와 함께였던 것 같다. 훈훈한 곳에서,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조심조심 마시며 이 겨울도 지나가겠지 늘 이렇지만은 않을 거야 두런두런 위로와 다짐을 주고받던 순간들. 때로는 아무런 언어 없이도 그저 마주 앉아 있음으로 크게 위안이 되던 날들. 그날들로부터 많은 시간을 넘어 오늘, 이곳에 도착했다. 이제 나는, 어떤 순간의 나보다 오래된 나를 만나는 일에 좀 더 익숙해졌을까.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오래된 나를 반겨 맞을 수 있을까. 아직 오지 않은 먼 훗날의 더 오래된 나는, 모든 순간들에 좀 더 의연할 수 있을까.


<설국> 한 모금을 삼키며 흘끗 옆자리의 J를 본다. 두 눈을 빛내며 책에 열중한 J에게 고마운 것들이 많다. NGO 활동가로 살던 2008년 그해 여름.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고 주말에도 일하는 날들이 많아 대부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농담처럼, 일하는 곳으로 와 주면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미안해서 말이야- 들릴 듯 말 듯 옅게 지나간 말을 듣고 정말로 사무실 부근까지 찾아와 저녁 한 끼를 사 주고 갔던 J. 먼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며 바쁜 와중에도 한국에 오면 꼭 얼굴을 보고 차 한 잔을 하고 갔던 J가, 돌이켜 보니 힘들고 어려운 계절마다 함께 자리를 지켜주었다. 오늘도, 세밑의 찬바람이 부는 이런 날에도.


두 시간 꼬박 책을 읽고, 이야기가 고파 자리를 털고 나왔다.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고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헤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다음에는 어디를 가 볼까, 여기를 가 보자 설레는 약속을 나누었다. 새해가 되고 나는 조금씩 오래되고 있지만 이제는 더 오래된 나를 기꺼이 반겨 맞을 수 있을 것 같다. J와, 그리고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곁의 사람들과 함께라면 말이다.


그렇게, 더 오래된 내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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