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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02. 2022

코로나는 슬프지만 그에 못지 않은 기쁨으로

2022년 설날 풍경


엥, 피노키오 눈사람이네? 코가 이렇게나 길다니, 거짓말을 대체 얼마나 한 거야?


내 말에 시무룩해 있던 율이가 깔깔깔 웃었다. 그 바람에 눈가를 적셨던 눈물방울도 쏙 들어갔다. 오빠네 가족이 시골을 떠나는 날. 우당탕탕 정신없는 와중에 눈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을 유독 섭섭해하는 율이를 위해 아부지가 몰래 만들어 두셨다고. 마당 평상 위에 오도카니 놓인 눈사람에게는 눈도 코도 아직 없었는데, 율이와 린이가 나뭇가지를 주워 정성스레(?)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코라고 붙여준 가지가 길어도 너무 길다. 꼭 거짓말을 반복해 코가 쭉쭉 늘어난 피노키오 같다. 앗, 그러고 보니 입이 없어 거짓말은 못하겠군.


설이었다. 코로나와 인원 제한으로 시간 차를 두고 내려왔다. 설날, 떠나는 오빠네 가족을 스치듯 만났다. 마침 눈이 펑펑 쏟아졌다. 길이 얼면 자식들이 발이라도 묶일까 봐 아부지는 꼭두새벽부터 트랙터를 몰고 저 먼 길 너머까지 눈을 싹 치우고 돌아오셨다고. 자식이 뭔지. 나는 그렇게 못 살 것 같다(이미 그렇게 못 살고 있는 중). 더 있으면 눈길이 얼고 길도 막힌다며 아부지는 재촉에 재촉이시다. 오빠네는 어엇, 그런가?? 하다가 얼결에 짐을 싸서 우당탕탕 떠났다. 이틀 동안 갖은 소동을 일으키며 퉁탕거리던 애기들이 사라지자 온 집안이 그렇게 조용할 수 없다고 하시는 엄니는, 어째 섭섭한 눈치시다.


아유, 왜 이렇게 심심하지.


십 분이나 되었나. 길게 누워 계시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귤을 하나 까서 드신다. 아부지도, 세상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TV 채널을 얼마간 이리저리 돌리시더니(애기들 있는 동안에는 뽀로로와 타요에 점령되어 있었다고) 문득, 저기 거 뭐 잘 도착했나 하신다. 엥? 이제 막 고속도로 타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그러시곤 조금 있다가 또 거, 연락 한번 해 봐라 하신다. 엣? 아직일 걸요? 애기들이 가니 조용해서 좋다는 말씀은 아무래도 특대왕 뻥이시지 싶다.


그래도 제가 와서 좋으시죠?

아, 좋지.

구체적으로 어떤 게 좋으신가요?

...응?


엄니의 대답에 어째 영혼이 거의 없으시다. 아무래도 애기들 소식이 궁금해서 마음이 그쪽으로 가 계신 듯하다. 근데 나도 궁금하다. 고모, 제 생일에 꼭 놀러 오세요! 다음 주예요! 그래! 얼결에 또 약속을 해 버렸다. 정말, 다음 주면 율이가 꼭 아홉 살이 된다. 아홉 살 인생 율이에게 이 시절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고모, 시골에 오면 사람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마스크 안 써도 되니까 너무 좋아요. 그렇구나. 괜히 미안해진다. 아이들이 고생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미안하다. 고모도 그래. 율아, 그래도 밖에서는 조심히 다녀야 해. 괜한 걱정에 꼭 잔소리 한마디를 던지고 만다. 넹!


율이는 낭랑하게 인사를 하고, 제가 맛있게 먹던 오징어채 한 봉지를 손에 꼭 쥐고 시골집을 떠났다. 고모도 오징어 좋아한다니까 작은 접시에 한 움큼을 집어 올려놓고 갔다. 가고서는 아직 연락이 없는데, 아마 우당탕탕 아홉 살 인생을 또 신나게 살고 있겠지. 왕성한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코로나는 슬프지만 그에 못지않은 기쁨으로. 내가 수십 년 전 그랬던 것처럼. 시절은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일은 도처에 있지만 아홉 살 인생들이 흔히 그렇듯 와하하하 웃고 떠들며, 찔끔찔끔 울다가도 에헤헤 장난치며.


피노키오 눈사람은 금세 녹았다. 얼어붙은 눈길도 하루가 지나자 거의 녹았다. 그래서 이제는 집으로 올라가도 될 것 같은데, 아부지는 아직 길이 위험하다며 내일 가라고 하신다. 어엇, 그럼 그럴까요. 나도 어어어 하며 얼결에 하루를 더 묵는다. 셋이서 하는 일 없이 뒹굴뒹굴하며 이렇게 새해를 맞았다. 그래, 새해다. 1월 1일만큼이나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2월 2일이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면 그것이 곧 새해이고, 새날이겠지.


두려움 없이 시작할 줄 아는, 모든 빛나는 인생들과 그 시작을 응원한다. 그리고 내 인생도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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