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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r 13. 2022

이럴 거면 안 사는 게 낫다 싶지만

초보 당근마켓러의 파생 소비에 관한 짧은 기록


당근마켓이라는 앱을 사용한 지는 한 일 년 남짓 되었다. 집에, 옛날에 보던 비디오테이프들이 있는데 플레이어가 없어 아쉬워하던 찰나, 혹시 중고거래 앱에는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하여 설치해 본 것이 시작이었다. 


오호! 역시나 있었다. 마침 집에 있는 L사 TV와 같은 브랜드의 비디오 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고, 오백 번 정도의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채팅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답이 왔다. 모처의 역 앞에서 만나기로. 집에서 20분 정도 지하철을 타고 나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드디어 비디오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현금 만 칠천 원을 봉투에 담아 신나게 달려갔다. 약속된 시간에 멀리 연세 지긋한 어르신이 슥 나타나셨고, 매체에서만 보던 모양새로 우리는 '당근...?' '아, 예예'하며 물건과 봉투를 주고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신나던지. 기계치에 기계충이지만 인터넷을 뒤져 가며 뚝딱뚝딱 설치 후 대망의 비디오를 틀었는데...!


지지ㅣ지지기ㅣㅣ직... 


조금 나오나 했던 화면이 별안간 가열차게 흔들리며 지직대기 시작했다. 플레이가 진행되자 투걱투걱하며 비디오테이프가 썰리는(?) 소리도 났다. 힉! 깜짝 놀라 얼른 끄고 비디오 헤드 부분을 꾸역꾸역 불로 비추어 보는데, 어디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있나. 분명 잘 작동된다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헤드의 어떤 부분이 나갔나 보다. 만 칠천 원을 들여 구매한 첫 아이템이 이러니 무척 속상했다. 속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원은 이상 없이 들어오고 비디오테이프를 넣으면 돌아가는 소리도 나니 고장이라고는 생각지 않으신 듯하다. 혹시나 싶어 인터넷을 뒤졌다. 헤드를 청소하면 낫지 않을까? 다시 만 원을 투자해 플레이어 헤드를 청소하는 비디오테이프(옛날에도 이런 게 있었는데 아직도 있는 줄은 몰랐다...!)를 샀다. 배송비까지 더하면 거의 비디오 플레이어 가격에 육박했지만 왠지 당근마켓 첫 소비를 실패로 남겨두고 싶지 않은 욕망이었달까...? 


그러나 결국 실패. 


다시 돈만 날리고, 이 비디오 플레이어는 결국 아부지께서 혹시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며 들고 가셨다. 그렇게 주유비와 식사 비용을 또 치르시고(하하하하), L사의 서비스 센터에 들고 가니 이걸 고치는 데 몇 배의 돈이 드니 그냥 버리는 게 낫다고. 와하하하 망했다. 하하하하. 그렇게 당근마켓 앱은 내 휴대전화에서 사라졌다. 슬픈 기억이다.   


그러다 해가 바뀌고, 책은 왠지 실패가 없을 것 같아서 다시 당근마켓을 깐 게 얼마 전이다. 그렇게 몇 가지 책들을 만족하게 구매하고, 가끔가끔 재미 삼아 들여다보던 중 바로 엊그제의 일이다. 수업에 필요한 문제집이 있어 별다른 기대 없이 키워드를 걸어 놓고, 없으면 새로 사지 뭐 하고 있는데, 오잉? 며칠 지나지 않아 뿅! 하고 알람이 왔다. 얼른 들어가 보니 마침 그 책이다. 오호? 이것은 마치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상황인가?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하라는? (당연한 소리) 그것도 마침 새 책 두 권을 원가의 반도 안 되는 값에 내놓았다. 아니, 이렇게 고마우신 분이! 판매 소개글을 보니 아무래도 학생 같다. 


제가 관련 문제집이 너무 많아서 이건 못 풀 것 같아 내놓아요. 완전 새 책이고 두 권 페이지 다 합하면 800쪽이 넘어요. 


아, 너무 귀여운 글이다. 분명 새 학기를 맞아 들뜨고 결연한 마음으로 샀겠지. 열심히 해 보려는 생각으로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리스트업하고 하나씩 사며 다짐을 했겠지. 내가 이거 다 풀고 성적 바짝 올린다, 진짜정말진심. 그러다가 막상 새 학기가 되고 수업을 나가고 과제를 받고 수행평가 내용을 듣고 이런저런 일상에 휩쓸리다 보니 아차 싶어서 눈물을 머금고 정리를 하게 된 것이렷다. (이렇게 자세히 소상히 썰을 풀 수 있는 것은... 짐작하다시피 본인 경험 200%)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것을 심히 어려워하고 수줍어하는 타입이어서 모처럼 맘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고서도 바로 문의하지 못하고 꼭 시간을 끌게 된다. 당근마켓 앱도 지웠다 깔았다 한 소심자(?)로서 한참 들여다 보고, 고민하고, 망설이고, 관심 목록에 저장만 해 뒀다가 하루 이틀 묵힌 후 그때까지도 안 팔렸으면 그제야 한숨 한 번 들이쉬고 내쉬고 한 후에 조심스럽게 채팅창을 여는 것이다. (만약 팔렸으면 바로 합리화에 들어간다. 아, 뭐. 역시 어쩔 수 없네. 팔렸구만!) 간단한 문장 하나도 고치고 또 고친 후에야 에잇! 하고 전송 버튼을 꾹 눌러버린다. 으악! 난 몰라! 채팅을 보냈어! 호들갑은 필수. (겨우 문제집 두 권 사는, 소심한 어른의 현실)


안녕하세요. 문제집 구매하고 싶어 연락드립니다. 가능할까요?

넵! 가능합니다! 언제가 괜찮으실까요? 


몇 번 메시지가 오고 간 끝에 바로 당일 저녁에 OOO역 근처 다이소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워후! 결정됐다. 아자! 최대한 알아보기 쉽게 괜히 검은색 모자 같은 것을 쓰고 나간다. 저 학생인가...? 이 학생?? 저분? 이 분? 조금 일찍 도착해 다이소로 들어가는 사람마다 괜히 한 번씩 눈길을 준다. 검은색 모자 쓰고 검은색 롱 패딩에 검은색 마스크 쓰고 있습니다...라고 쓰려다가 문자로만 보면 뭔 다크 나이트 출연자 같아서 지우고 평범하게 보냈다. 다이소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검은색 모자 쓰고 백팩 메고 있습니다. 조금 기다리려니 앳된 얼굴의 학생이 종이봉투를 들고 달려온다. 미리 준비해 둔 현금봉투(라고 쓰니 뭔가 두둑한 것 같지만 얇디얇은)와 현금을 깨느라 같이 구입한 초콜릿도 꺼냈다. 어엇! 안녕하세욥! 감사합니답! 이거 드세욥! 인공지능 로봇도 나보다는 말을 잘할 것 같다. 학생이 어머! 하더니 우와 감사합니다! 하고 초콜릿을 받아갔다. 공부할 때 먹는 초콜릿만큼 맛있는 게 없지. 당 떨어질 때 드세용. 


와, 필요한 문제집을 이렇게 저렴하게 구하다니! 기분이 하늘을 날 거 같아 얼른 다이소로 들어갔다. (이상한 전개) 싸게 잘 샀으니 그럼 어디 다시 또 저렴하고 좋은 물건들을 찾아 득템해 볼까나? 그냥 집에 돌아가는 것이 진정 현명한 소비이지만 뭐 인생이란 게 현명하게만 살 수는 없지. (현명하게 살아본 적 없는 타입). 그곳에서 왠지 필요할 것 같아 메모지를 사고, 수정 테이프를 사고, 정리 박스와 컵 두 개를 샀다. 집에 이미 열 개 정도는 되는 컵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왜 다시 컵을...? 모르겠다. 이유 따윈 없어. 그냥, 갑자기, 사고 싶어졌다! 정리 박스는 또 왜...? 몰라. 그냥 있으면 왠지 정리가 될 것 같아서. 집에 와서 정리 박스에 이것저것을 담아 보았는데 왠지 더 정신없어 보이는 효과를 얻었다. 오, 이렇게도 돈을 날릴 수가 있군!


어제는 또 간절기에 입을 트렌치코트가 하나 있었으면 해서 한 달 동안의 검색 끝에 간신히 하나를 구했는데, 드라이를 맡기러 갔더니 그 비용이 거의 물건 값에 달했다. 와우! 이럴 수가! 나처럼 현명한 소비자가 또 있을까?? 흑흑... 기껏 펼쳐 놓았는데 다시 들고 나오기가 죄송해서 그대로 맡겼다. 왠지 앞으로 일만 이천 번 정도 입지 않으면 속상할 것 같다.  


이럴 거면 안 사는 게 낫다 싶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하고 추억(?)도 쌓았으니 됐다. 그래도, 앞으로는 역시 책을 중심으로 사는 게 좋겠다는 다짐을 재차 함. 책은 고장 날 일도 없고, 그 값이 비싸다 한들 내용에 비하랴. 책 한 권에 들어간 세월과 내용의 깊이를 생각하면 값으로 매기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 싶다. 글을 쓰는 사이 빨래가 끝났다. 앱을 다시 지울까? 그냥 둘까?  빨래를 널며 생각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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