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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r 20. 2022

진심으로 후뢰시맨이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되고 싶었던 것에 관한 짧은 기록


어렸을 때 나는 진심으로 ‘후뢰시맨’이 되고 싶었다.

악의 무리로부터 위협받는, 불쌍하고 위태로운 지구와 지구인들을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뢰시맨들이 팔목에 찬 변신 시계가 너무나도 탐났기 때문이다. 엄마께서 사 주신 캔디캔디 전자시계가 있었지만 후뢰시맨들의 변신 시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캔디 시계는 시간만 알려 주지만 변신 시계는 무려 후뢰시맨으로 변신을 시켜 주지 않는가! 내가 후뢰시맨이 못 되는 것은 변신 시계 때문인 것만 같았다. 앗, 혹시 나도 '우주 멀리 아주 멀리' 지구 밖으로 사라져야 하는 걸까? 그래야 용사가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걸까? 아, 그건 좀 무서운데!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또 겁은 무지하게 많아서 우주 멀리 사라지는 나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지만, 그럼에도 저 다섯 명의 용사들 사이에 끼지 못한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사실 후뢰시맨에 빠지기 전 일곱 살 무렵에는 심형래 아저씨가 짱 멋있게 나온 ‘우뢰매’가 되고 싶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풍차 돌기가 안 되는 것 같아서(그리고 풍차를 돌려고 할 때마다 누군가 자꾸 지나가서) 그다음엔 ‘쾌걸 보이 아지’의 아지가 되고 싶었다. 아지는 아직 어리지만, 칼을 먹어치우는 개구리 장갑도 있고, 어른들 무리에 섞여 악당들과 용감하게 싸우는 정의의 사도였다. 당시 악당들은 왜 그리도 착한 사람들을 못 살게 굴었는지. 이미 번쩍번쩍한 궁전 같은 곳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도 힘없고 약한 자들로부터 늘 무엇인가를 빼앗지 못해 안달이었다. 나쁜 놈의 무리들! 아, 빨리 아지가 되어서 나쁜 사람들을 혼내 줘야지.  


그때부터 엄마께서 아침마다  시던 목수건을 풀러 어깨에 망토처럼 두르고 다녔다. 하지만 내가 아지가 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는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몰라주니까 괜히 하기가 싫어져  관두었는데  사이 얻은 것은 목감기뿐이었다.
 
그러다 후뢰시맨에 꽂혀 버린 것이다.
 
후뢰시맨은 풍차 돌기를 못해도 변신할  있어서 좋아. 후뢰시맨은 다섯 명이니까 힘을 합칠  있어서 좋아. 후뢰시맨은 나쁜 사람들을 무찌르고 착한 사람들을 도와주니까 좋아.
 
정말 어찌나 멋있던지 한시도 눈을   없었다. 특히 나는 파란 옷을 입은 3호를 좋아했는데, 1호나 2호보다 주목을  받는 것이 굉장히 분했다. 후뢰시맨이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인 줄도 모르고 진지하게 편지를  볼까도 생각했다. 나도 후뢰시맨에 끼워 주세요. 6호가 되고 싶어요. 색깔은 하늘색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후뢰시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나도 평범하게 자란 지구인이었으니까.
 
그래서  살이  나는 장래희망 조사에 담담하게 후뢰시...  아닌 ‘화가 글자를 적었다. 지금 보면 그것도 얼토당토않은 꿈이지만. 왜냐하면 나는 유치원  군청색에 미쳐  하나만을 주로 쓰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 오히려 화가가  만한 소질을 갖추었던 걸까? 하지만 유치원  선생님은 생활 상담을 하러  엄마께 '태주가 주로 군청색만 쓰네요. 아이들이  쓰는 색은 아닌데...'라고 전하셨고, 엄마는 얘가 어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하셨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심히 후뢰시맨이 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을 뿐이고. 그냥 좋아하는 색을 자주, 많이, 대부분의 곳에 쓰는, 후뢰시맨이 되고 싶은 아이였을 . 물론, 지금도 군청색 그러니까 짙푸른 프러시안 블루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색이다.


어린 시절의 꿈 따위는 까맣게 잊고 어느새 스무 살을 한참 넘은 나이가 되었을 무렵이던가. 어느 날 '세 바퀴'와 같은 어린아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에서 장래 희망으로 프린세스가 되고 싶다거나 변신 로봇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아이들을 보며 하하하 웃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엉뚱하고 귀여워서. 하하하 변신 로봇이 되고 싶대. 저게 뭐야. 어떻게 사람이 변신 로봇이 돼. 그건 만화인 걸. 아이들 너무 귀엽네. 하지만 돌이켜 보니 나 역시 후뢰시맨이 되고 싶어 안달하던 어린아이였구나. 이렇게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나야말로 지구 밖으로 사라지기는 싫지만 아무튼 후뢰시맨이 되어 지구를 지키고 싶었던 갈팡질팡 골때리는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날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넘어왔는지.

그러는 동안 우뢰매도, 아지도, 후뢰시맨도 되지 못한 채 그저 '어른 1'의 삶을 살고 있는 나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든다. 여전히 풍차 돌기를 못하고, 추운 날 목수건을 안 하면 감기에 걸리는 취약한 생명체로서 그럼에도 수십 년을 살아 여기까지 왔으니-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를 지키지는 못했지만, 나 자신 하나는 용케도 지켜낸 걸까. 여전히 수많은 지구인들을 지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내가 오늘을 살아냄으로써 나와 비슷한 결을 지닌 내 친구들과 가족, 주변 사람들의 삶을 어느 정도는 지탱해 낸 걸까.


그렇다면, 괜찮은 것 같다. 어린 날의 나를 보며 너무 쓸쓸해하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좋겠다. 비록 후뢰시맨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지키고는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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