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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r 30. 2022

나, 엄청난 꼰대일지도

3월 전국 모의고사 시험감독 경험에 관한 짧은 기록


엊그제 학교를 돌아 나오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와씨... 나, 엄청난 꼰대일지도.


지난주 목요일, 3월 전국연합 학력평가가 있었다. 내가 맡은 학년은 온라인 수업 중이었지만 그날은 아무래도 시험인지라 전면 등교로 잠시 전환해 등교 가능한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왔다. 그럼에도 듬성듬성 빠진 자리가 많았다. 어떤 반은 절반 가까이 비어 있어 마음이 심란하기만 했다. 그래도 학교는 학교이고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쉬는 시간만 되면 복도가 와글와글 달아올랐다. 종이 치면 아쉬운 듯 곡소리를 내며 교실로 밀려들어가는 아이들 모습에 슬몃 웃음이 났다.


모의고사 시험감독은 처음이라 마치 수능날이라도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보통 30 정도만 일찍 가면 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라는 병을 깊이 앓고 있어 나는 그날도  시간 일찍 학교에 도착했다. 수험생보다도 일찍 도착한 ... 아무튼 교무실에 도착해 시험지 정리를 돕고 틈틈이 감독의  일들에 대해 새겨 들었다. 아주 특별한 사항은 없었다. 예비종이 울리면 중앙 방송에 따라 입실해 아이들을 자리에 앉히고, 재적 수와 결시생 , 응시생 수를 확인한  문제지와 답안지 수를 헤아려  나누어 주면 된다. 학생들이 학교 번호, 이름, , 번호와 필적란을 제대로 표기했는지 확인하며 일일이 감독관 도장(혹은 싸인) 찍는다. 답안이 틀렸을 경우, 수정 테이프를 사용할 수 있으므로 중간에 혹시 손을 드는 학생이 있으면 달려가 수정 테이프를 건네거나 아예 답안지를 교체하도록 한다. 이외에 여러 불시의 상황을 그려 봤으나 예상 밖의 일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가장 어려운 일은 역시 오랜 시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오전 수업만 있어 감독도 오전만 했다. 그런데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힘들었다. 일단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고, 혹시나 내가  곳에 시선을 둔답시고 특정 학생을 줄곧 바라보기라도 하면 부담이 될까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고 고개를 마냥 숙이고 있을 수도 없어서 결국 짜낸 '묘안' '공허한 시선'  곳에 던지는 것이었다. CCTV 움직이듯 180 위에서 고개도 가끔가끔 돌려주며. 그래서 그런가? 묘하게도, 시험이 진행되는 동안  마음 자체가 점차 공허해졌다.


1교시 국어.

영어가 절대평가로 바뀌고 난 후 여타의 과목들에서 큰 변별력을 찾기가 어려워지자 국어 쪽으로 그 변별의 힘이 실리고 있다는 평을 들은 적 있다. 나날이 지문은 길어지고, 문제는 어려워지는데 문해력은 낮아져 국어와 관련된 사교육 열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도 보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냥, 시험을 보고 있는 아이들의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잘 표현은 되지 않는데 그냥 '착잡했다'.


왜 그런 걸까.


그래도 국어는 1교시라 그런지 아니면 뭐라도 좀 읽고 생각해 볼 수 있어 그랬는지 많은 아이들이 미리부터 포기하지는 않고 끙끙대며 푸는 모습을 보였는데, 문제는 2교시.


2교시 수학.

나도 수포자 출신이다. 그래서 시험지를 앞에 둔 막막한 마음을 조금은 알 수 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까만 것은 글씨인데 그 많은 시간(수학은 100분이다) 동안 대체 뭘 하고 있어야 할까. 그래도 아예 1번부터 펜을 놓고 잠을 청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풀 수 있는 데까지는 어떻게든 손을 대고 안 되면 펜이라도 굴려가며 뭐라도 끼적였던 것 같은데...! 열 명 가까이 결석한, 휑한 교실에서 아이들은 초장부터 쿨쿨 잠을 자고 있었다. 까맣게 빛나는 탐스런 머리카락들을 고이 책상 위에 누이고 세상 불편한 자세로 잠을 청하는 아이들. 자세만 불편했겠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아닌가? 내가 그런 건가?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리 보이는 건가?


아니, 그래도 어떻게 아예 시도조차 안 하고 잘 수 있을까? 모두 수시로 가나? 아니, 수시도 수학은 있는데? 수시야말로 내신을 잘 챙겨야 하고, 그러자면 어떻게든 공부는 해 봐야 할 텐데?  수시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아니, 인생에서 대학이 다가 아니기는 한데 그래도 대학 생각이 있으니까 지금 이 모의고사를 보는...


복잡한 마음으로 눈을 굴리며 생각을 거듭하다가 허, 하고 내적 웃음이 터졌다. 하, 지금 이런 시국에 공부가 다 뭔가. 시험이 다 뭔가. 뭐, 어쨌든 모의고사이고 한번 해 본다는 데 의의가 있는 거지... 하면서도 아니, 모의고사라도 어쨌든 연습이 쌓여야 실전에도 대비가 되는 것이고 아무리 수능 비중이 예전에 비해 줄었다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능은... 어쩌구 저쩌구...


아이들의 말간 정수리를 보며 전직 입학사정관이자 현직 시간강사 아니, 시험감독인 나는 애타게 아이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얘들아, 그래도 일어나 . 시험을 보러 여기까지 왔으면 그래도 뭐라도, 아니 그냥  문제라도 일단 풀어 . 아니 찍어 . 아니 그냥 백지로 내지만 . 시간이 아깝잖니.  수시로  건데요?  수능   건데요?  알아. 근데 인생이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는 않더라고. 내가 장담한 길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더라고. 전혀 중요하지 않을  같던 순간이 의외로 나한테 기회를 주거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더라고. 그러니까, 얘들아 제발 일단 잠에서  깨고 일단 뭐라도 ... 뭐라도 ... 뭐라도... !


당연히  밖으로 소리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애타게 속으로만 외쳤을 . 그날 터덜터덜 교문을 나서며 힐끗 뒤를 돌아봤을 , 점심을 먹고 나온 아이들  무리가 운동장 구석에서 농구를 하며 봄볕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 학교가 시험만을 위한 곳이 아니지. 공부만을 위한 아니지. 그래, 각자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집중해서 하고,  과정에서 자신만의 배움을 가지고 나가게 되는 거지. 나도 그랬고, 너희들 앞에  수많은 선생님들도 아마 그랬을 테고.


한숨을 크게  번  쉬고 씩씩하게 걷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것이다.


이렇게 꼰대가 되어가는 걸까.


언젠가 꼰대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러다가 어디선가 '꼰대'는 나이가 아니라 공감 능력의 문제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순간, 내가 아이들의 삶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낮아진 것은 아닌가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멀리서 그저 바라보며 이래야지, 이래야 학생이지, 청춘이지 어쩌구 하며 혼자만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부모 세대만큼이나 어렵고 복잡한 십 대의 삶에 대해, 요즘의 근황에 대해, 이런 날들에 대해 방학이 다가오기 전 가끔가끔 묻고 듣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먼저 가져야겠다. 그러려면 일단 아이들이 학교에 와야 하는데. 새삼 코로나가 원망스럽다. 언제나 망하나, 이놈의 코로나는! 아주 쫄딱 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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