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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pr 04. 2022

이제 그곳은 얼마나 시차가 날까요

다시 내 마음속으로 들어온 한 사람을 위한 짧은 기록




호세인 바이가 세상을 떠났다.


내 좋은 친구, 삼촌, 오빠 때로는 아빠. 스물다섯 그해 아무것도 모르고 NGO 활동가가 된 나를 살뜰히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방글라데시 삼촌이 세상을 떠났다. 왜 이 세상은 좋은 사람들을 이렇게도 일찍, 빨리, 아무 기별도 없이 훌쩍 데려가는 것일까.


우리는 서울 동대문구에 있었던 이주민 지원 시민단체의 한국어 교실 담당자와 학생으로 만났다. 말이 한국어 교실이지 사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안부를 묻고 맛있는 것을 나누어 먹고 함께 어울려 시간을 보내며 고된 '한국살이'를 달래던 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새로 온 담당자 태주라고 해요. 꾸벅 인사를 하자 그곳의 터줏대감이었던 호세인 바이는 환하게도 웃었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 벌써 여러 번 바뀐 담당자. 그럼에도 호세인 바이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맑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 호세인 바이 은평구 사시죠? 태주도 그 근처에 살아요. 동료가 말하자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호세인 바이가 이내 반갑게 웃으며 내게 건넸던 첫마디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동네주민, 안녕하세요.


그 후로 나는 언제나 호세인 바이의 동네주민이었다. 의욕만 앞섰지 모든 것에 서툴러 실수도 많이 하고 자주 흔들리던 나를 꽉 붙들어 주었던 호세인 바이. 나보다 스무 살이 많았던 호세인 바이는 고국에선 약사였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으로 왔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 십 년이 넘도록 오랜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그는 善人의 풍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인종, 나이, 성별을 떠나 참으로 깊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 특별함 때문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고, 국가를 떠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 마디로 모든 이의 리더이자 좋은 친구였다. 그는 한국에 와서 작은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필통, 동전지갑 같은 소품들에 지퍼 다는 일을 주로 했다. 이거 가져요. 가끔 동네에서 만나면 꼭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 주던 사람. 때로는 작은 동전지갑, 때로는 고운 천 필통, 또 때로는 돗자리. 어머, 이건 뭐예요? 동네주민 쓰라고 주는 선물이에요. 오늘 무슨 날이에요? 아무 날도 아니니까 주는 거예요.  


우리는 한국어 교실이 쉬는 주말이면 가끔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고, 나보다 서울 지리를 더 잘 알았다. 나는 아직 가 본 적 없는 곳들을 많이 알고 있어 그 무렵 쏘다닌 곳들만 해도 열 손가락을 채우고 남았다. 시청 스케이트장도, 하늘공원도 모두 호세인 바이 덕분에 처음 가 본 곳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진을 찍었고, 호세인 바이는 '행복하세요, 동네주민'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에이, 왜 멀리 갈 사람처럼 말씀하세요. 그러면 호세인 바이는 그냥 씩 웃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당시 만났던 이주민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신분이 불안정했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는 이주민 정책에 냉정한 선을 그었고, 조금이라도 체류가 지체되면 토끼 몰이식으로 언제든 붙잡아 강제로 추방했다. 충분히 이해했다. 어쨌든 약속된 시간이 지난 사람들은 어떻게든 감당해야 하는 국가 정책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방식이 너무 냉정하고 가혹해 자주 아프고 괴로웠다. 그 때문에 나는 여러 번 눈물을 뿌렸고, 아무런 기별 없이, 어떠한 기약도 없는, 갑작스런 이별들과 자주 마주해야 했다. 다음 주에 봐요, 하고 헤어진 사람을 어쩌면 평생 동안 못 보게 된다는 것이 스물다섯의 나에게는 무척 괴롭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호세인 바이는 2010 고국으로 떠났다. 그때 나는  이상 NGO 활동가도, 동네주민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동네주민으로 불렀고, 그대로 그를 보낼  없어 떠나기 이틀  집으로 초대해 마지막으로  끼를 함께 먹었다. 그날 호세인 바이는  시간이 걸리는 우리 집까지 찾아와 내가 궁금하다고 했던 '뽀르따' '밀크티'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부엌에서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고 굽고 차를 타는 동안 나는 내내 호세인 바이에게 중얼거리듯 약속을 했었다. 제가  갈게요. 호세인 바이, 방글라데시  갈게요.    


호세인 바이가 떠나던 날. 함께했던 동료들과 친구들이 다 같이 모여 배웅했다. 이제 저 문이 닫히면 호세인 바이를 한참 동안 못 본다. 일렁일렁. 뭉글뭉글. 눈앞의 공항 게이트가 흐려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하는 동안 호세인 바이는 작은 짐 몇 개를 이고 지고 환하게 웃으며 '저 너머'로 사라졌다. 크게 손을 흔들며, 예의 그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얼굴로 그저 밝게 웃으며.




그렇게 호세인 바이를 보내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2016년의 어느 날 나는 문득 호세인 바이에 대한 글을 썼었다. 먼 나라이기에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했지만, 잊을 만하면 꼭 전화벨을 두 번 울리고 끊는 그만의 인사법으로 안부를 전하곤 했던 호세인 바이. 처음에는 내가 느려서 전화를 놓치는 줄 알았는데, 그건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는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면 그렇게 두 번 벨을 울리고 끊어 그 순간에 떠오른 상대에게 먼 곳에서의 안부를 전해 오곤 했다.


“제가 전화를 두 번 울리고 끊으면 그 순간에 동네주민을 생각했다는 뜻이에요.”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방글라데시가 어디에 있는지, 수도는 어디이고 국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하나도 몰랐다. 행복 지수가 높은 걸로 유명한 나라. 그라민 은행이 있는 나라. 


- 아니, 사실은 그냥 이 세상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


그런데 그를 만나고 내게 방글라데시는 꼭 가고 싶은, 아니 가야만 하는 나라가 되었다. 함께 한 시간은 겨우 2년 남짓. 그는 한국으로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였고, 나는 그의 한국어 공부를 돕는 시민단체 활동가였다.


- 아니, 사실은 그가 나를 도왔다.


깊은 눈을 가진 그는 마음은 더 깊고 넓어 아직 어렸던 내게 여러 가지들을 가르쳐 주었다. 천천히 걷는 법, 하늘빛을 관찰하는 법, 새소리를 듣는 법 그리고 이따금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때 망설임 없이 표현하는 법.


- 그러니까, 그리운 이를 위해 전화를 두 번 울리는 법.


이 짧은 글을 쓰면서도, 나는 언제고 그가 있는 방글라데시로 가는 꿈을 꾸었다. 따끈한 뽀르따를 같이 만들어 먹고, 그의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직 어리다는 막내아들에게는 어떤 장난감을 줄까 고민도 해 보고. 그러나 이제는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럴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다 '영원히 놓쳐 버리는' 사람이었다. 작년 말 호세인 바이로부터 갑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깜짝 놀라 얼른 연락을 하니 이제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 몸 한쪽이 갑자기 불편했다고 호세인 바이는 건강해 보이는 사진 한 장을 보내며 여전히 웃었다. 그때는 몰랐다. 갑작스런 뇌출혈로 위험했다는 사실을. 오래 기도했고 자주 연락했고 이따금 영상 통화도 했지만, 그 안에서 그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웃으며 자신보다는 내 안부를 걱정하고 궁금해했다.


호세인 바이.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여전히 마음 아프고 괴로운 날들이 있지만, 당신께서 울려 주신 전화벨 두 번으로, 맛있는 밀크티와 뽀르따로, 잘 지내고 있어요.


2월 말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하고 또 보자며 웃으며 인사를 했는데, 3월 중순 그는 자신의 생일을 며칠 앞둔 봄날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몰랐다. NGO 동료들과 오랜만에 만난 줌 미팅 자리에서 침통해진 분위기를 읽고도 그것이 호세인 바이의 부고 때문인 줄은 몰랐다.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줌 미팅의 화면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그날 밤 우리가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던 메시지만 계속해 읽으며 여러 문장들을 썼다 지웠다. 보내면 가닿는 세상에 이제 그가 없다는 사실이, 다시는 전화를 두 번 울려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아무 날이 아니어도 연락을 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무거워서 내내 나는 잠들지 못하고 서성였다.




2009년 봄, 나의 스물여섯 번째 생일날에 호세인 바이는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했었다. 생일인데 무엇을 갖고 싶으냐는 말에 괜찮다고 해도 꼭 하나를 주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그가 이듬해 한국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함께 영풍문고 책 사이를 거닐다가 불현듯 그러면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을 사 달라고 했다. 그는 기형도 시인이 누구인지, 그 책이 무엇인지 하나도 모르면서 아주 좋다고, 동네주민이 원하는 책을 살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다. 나도 기뻤다. 호세인 바이. 원래 책을 선물할 때는 주는 사람이 맨 앞에 기념으로 작은 편지를 써 주는 거예요. 영풍문고 안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시켜 놓고 호세인 바이는 고민 끝에 이렇게 써 주었다.



태주 씨

생일 축하드립니다.

행상 행복해세요.

꼭 글을 쓰세요.

                                   호세인



호세인 바이.

이 글 보고 계시죠. 저는 호세인 바이 덕분에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어요. 잘 안 되는 날도 많고, 힘든 날도 있지만 그래도 쓰고 있어요. 여전히 불안하고 자주 흔들리면서도 계속해서 쓰고 있어요. 뽀르따와 밀크티 만드는 방법도 아직 잊지 않았어요. 제게 주고 가신 시계와 동전지갑도 여전히 제 곁에 남아 있어요. 깊숙이 넣어 두었던 시계를, 가시고 나서야 꺼내어 책상 위에 두었어요. 내일은 시계 밥을 주고 방글라데시의 시간으로 맞출 참이에요. 항상 세 시간 정도 차이가 났었죠. 밤 10시 무렵 통화를 하다가 아직 식사 전이라고 하시면 저는 늘 잔소리를 하고요. 너무 늦게 저녁을 드시면 안 된다고. 그러면 호세인 바이는 여긴 아직 7시예요 하며 하하하 웃으셨죠. 이제 그곳은 얼마나 시차가 날까요. 그 사이를 건너려면 얼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서 혹은 방글라데시에서, 어디에서든 다시 마주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늘 한국에 다시 오고 싶어 하셨죠. 이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언제든 와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호세인 바이.

저는 30대를 지나며 몇 번이나,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묻어야 했는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호세인 바이처럼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살 걸 그랬어요. 호세인 바이의 그 넓은 마음을 진작에 닮을 걸 그랬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 마음속에 들어와 살게 될 줄 알았다면.


비좁지 않도록 제가 마음을 더 넓힐 테니까 오래오래 머물다 가세요. 다시 만나는 날까지 함께해 주세요. 한 번도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고맙고 감사했어요. 오랫동안 친구가 되어 주셔서 저희 곁에 머물러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동네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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