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 여성의 권리와 톨스토이의 시각
이건 악순환이요. 여성은 교육이 부족해서 권리를 박탈당하는데, 교육의 부족은 또한 권리의 부재에 의해서 비롯됩니다. 잊지 말아야 것은, 여성의 예속은 너무나 방대하고 오래된 일이라 우리는 종종 그들을 우리와 구분하는 저 깊은 어둠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말했다. 권리라고 하셨는데,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페스초프가 입을 다물기를 기다렸다가 얘길 꺼냈다. 그게 배심원, 지방 자치회 의원직, 지방 관청장직에 오를 권리, 공직자나 국회의원이 될 권리를 뜻하는 - 당연하지요. 하지만 여성이 예외적이고 드문 경우로서 그러한 직위를 맡을 수가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당신은 <권리>라는 표현을 잘못 사용하신 겁니다. 의무라고 해야 더 옳을 겁니다.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배심원이나 지방 자치회 의원, 전신국 관리 같은 직무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의무를 수행한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의무를 찾고 있다고 해야 옳을 테고, 또한 그래야 전적으로 합법적일 겁니다. 또한 남성 일반의 일을 돕고자 하는 그들의 그러한 바람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지요. 전적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가 말했다. 문제는 여성들에게 그러한 의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느냐 하는 점이겠지요.
<안나 카레니나> 중
톨스토이와 ‘여성 문제’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상류층 사회를 배경으로 여성의 권리와 역할에 대한 당대의 고민을 담고 있다. 특히 작품 속에서 여성 인물들은 교육 기회, 사회적 지위, 결혼과 가정 등에 관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며, 이는 19세기 러시아에서 활발했던 이른바 “여성 문제” 논쟁과 맞닿아 있다. 19세기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교육과 권리가 어떻게 논의되었고, 이 논의가 유럽 다른 국가들의 여성 담론과 어떻게 비교되는가? 톨스토이가 이러한 논쟁을 <안나 카레니나>에서 어떻게 표현했으며, 그의 입장은 무엇이었을까?
‘여성 문제’의 대두와 교육권 논의
19세기 중엽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1861년 농노해방)을 전후로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일었다. 이러한 사회개혁 논의 속에서 여성해방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으며,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과 귀족 여성들이 이른바 “여성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1850년대 후반 크림 전쟁 이후 검열이 완화되자, 시인 겸 언론인 미하일 미하일로프가 1858년부터 잡지 <동시대인>에 일련의 논설을 발표하며 여성 권리 옹호에 나선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프랑스 작가 미슐레와 프루동 등이 '여성은 선천적으로 열등하다'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하며, 여성에게 교육 기회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역설했다. 실제로 1860년 미하일로프는 존 스튜어트 밀과 해리엇 테일러 밀의 1851년작 <여성의 참정권>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소개하기도 했다. 비록 참정권 자체는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는 현실적 의미가 없었지만, 이 글은 여성의 해방을 정치·사회 전반의 권리 확대와 연계 짓는 서구의 사상을 러시아 지식사회에 전달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여성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여성의 사회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당시 러시아 여성들은 법률상 일부 권리를 갖고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가부장적 제약을 크게 받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가 1804년 나폴레옹 법전으로 기혼 여성의 재산권을 남편에게 종속시켰던 것과 달리, 러시아에서는 이미 18세기부터 기혼 여성도 자신의 재산을 소유·관리할 법적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법적 권리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영향력은 막강하여, 아버지와 남편이 아내와 자녀를 엄격히 지배하는 관습이 여전했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가족 내 남성 가장의 전제적 권력이 국가 차원의 전제 군주제 및 농노제와 상응한다고 보았고, 많은 개혁론자들이 전통적인 가족 가치관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여성의 교육 기회 확대와 가정 밖에서의 자율성을 높이는 것이 시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도 퍼져나갔다. 다시 말해, 여성 지위 향상은 단순한 성별 문제를 넘어 러시아 사회를 근대화할 것인가에 대한 핵심 쟁점의 하나였다.
여성 교육 운동과 사회 진출 노력
1850년대 후반부터 1870년대에 걸쳐 러시아 여성들은 교육권 신장과 사회참여를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859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귀부인들이 주축이 된 여성 상호부조 단체(여성들의 숙소 제공과 재봉일 교육 등을 통해 빈곤 여성 돕기)가 결성되었고, 이를 이끈 나데다 스타소바, 마리야 트룹니코바, 안나 필로소포바 등은 여성 교육 기회를 늘리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섰다. 이들 “트로이카”로 불린 여성운동가들은 1867년부터 대학에 여성강좌 개설 청원을 준비해 400명 이상의 여성 서명을 받아냈다. 이 청원서는 1868년 차르에게 제출되었으나, 교육부 장관 드미트리 톨스토이 등 보수 세력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톨스토이 장관은 “여성들은 어차피 결혼하면 교육을 그만둘 것”이라며 여성 고등교육에 반대했고, 청원 참여자들을 “유행을 따른 어리석은 양떼”라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다만 여론의 압력으로 공개강좌 형태로 남녀 혼성 수업을 일부 허용하자 예상외로 여성 수강생이 쇄도하여, 정부도 변화를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1869년 가을 러시아 정부는 제한적이지만 여성들을 위한 고등 교육 과정을 공식 허가하였다. 이듬해 1870년 1월 시작된 강좌에는 화학, 역사, 해부학, 동물학, 러시아 문학 등 고등 수준의 과목들이 포함되었고 약 200여 명의 여성이 수강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코스 (Vladimirskii Courses)”로 불리며 큰 호응을 얻었으나, 1875년 보수 여론의 압력으로 일시 폐지되었다. 여성 교육 운동가들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1878년 페테르부르크에 보다 상설적인 “베스트 고등여성강좌”가 설립되어 여성들에게 대학 수준의 교육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이 고등여성강좌는 러시아 최초의 여성 고등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지만, 급진 사상을 공부한 일부 여학생들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결국 강좌는 1886년에 한때 폐쇄되고, 이후 1889년 보수적인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 정부 통제 하에 재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여성 고등교육의 물꼬는 향후 러시아 여성들이 전문직과 사회활동에 진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한편, 여성의 사회적 역할 확대를 추구한 움직임도 나타났다. 일부 진보적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교육권, 시민적 자유와 평등, 더 나아가 여성 참정권까지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당시 러시아의 자유주의 기반이 취약하여 이들의 주장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한편 급진적 청년층 사이에서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1863)에 등장하는 독립적인 여성상에 영향을 받아 현실에서 새로운 여성상을 구현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예컨대 일부 여성은 위장결혼을 통해 가부장적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얻고, 해외 유학으로 전문 교육을 받는 길을 택했다. 또 다른 이들은 민중에 대한 의무감으로 “나로드(민중) 속으로” 들어가 농촌 계몽이나 사회주의 인민주의 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러시아 여성 해방 운동이 단지 성별 권리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혁신 운동과 맞물려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870년대 이후 소피야 페롭스카야, 베라 자술리치 등 여성 혁명가들이 탄생하여 정치 테러나 혁명 운동에 가담하기까지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부르지는 않았다. 이는 당시 러시아 급진 운동 진영에서 계급 혁명이 우선시 되며 여성해방 논제는 부차적이거나 금기시되는 분위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세기 러시아의 여성 권리 논쟁은 온건한 교육·복지 중심의 계몽주의적 흐름과 급진 사회변혁 운동 속 여성의 자기 해방 추구가 공존하면서 진행되었다.
서유럽의 ‘여성 문제’와 러시아의 특수성
19세기 유럽 각국에서도 산업화와 시민의식 성장에 힘입어 여성의 지위에 관한 “여성 문제” 논쟁이 활발했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토론이 지식인 사회와 언론을 달구었으며, 교육 기회의 확대, 재산권 및 법적 권리, 결혼 제도의 개혁 등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여성들은 참정권, 산아 제한(생식권), 직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권리 신장을 요구하며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1860년대 이후 여성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시작되어 19세기말 서프라제트 운동으로 발전했고, 여성 고등교육도 1840~50년대에 사립 형태로 시작되어 1869년 케임브리지 대학 이턴 컬리지 등 여성 대학이 설립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나폴레옹 법전 아래 제한되었던 기혼 여성의 재산권 개선 움직임과 함께 1870년대부터 여성 교육에 대한 요구가 커져,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국립 여학교(Lycée)가 설립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전반적으로 서유럽의 여성운동은 초기에 남성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와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는 러시아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가들이 제기한 논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와 서유럽의 여성 담론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정치적 권리 측면에서 서유럽 여성들은 남성에게 일부라도 부여된 선거권 확대를 중요한 목표로 삼았으나, 러시아는 19세기말까지 입헌제나 선거 제도가 부재했기 때문에 참정권 논쟁이 현실화되지 못했다. 대신 러시아에서는 교육과 직업을 통한 여성의 자아실현과 가부장제 타파가 상대적으로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또한 법적 권리 면에서 러시아는 재산권처럼 일부 영역에서 서구보다 진보적인 면이 있었지만 , 일상생활의 관습은 오히려 더 전통적이고 가족 중심적이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서유럽 중산층 사회에 널리 퍼져 있던 “가정의 천사”와 같은 엄격한 성별분업 이데올로기가 러시아에도 존재했지만, 러시아 지식인들은 전제정과 사회후진성의 원인을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 찾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러시아의 여성해방 담론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사상과 결합되기도 했고 , 서구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 그럼에도 러시아 여성운동가들이 서유럽 사상가들의 저술(존 스튜어트 밀 부부의 글 등)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 러시아와 유럽은 여성 문제를 놓고 상호 자극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다시 말해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여성 교육·권리 논쟁은 동시대 유럽의 보편적 여성해방 운동의 흐름 속에 위치하면서도, 전제정치와 급격한 사회 변동이라는 러시아 특수성이 가미된 양상을 보였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당대의 여성 문제 논의를 <안나 카레니나> 속 여러 인물과 장면을 통해 반영했다. 소설에는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직접적으로 토론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진보적 견해와 보수적 견해가 극명히 대비된다. 예컨대 한 저녁 만찬 자리에서 남성 귀족들이 “여성의 교육 문제”를 두고 벌이는 토론 장면이 있다. 여기서 페스초프라는 진보적인 지식인 캐릭터는 여성도 교육을 받아 자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여성은 권리를 얻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지만, 정작 교육받지 못하는 것은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여성 억압의 악순환을 지적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다. 이에 대해 셰르바츠키 공작(키티와 돌리의 아버지)은 비아냥과 조롱으로 응수하며, 여성의 역할은 가정과 육아에 국한된다는 당대 보수적 인식을 드러낸다. 그는 결혼하지 않고 직업을 가진 여성(발레리나 등)을 예로 들며 페스초프의 주장에 반박하고, 스티바 오블론스키(안나의 오빠, 돌리의 남편)조차도 페스초프 편을 드는 모습을 보여 논쟁이 가열된다. 심지어 토론을 지켜보던 돌리도 끼어들어 한마디 하는데, 그녀 역시 평소에는 순종적인 아내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여성의 현실에 대한 솔직한 생각을 표출한다. 이 장면은 19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여성 교육에 대한 찬반 여론이 어떠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논쟁적 대화를 통해 여성에게 교육과 독자적 직업이 필요하다는 진보론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전통론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이 당대의 “여성 문제”를 직접 목격하도록 하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 자신도 작품 속에서 여성의 권리와 역할에 관한 고민을 직접 체현하는 인물이다. 안나는 결혼 후 남편 카레닌과의 관계에서 애정과 존중의 결여를 느끼며 고통받지만, 당대 관습은 그녀에게 이혼이나 별거를 통한 자율적 선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안나는 브론스키와의 사랑을 찾아 가정 밖으로 나오지만, 그 대가로 사회적 지위와 평판을 송두리째 잃는다. 소설 후반부에서 안나는 자신이 처한 처지를 두고 “아내요, 노예요, 이 세상 어떤 노예도 지금 내 처지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을 거예요”라고 토로한다. 이는 남편과 결혼 제도에 종속된 기혼 여성의 현실을 노예에 비유한 강렬한 표현으로, 여성의 법적·경제적 종속 상태에 대한 톨스토이의 비판의식을 반영한다. 브론스키와 함께 할 때조차 안나는 자신의 존재 기반이 불안정함을 느낀다. 그녀는 경제적으로 연인에게 의존해야 하는 위치에 놓였고, 브론스키의 사랑마저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달려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안나는 임신으로 외모가 변하거나 아이가 늘어날수록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브론스키도 안나가 첫 만남 때와 비교해 “모든 면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예전보다 못해졌다”며 실망하는 기색을 보인다. 이러한 묘사는 당대 여성들이 사랑받기 위해 요구받는 젊음과 아름다움의 억압, 그리고 임신과 출산의 부담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자신의 삶과 건강, 그리고 브론스키와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통제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산아 조절의 가능성을 시사한 이 대목에 대해, 돌리는 처음엔 크게 놀란다. 일곱 아이의 엄마인 돌리는 한 번도 임신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충격을 받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한때 자신이 꿈꾸었던 바”였음을 깨닫고 안나의 지혜에 감탄한다. 돌리는 안나의 결정에 대해 “나라도 같은 입장이라면 그렇게 했을지 몰라”라고 내심 인정하며,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지 않을 권리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이러한 대화와 내면 묘사를 통해 톨스토이는 가정주부 돌리의 입을 빌려 여성의 생식권과 자기 결정권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돌리는 작품 곳곳에서 어머니로서의 고충을 토로한다. 그녀는 남편 스티바의 반복되는 바람기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려 애쓰지만, 정작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출산과 육아로 인한 희생뿐임을 한탄한다. 돌리는 “설령 다 잘 돼서 아이들을 무사히 다 키워냈다고 해도, 고작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 만드는 정도일 텐데, 그거 얻자고 이 고생에 일생을 다 바쳤구나!”라며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심지어 돌리가 농촌의 한 여성 농민과 나눈 대화에서는, 그 농민 여성이 “아기를 낳았지만 하느님이 데려가셔서 다행이다, 살아 있었어도 성가실 뻔했다”라고 담담히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듣고 돌리는 충격을 받는데, 이 장면을 통해 모성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깨지고 자녀 양육의 무게에 짓눌린 여성들의 현실이 드러난다. 요컨대 톨스토이는 안나, 돌리, 키티 등 서로 다른 처지의 여성 인물을 통해 당시 여성들이 겪던 여러 문제 - 사랑과 독립에 대한 갈망, 결혼 제도의 구속, 출산과 양육의 부담 - 을 폭넓게 보여준다. 특히 안나와 돌리의 모습은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희생을 부각하면서, 한편으로 그런 희생 없이 자기 삶을 살고자 한 여성의 비극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는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를 단순한 불륜 소설이 아니라 당대 여성 문제에 대한 사회소설로 만들고 있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나타나는 여성 문제에 대한 묘사는 톨스토이 자신이 이 논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이러한 여성의 권리와 교육에 대한 논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사실 톨스토이의 관점은 작품 속에 복합적으로 드러나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엇갈린다.
한편으로 톨스토이는 가정과 결혼의 중요성을 옹호하는 듯한 보수적 면모를 보인다. 소설에서 안나는 혼인 질서를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따른 대가로 사회적 응징을 받고 목숨까지 잃는다. 반면 키티는 전통적인 정조와 가정적 덕목을 지닌 인물로서 레빈과 행복한 결혼을 이루고 안정된 삶을 누린다. 키티는 헌신적인 아내이자 어머니로 이상화되며, 마지막 장면에서도 남편과 아이 곁에서 가정의 행복을 만끽한다. 이러한 두 여성의 대조적 운명은 자칫 보면 톨스토이가 전통을 지키는 여성을 보상하고, 규범을 어긴 여성을 처벌한 것처럼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은 안나의 비극을 혼외정사를 저지른 여성에 대한 도덕적 심판으로 간주해 왔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톨스토이는 여성이 가정과 사회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당대의 질서를 옹호한 듯 보이며, <안나 카레니나>는 보수적 교훈극이 된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의도와 메시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작품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톨스토이는 안나에게 상당한 동정과 공감을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안나의 불행을 그리는 방식이 단순한 응징이라기보다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부각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안나는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당했던 과거, 그리고 정숙을 강요하는 위선적인 상류사회로부터 받은 압박 등 여러 맥락이 상세히 제시되어, 독자가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고 연민을 느끼도록 유도된다. 실제로 작중에서 돌리는 안나의 선택에 대해 “그녀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그저 살고 싶었던 것뿐이다. 아마 나라면 나도 똑같이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안나를 두둔한다. 이러한 돌리의 대사는 작중 인물을 통해 직접적으로 안나의 편에 서는 목소리를 전달한 것으로, 톨스토이 자신의 동정 어린 시선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소설은 돌리의 고된 현실이나 안나의 절망을 통해 당대 여성 억압의 문제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톨스토이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출산으로 인한 육체적 손상, 경제적 무력감, 사회적 고립)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여성해방론자들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일부 연구자는 톨스토이가 러시아 여성문제 논쟁의 최전선에 선 급진적 페미니스트에 가깝다고까지 평가하며, <안나 카레니나>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성 옹호 소설로 해석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관점이지만, 최소한 톨스토이가 단순히 여성의 탈선을 비난하려고 이 작품을 쓴 것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욕망을 추구할 때 사회가 어떻게 가혹하게 억압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려 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톨스토이 자신의 사상적 발전을 보면, 그의 여성관은 시간이 지나며 더욱 비판적이고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안나 카레니나> 집필 이후 톨스토이는 점차 기성의 결혼 제도와 성적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는 사상에 심취했는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결혼을 “합법화된 매춘”에 비유하고 부부관계를 일종의 노예상태로 규정하기까지 했다. 1890년대에 발표한 중편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는 성적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여 극단적인 순결주의를 주장하고, 인류가 금욕을 실천하다 멸종하더라도 도덕을 지켜야 한다는 극단적 메시지를 던졌다. 이러한 후기 사상은 <안나 카레니나> 당시보다 훨씬 나아간 급진 성찰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안나 카레니나>자체는 이혼한 여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식의 다소 보수적인 결말 암시를 담고 있지만, 그 이후 톨스토이의 행보를 보면 당대 가족제도에 대한 깊은 회의와 도덕적 이상주의로 치달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톨스토이는 전통적인 가정의 가치와 인도주의적 양심 사이에서 평생 갈등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행복한 가정을 인류 삶의 근본적인 진리로 보았으나(<안나 카레니나>의 레빈처럼), 동시에 그 가정에 내재한 위선과 불평등을 예리하게 포착하여 비판했다. 이러한 모순된 시각 덕분에 <안나 카레니나>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복합적 작품이 되었고, 독자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소설을 해석해 왔다. 톨스토이 본인은 이 소설에 대해 직접 이론적으로 입장을 밝힌 적은 없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는 문제의식과 이후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여성 교육과 권리 향상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이를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와 번민을 거듭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가부장제 사회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짚었지만, 해결책에 있어서는 기존 제도의 개선보다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각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는 현대적 페미니스트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성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한 작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결론: 문학에 비친 시대 논쟁의 의미
<안나 카레니나>는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여성의 권리와 교육에 관한 논쟁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에서 진행되던 여성 문제 논의를 소설 속 인물들의 삶과 대화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당대의 사회적 쟁점을 독자들이 생생히 느끼도록 했다. 러시아 여성들의 교육운동과 해방 노력은 유럽 다른 나라들의 여성운동과 맥을 같이 했으며, 톨스토이는 이 국제적 흐름 속에서 러시아 현실의 특수성 - 가부장적 관습과 급진 사상의 교차 - 을 작품으로 담아냈다. <안나 카레니나> 속에는 여성 교육에 대한 진보적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적 태도가 모두 드러나고, 가정생활의 행복과 고통이 적나라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독자는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 욕망을 가로막는 사회적 장벽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안나와 키티, 돌리라는 세 여성의 서로 다른 선택과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해방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제시했다. 그의 개인적 입장은 일면 모순적이지만, 바로 그 모순을 통해 당대 여성 문제의 복잡함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시작된 여성의 권리와 교육에 대한 논쟁은 이후 20세기 초 여성 참정권 획득과 사회 진출 확대로 이어져 나갔다. 러시아는 1917년 혁명으로 유럽 열강 중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법적으로 인정하였고, 많은 여성들이 교육과 노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진전에는 앞선 세대의 지식인들과 문학작품이 던진 문제 제기가 밑거름이 되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시대의 거울로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당대 담론을 깊이 있게 반영한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통해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인간애적인 연민을 잃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 소설이 페미니즘적 관점과 인간 보편의 관점에서 모두 재조명되는 이유이다. 요컨대, 19세기 러시아 여성의 권리와 교육 논쟁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걸작 속에 예술적으로 승화되었으며, 톨스토이의 복합적인 입장은 그 논쟁의 어려움과 깊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로써 우리는 문학이 사회 논쟁을 담아내는 방식과, 작가 개인의 신념이 작품에 녹아드는 양상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러시아뿐 아니라 유럽 전반의 여성해방사를 이야기하는 한 장면으로 읽힐 수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질문들은 현대 독자에게도 유효한 울림을 준다.
Reference
• Tolstoy in Context – The “Woman Ques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 Women’s education in 19th-century Russia: Feminism in Russia, Wikipedia
• Russian women’s movement: 여성신문 – 용감한 여성들, 페미니즘 기치서 다시 깨어나다
• Debates in Anna Karenina: – 안나 카레니나가 만들 수 있는 가정은 없다, It’s All Geek To Me! 블로그
• Tolstoy’s view on marriage: Feminism in Russia, Wikipedia
• “Woman Question” in Europe: Wikipedia – The Woman Question
• 그 밖의 내용은 <안나 카레니나> 소설 본문 및 관련 문헌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