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Wordplay) 말의 장난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Wordplay) 말의 장난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작품 속 대사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언어유희, 아이러니, 철학적 의미가 담긴 깊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오늘 아침 There but for the(Ali Smith)를 읽다가 '말, 말, 말 Word, Word, Word'가 인용된 문장을 읽다가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사람들이 살면서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 열 권 중 조지 오웰의 1984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꼭 들어간다고 한다. 신기하게 나는 그 두 권을 올해 다시 읽었다. 어려서 읽은 책들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주인공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을 때 과연 나는 뭘 읽은 거지? 하며 자책한다. 그래서 읽고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또 잊겠지만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다시 읽는 수밖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책을 읽은 사람이건 아니건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읽었다고 착각하거나 그냥 안 읽었다고 하면 창피해서 일 수도 있다.
철학을 전공했을 때 모든 게 어렵기만 했다. 점수를 받으려고 달달 외워 머리에 주입시킨 것들이 많이 있다.
그 당시에 이해 안 가던 것들이 요즘 살면서 채득 되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면 지금 공부했더라면 그렇게 힘들게 외우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싶다. 내가 했던 모든 것들, 만들어왔던 작업들은 결국 다 실존. 실존주의였구나. 몸소 느껴지는 시간을 맞았으니 말이다. 이젠 사르트르가 친구 같다. 내 친구 장뽈. 나는 요즘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니 살아내는) 사람들, 우리는 쫓기듯 산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저 책도 읽어야겠고, 영화로 어떻게 풀어냈나 지난 것들을 봐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작업도 해야 하고, 먹는 것도 게을리할 수가 없다. 청소도 운동도 해내야 한다. 시간은 늘 턱 없이 부족하고, 놓거나 다 하거나... 채무자가 뒤따라오는 정도의 조급함이 일상 속에 있다. 때로는 밥을 먹을 때 생각한다. 누가 쫓아와? 왜 이렇게 빨리 먹어. 열 번은 씹은 건가. 30번은 씹고 맛을 음미하고 넘기려고 나는 숫자를 세는 버릇이 생겼다. 삶은 한 번뿐이고 길어야 백 년을 살지 못하고 결국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가끔 혹은 자주 낭비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인간다움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언가를 늘 하지만 하찮은 것들에 묶여 정말 해야 할 것들을 미루고 만다. 그러다 갑자기 또 두렵고 무섭고 그러다 잊기 위해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 생각이 무뎌지니까.
일요일 아침, 감자와 계란을 삶고, 양파를 썰고 다 삶아진 것들을 주걱으로 으깨고 소금과 후추와 마요네즈를 섞어서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족히 1시간이 걸렸다. 재료를 손질하고 빵을 버터에 굽고 좀 전에 삶아 놓은 달걀과 감자를 으깨는데, 한숨이 나왔다. 왜 이렇게 손은 느리며. 나 하나 먹고사는데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가. 끼니를 해결할 음식을 만들면서 사용된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커피를 내리고,... 접시에 담고 식탁에 앉은 시간까지 그리고 그걸 먹는 시간 10~15분 다시 설거지를 하고 오전 내도록 2시간이 걸렸다. 나 혼자 먹을 샌드위치 만드는데 들어간 시간이다. 손은 왜 그렇게 느린지. 퓨~ 더 빨리는 못하겠어... (그래서 나는 한 끼만 먹는 방법을 택했다. 간헐적 단식을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예민함을 늘 가지고 있고 싶기 때문이다는 3프로 그냥 음식을 하는 시간을 아끼고 싶은 마음 50프로 나머지 47프로는 그냥이다. 신기하게 덜 먹으면 많이 먹었을 때 보다 건강해진다. 같은 또래보다 7살 정도 어리게 측정이 되는데... 그러면 나는 덜컥 겁이 난다.
헉... 오래 살면 어떻게... 200살까지 살면 어떻게... 그래서 안 좋은 것도 많이 먹는다. haha).
나는 요즘 일어나면 하루종일 앉아서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시나리오를 쓴다. 매일의 루틴 중 하나로 5~10km를 매일 달리거나 테니스를 친다. 운동을 하고 씻는 시간까지 합치면 4시간. 속절없이 시간이 가버린다. 하루 24시간 중 6시간이 그렇게 가버리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다 보면 하루가 또 가버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다음 날을 준비한다.
작품을 내놓지 못한 지 1년이 넘어간다. 아니 햇수로 2년이 되어간다. 가끔 덜컥 겁이 난다. 넌 밥 먹고 하는 일이 뭐냐? 물었을 때... 답을 못하겠다. 그러다 아무도 아니면 어때. 다 꼭 뭔가 해야 하나...하다가. 머리가 둔해지거나 아파오거나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 머리 브러시로 머리를 툭툭 치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면 머릿속이 마사지 효과인지... 좀 나아지는 것도 같다. 나 혼자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루를 시작하며 내 마음을 달래줄 언어유희의 마술사 셰익스피어 문장을 되뇐다. 그러다 글로 정리를 좀 해보자 하여 이렇게 두서없이 글을 쓴다.
어떤 사소한 것들. 그러니까 어김없이 나 잊었어? 나 여깄어. 고통...하고 찾아오는 무게를 조금은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언어유희인지도 몰라하고 생각한다. 피식~ 하고 웃게 하지 않는가...
친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썰렁하다고 말하는 아저씨들의 농담. 언어유희 같아." 내가 말했다.
"응, 언어유희지. 좀 유치하고, 은유를 대놓고 너무 드러나서 그렇지...." 친구가 말했다.
"언어유희 좋아." "그래도 일상에 배어있는 거잖아. 앞으론 썰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겠어."
"계속할 수 있게..."
오늘 아침 책상 위로 결의와 부드러움이 섞인 은은한 빛이 들어온다.
지금, 단 한번 지금, 단 한번 지금 여기에 나는 살아있다. 하하.
셰익스피어의 말, 말, 말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Hamlet, 3막 1장)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을 단 10개 단어로 압축한 대사. ‘To be’와 ‘not to be’의 대조적 구조를 통해 삶과 죽음의 의미, 인간 존재의 본질, 선택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눈떠서 하는 생각들이지 않은가...
'삶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지만,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는 삶과 죽음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실존주의적 질문을 던지는 셈이다. 카뮈는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죽음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햄릿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사르트르, 카뮈 같은 철학자들은 인간이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맞아... 맞아... 근데 그게 참 어려워. 그래서 어쩔 땐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회피하고 싶기도 한 것 같다. 자유가 때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니까. 후~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일까.
“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 (As You Like It, 2막 7장)
삶을 연극에 비유한 인생무상 철학의 대표적인 문장. ‘stage(무대)’, ‘players(배우)’ 같은 연극적 언어를 활용한 메타포(은유), 현실도 결국 각본이 있는 연극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인간은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며, 삶은 하나의 연극처럼 펼쳐진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우’가 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간다. 학교에서는 학생, 직장에서는 직장인, 가정에서는 자녀 혹은 부모 혹은 혼자 살아가다가 결국 모든 인간은 무대를 떠나듯이 죽는다.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무대에서 ‘각본에 맞춰’ 살아가는 배우들인 것이다. 이 대사는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일생을 7개의 역할(단계)로 나누면서 전개한다. 사실 살면서 계속 헷갈리는 부분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이다. 다중인격자인가. 싶을 때가 태반이니까.
울고 젖을 빠는 시기 1단계, 갓난아이 (Infant)
배우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배우는 시기, 2단계: 학생 (Schoolboy)
사랑에 빠지고 감정이 폭발하는 시기, 3단계: 연인 (Lover)
명예와 영광을 위해 싸우는 시기, 4단계: 군인 (Soldier)
지혜를 쌓고 권위를 가지는 시기, 5단계: 판사 (Justice)
몸이 약해지고, 목소리가 가늘어지는 시기, 6단계: 노인 (Old Age)
연극이 끝나고, 무대를 떠나는 시기, 7단계: 죽음 (Death)
운명론적 해석으로 말해보면 인간은 이미 정해진 각본에 따라 살아가야 한고 우리는 주어진 역할을 수행할 뿐이며, 이를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는 것인가?
실존주의적 해석을 해보면 인간이 연극 속 배우라면, 각본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연출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우리는 무대 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 선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단순한 배우인가, 아니면 무대에서 우리의 역할을 바꿀 수 있는가? “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SNS에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 연출, 시나리오 그리고 촬영을 통해 한 편을 완성한다. 오늘날만큼 이 말이 유효한 시기가 있을까 싶다.
자존심은 냉장고에 넣고 회사에서 감정을 숨기고 상사에게는 공손하게, 고객 앞에서는 친절하게, ‘프로페셔널한 배우’가 되어야 한다.
‘온 세상이 무대이며, 모든 남녀는 배우일 뿐이다’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지만, ‘어떤 연기를 할 것인가’?
“There is nothing either good or bad, but thinking makes it so.” (Hamlet, 2막 2장)
이 대사는 햄릿이 덴마크의 상황을 한탄하며 말한 것으로 같은 장소라도, 햄릿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현실을 규정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절대적인 ‘선(善)과 악(惡)’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간의 사고(생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로 인간의 주관이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단지,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것이다. 예를 들면 한 회사가 망하면 그곳 직원들에게는 불행이지만, 경쟁 회사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행운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운이 될 수 있는 상황말이다.
또한 어떤 것이 선인지 악인지, 옳은지 틀린 지는 시대, 문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현대적으로 말하면 절대적 기준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예술에서 누군가에게는 ‘혁신’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욕’이 될 수도 있다. 역사적 인물도 시대와 관점에 따라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절대적인 진리나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 상태에서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도둑질’도 생존을 위한 행동일 뿐 선악의 문제가 아닐 수 있으며,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회적 관습이나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인 것이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다.” 행복이나 불행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고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햄릿의 말도 이와 비슷하게 “선과 악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다.”라고 볼 수 있다. 실존주의 관점에서 사르트르는 “세상은 본래 무의미하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다.”어떤 것이 선과 악인지, 의미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렌즈를 통해 해석한다. 결국, ‘좋고 나쁜 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뉴스나 미디어는 어떤 사건을 ‘좋거나 나쁘게’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여론을 조성한다. 같은 정치적 사건도 매체에 따라 다르게 보도될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실시간 뉴스를 다른 어떤 매체보다 재밌게 보는 이유가 그렇지 않을까.
현실은 우리가 보는 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Some are born great, some achieve greatness, and some have greatness thrust upon them.” (Twelfth Night, 2막 5장)
셰익스피어의 <십이야>에서 이 대사는 농담처럼 사용된다. 극 중에서 몰볼리오(Malvolio)라는 인물은 거짓된 편지를 읽고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이라고 착각하지만 현실은 그저 농락당하는 상황일 뿐, 위대함이란 때때로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다는 뜻도 포함된다.
‘위대함(greatness)’이란 스스로 만드는 것인가, 운명적으로 주어지는 것인가?
셰익스피어는 이 말을 통해 ‘위대함’이 반드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어떤 위대함은 타고난 것이고, 어떤 것은 노력으로 이루지만, 어떤 것은 억지로 떠맡게 된다. 운명론적으로 해석해보면(Determinism)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위대하다. ” 타고난 왕족이나 천재들은 필연적으로 위대하게 될 것인가? 운명이 정해져 있으며, 우리는 거기에 따라갈 뿐이다.
“인간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라고 실존주의 철학자 장뽈 사르트르는 말한다. “위대함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노력과 의지로 위대함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사례가 이에 해당된다. 구조주의적(Structuralism) 관점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위대한 역할을 맡게 되고 사회적 환경과 역사적 흐름이 어떤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넬슨 만델라는 원래 평범한 변호사였지만, 인종 차별과 정치적 환경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다. 원래 코미디언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를 강제적으로 역사적 인물로 만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나는 그가 자신이 원하지 않지만 지도자로 떠밀린 사례 같다.
위대함이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운명, 노력,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결과일 수도 있다.
“Hell is empty and all the devils are here.” (The Tempest, 1막 2장)
이 대사는 극 중 아리엘(Ariel)이 폭풍 때문에 배가 난파될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이 공포에 빠지며 이때 세바스찬과 안토니오 같은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배반을 저지르려 한다. 아리엘은 이를 보며 “지옥은 비었고, 악마들이 지금 여기 있다”라고 외친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서로를 배신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이야말로 ‘악’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악’이 지옥이 아니라, 바로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는 의미로 “지옥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이 지옥이다.”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하고 잔혹한 일들이 지옥보다 더 끔찍할 수도 있다. 악마 같은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악'이 될 수도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전쟁, 폭력, 권력 다툼 등은 악마보다 더 잔혹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것엔 창의력과 상상력이 기반이 되기 때문에 무한한 악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가 말한 “괴물을 바라보면, 스스로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말과도 연결될 수 있다.
악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 사람들이 ‘악마’라고 부르는 존재가 실은 인간 내면에 존재할 수도 있고 '인간의 욕망과 본능이 가장 위험한 악이 된다는 점이다'. 이 대사는 인간 본성 속에 숨겨진 ‘악’을 직시하라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며, 문명이 없다면 서로를 해치며 싸울 것이다.”라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악마’는 인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에 있을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이 말도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악마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선을 창조하는 것도 인간이고, 악을 창조하는 것도 인간이다.”라고 말한 니체는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적 개념 자체가 권력과 이익에 따라 조작될 수 있다는 뜻으로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야말로 가장 큰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와 벌>, <악령> 등의 작품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죄책감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순간, 악마가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악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옥은 비었고, 악마는 여기에 있다’는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말이다.
'악’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다.
전쟁, 인종 차별, 홀로코스트, 학살, 젠더문제 등은 인간이 직접 만들어낸 참혹한 현실은 역사적으로 가장 끔찍한 일들은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 저질렀다. 현실이 지옥보다 더 끔찍하다는 극적이며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악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 존재한다.
인간이 만든 시스템 속에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을 희생시켜도 괜찮다”는 논리가 존재한다. 이는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옥이 될 수도 있다”와 연결된다. 사람의 욕망에서 비롯된 문제점은 끝이 없기 때문에 창의적으로 진화한다.
인간의 악함은 그야말로 창의적이라 한계가 없다.
“I must be cruel only to be kind.” (Hamlet, 3막 4장)
진정한 친절을 위해서는 때때로 잔인한 선택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의미로 단기적인 고통이 장기적인 선(善)을 가져올 수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거나 가혹하게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데 어린아이에게 위험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 엄격하게 훈육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진정한 친절은 때로는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긴 안목에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햄릿은 어머니 거트루드에게 “내가 당신에게 가혹한 말을 하지만, 결국에는 이게 당신에게 더 나은 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선과 악의 경계는 모호할 수 있다는 도덕적 딜레마가 존재한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어떤 행동이 궁극적으로 좋은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햄릿은 아버지를 죽인 클라우디우스를 처벌해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폭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며 정의를 실현하려면 자신도 어느 정도의 ‘잔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정의를 위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사이 기하다.
이 대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어.
‘잔인함(cruel)’과 ‘친절(kind)’이라는 상반된 단어를 조합해 의미의 반전을 만들고 결국 어떤 상황에서는 냉정함이 더 큰 선이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를 남긴다.
정의와 복수의 아이러니라니...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때때로 가혹한 선택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잔인한 행동이 결국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칸트는 “옳지 않은 행동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잔인함은 결국 잔인함일 뿐, 그것이 친절로 변할 수 없다.”칸트적 입장에서 보면, 햄릿의 대사는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수도 있음.
'잔인한 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대사임이 틀림없다.
정치와 외교에서 ‘강한 선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도자들은 때때로 국민들에게 불편한 정책을 시행해야 할 수도 있는데 예로 경제 위기 시 긴축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 경제를 안정화할 수도 있다. 의사가 환자를 살리기 위해 극단적인 치료를 선택해야 할 수도 있다. 항암 치료는 환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지만, 결국 생명을 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살리기 위해 고통을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이 대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어떤 고통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대사이다.
“They stumble that run fast.” (Romeo and Juliet, 2막 3장)
이 대사는 극 중에서 로렌스 신부(Friar Laurence)가 로미오에게 조언하는 말로 로미오는 줄리엣을 너무 빨리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서둘러 진행하려고 하는데, 신부는 “너무 서두르면 결국 넘어질 수 있다.”라고 경고하지만, 로미오는 이를 무시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과 같은 의미로 계획 없이 너무 빨리 움직이면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날 수 있다.
천천히 가더라도 확실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더 안전하다면 서두르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에...
노자(老子)의 도덕경에는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즉, 조급한 행동은 오히려 실패를 초래할 수 있다고 한다.
너무 빠른 것도, 너무 느린 것도 좋지 않다. 최적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中庸)의 미덕’을 강조한다.
신중함을 잃고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면, 결국 큰 실수를 하게 될 수
‘빠름’과 ‘넘어짐’을 대비시켜, 조급함의 위험성을 강조한 문장이다.
맞아.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지... 알고는 잊지만...
“Parting is such sweet sorrow.” (Romeo and Juliet, 2막 2장)
이 대사는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작별 인사로 “너와 헤어지는 것이 너무 슬프지만, 내일 다시 만날 걸 생각하면 달콤하다.” 이별의 순간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에, 이별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미로 셰익스피어의 언어적 기교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슬픔’(Sorrow)과 ‘달콤함’(Sweet)은 원래 모순되는 감정이지 않은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기 때문에, 이 슬픔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참으로 ‘역설적 표현’과 ‘시적 감성’이 묻어난다. 단순한 헤어짐이 아니라, 로미오와 줄리엣의 운명적인 사랑을 더욱 강조하는 장치로 이 사랑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달콤한 슬픔’이 주는 감정적 울림을 담고 있다. 그래서 더 처연하다.
장 뽈 사르트르는 “인간의 감정은 상대적인 것이며, 고통조차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라고 했다. 이별이 존재하기에, 만남의 순간이 더 소중해질 수 있다. 순간의 소중함이라니... 아. 그것은 너무 짧은 것만 같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통도 삶의 일부이며, 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다."라고 했다. 이별을 슬퍼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모든 감정을 받아들여라.인데 참으로 가혹하다.
“모든 것은 순간이며, 결국 사라진다.”라고 말한 불교 교리가 나은 것도 같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나 이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며 “이별이 존재하기에 사랑도 더 깊어질 수 있다.” 모든 것은 덧없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가 있고 이별의 아픔을 단순한 고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의 증거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 참으로 덧없어라...
“Words, words, words.” (Hamlet, 2막 2장)
이 장면은 햄릿이 폴로니우스(Polonius)와 대로
폴로니우스: “너는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
햄릿: “Words, words, words.”
햄릿이 폴로니우스와의 대화를 통해 ‘말뿐인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으로 덴마크 궁정과 인간 사회의 공허함을 비꼬고 있다. 햄릿의 환멸과 회의감이 잘 드러난 문장 같다. 말은 많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는 냉소적인 표현이야.
말은 공허하다. 말이 넘쳐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별로 없을 수도 있고, 실수를 하게 된다. 햄릿은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말로 포장하지만,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 “말이 많다고 다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말은 많지만,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헛소리’, 혹은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말이 진실을 담보할 수 있는가? 에 대해서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라고 했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결국 언어에 의존하지만, 말이 항상 진실을 담보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말이 진실을 가릴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종종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속이기 때문이다.
햄릿의 “Words, words, words.”라는 말은 언어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해석이 있을 뿐이다.”
햄릿의 이 대사는 “결국 인간이 하는 말들은 다 허상일 뿐이다.”라는 허무주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말은 많지만,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헛소리’,
혹은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
“Much ado about nothing.” (헛소동, Much Ado About Nothing)
클라우디오(Claudio)는 히어로(Hero)가 바람을 피웠다는 헛소문을 믿고, 결혼식장에서 그녀를 모욕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다시 화해하는 이야기로 사실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속고, 큰 문제로 만들었다는 점을 풍자하는 작품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떠들썩하다’는 말은, 인간이 쓸데없는 소문과 오해로 문제를 키우는 모습을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nothing(아무것도 아님)’과 ‘much ado(큰 소동)’의 대비를 통한 풍자적 언어유희로 “괜한 호들갑”,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같은 의미다.
셰익스피어는 ‘반대 개념’을 조합하여 말의 유희를 만들고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아이러니와 의미의 반전을 통해 깊은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용될 만큼 강렬한 표현력과 통찰력이 있는 언어유희의 진정한 마스터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안한 존재이며, 의미 없는 것에도 집착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질문한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것보다, 눈앞의 사소한 문제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햄릿이 말한 “Words, words, words.”처럼, 우리는 ‘진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말장난’에 휘둘릴 수도 있다.
현대 미디어는 작은 논란을 키우고, 사람들은 거기에 휩쓸리며 ‘사소한 일이 과장되는 사회’를 살아내고 있다.
가짜 뉴스, 인터넷 논쟁, SNS 이슈 등은 대부분 본질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 수도 있고 “우리는 정말 중요한 문제보다, 사소한 문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가?”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는 “인간은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다.”며 이성보다 감정에 의해 조종되며, 사소한 일에도 격렬하게 반응한다.
부조리한 사회를 견디기 위한 인간의 본능적 성향인 것이다.
<헛소동>에서 등장인물들이 논리적 판단보다 감정에 휘둘려 오해하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떠들썩하다’는 표현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말해준다.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보다, 감정적으로 사소한 문제에
더 집중하는 것은 아닌가?’
'Love looks not with the eyes, but with the mind." (A Midsummer Night's Dream 1막 1장)
이 대사는 극 중 인물 ’ 헬레나(Helena)’가 말한 문장으로 그녀는 드미트리우스를 사랑하지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지만 헬레나는 그의 행동이나 태도와 상관없이 계속 그를 사랑한다.
헬레나는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라고 말하며, 외적인 조건과 무관하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자신의 감정 말하고 있다. 사랑의 순수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이 비합리적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감각(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마음(정신, 영혼)’으로 느끼는 것이라는 뜻으로 진정한 사랑은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본질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다.
사랑은 상대방의 내면(성격, 가치관, 영혼)을 바라보는 것으로 같은 사람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때로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감정에 의해 이끌리기도 하며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때로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랑은 맹목적이다.
플라톤적 사랑 (이데아적 사랑)에서 진정한 사랑은 육체적 매력이 아니라, 영혼과 지적 교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끌림이 아니라, 정신적·영적 연결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적 개념과 연결된다.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사랑은 타인을 자유롭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성적이든 감정적이든, 결국 개인이 선택하는 행위다. 헬레나가 드미트리우스를 사랑하는 것도 외적인 요소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감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사랑이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감정, 기억, 경험이 합쳐진 복합적 현상이라고 본다. “사랑은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말은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감정적으로만 판단할 수도 없는 복잡한 현상이다.
SNS, 미디어는 사랑을 외적인 기준(외모, 재력, 사회적 지위)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겉모습이 아니라, 상대의 내면과 본질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이지 않을까. 나는 맹목적인 사랑을 선호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은데 비합리적인 사랑을 경험할 때 비로소 에고가 줄어들지 않나 하는 관점에서 말이다.
치료약은 없어요!
치료되고 싶지 않아요. 계속 아프고 싶어요.
전 사랑에 빠졌어요.
영화 일포스티노의 그야말로 명대사다.
나는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