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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an 19. 2019

마르셀 뒤샹 전–통념의 바깥

올해 초에 열리는 세가지 블록퍼스터 전시를 기반으로 앞으로 1~3부작으로 기고될 예정입니다.

모더니즘-아방가르드-포스트모더니즘 순으로 이어지는 전시를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1월: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피카소와 큐비즘 전, 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2167

2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마르셀 뒤샹 특별전, 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2062

3월: DDP에서 열리는 키스 해링전. 소개: https://artlecture.com/project/1655



전편보기:https://artlecture.com/article/495



마르셀 뒤샹 전 – 통념의 바깥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국립현대미술관은 12월 22일부터 19년 4월 7일까지, 아방가르드의 기수이자 포스트모더니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마르셀 뒤샹 특별전을 펼친다. 아마 마르셀 뒤샹의 작품들은 대중들로 하여금 현대미술이 난해하다는 인식의 대표 주자처럼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논하기 이전, 현대미술의 크나큰 두 축인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를 구분하고 가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모더니즘의 경우 난해함을 필두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의 경우 예술을 하나의 전문화된 영역으로 삼고자 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했다. 그래서 예술은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어떠한 목적도 지니지 않는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서, 사회 및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그린버그가 주축이 되는 미술, 특히 회화에서의 모더니즘은 아무리 우리가 화폭 속에 3차원의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한다 한들, 그것은 눈의 착시에 불과하고 우리는 절대 2차원적인 한계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한 2차원적인 한계들인 물성, 평면성, 마티에르와 같은 회화의 한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이를 통해 그 한계를 회화의 본령이자 본질로서 파악하였다. 한편 등한시되는 속성들은 이전 시대까지의 회화의 주요한 사명이던 재현, 문학의 영역이 된 서사 등, 보다 다른 매체에서 모더니즘의 본질로 대두되는 속성들이 미술에서는 폄하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모더니즘의 영향권에 는 인상주의를 거쳐 야수파와 표현주의, 그리고 큐비즘 및 추상주의, 추상표현주의와 같은 화파들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조들에서 대중들이 느끼는 난해함은 일반적으로 미술에 기대하던 재현 및 서사의 부재, 그 대신 떠오른 2차원적인 시점 및 투박한 물성 등을 마주하는 난해함이다. 하지만 작가들은 이러한 바를 통해서 난해함을 드러내려한 바가 아니라, 그저 회화의 본령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 난해함이란 기초교육을 통해서 수학되지 않는 모더니즘의 역사 및 미술 감상의 태도가 근대성에만 메여있기 때문에, 그러한 교육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것이리라.


즉 모더니즘에서의 난해함은 작가들이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그들은 당대 모더니즘의 흐름 속에 있었던 인물들로서, 그들이 모색해야하는 회화의 본령으로 당대에 여겨지던 속성들을 치열하게 탐구하던 것뿐이었다. 허나 아방가르드의 기수들은 달랐다. 아방가르드의 기수들은 그들의 의도 자체가 난해함, 숭고함, 불쾌감을 일으키는 데 있었고, 그러한 감정을 일으키는 방법은 기성 및 통념의 전복, 심미성의 배제와 같은 일련의 역사성을 부정함에 있었다. 모더니즘의 기수들이 회화에 있어서 기성의 전복을 행한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들은 심미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탐구하려던 속성을 토대로 극단적인 순수의 형식미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 내에서는 기성 및 통념들을 전복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사회는 예술과 유리된 것으로서, 작품 내에서 그러한 현실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는 전통의 단절 및 기성의 전복이라는 측면에서는 일맥상통하나, 이외의 영역에서는 첨예하게 달랐다. 모더니즘은 예술과 사회는 유리된 것, 그리고 심미성을 추구했던 반면, 아방가르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조차도 전복의 대상이었고, 무엇보다 예술은 사회 속에서 태동하는 것이기에, 사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예술에서 맑시즘적인 입장이 고수되었다. 그리고 심미성조차 그들에게선 전복의 대상이었기에, 이렇게 예술이 감상자에게 미치는 바와 사회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의 차이가 드러난다.




*아방가르드와 다다이즘

이러한 아방가르드에 속하는 화파는 큐비즘의 경우 캔버스를 넘어선 종합적 큐비즘(분석적 큐비즘은 여전히 캔버스 내에서 2차원적인 조형성 및 다시점이 추구되었다. 그래서 회화적 환영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이 포착된다. 허나 종합적 큐비즘의 경우 캔버스를 넘어선 다른 오브제와의 콜라쥬를 행했고, 여기서는 실물과 환영의 경계를 허무는 아방가르드의 실험이 포착된다. 그래서 큐비즘은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양자 모드를 품고 있는 사조이며, 세부적으로는 분석적 큐비즘은 모더니즘으로, 종합적 큐비즘은 아방가르드로 나뉘게 된다),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이 대표적이다. 마르셀 뒤샹의 경우 다다이즘에 속하는 작가인데, 이러한 다다이즘의 기수들은 1차 대전 당시의 전쟁에 대해서 경멸을 느끼며, 이성 중심적으로 흘러온 서구의 전통에 대한 환멸을 느꼈던 이들이다. 그래서 이들에게선 기성에 다름 아닌 이성 및 합리성에 대한 반발로 우연성과 무의식을 강조하였고, 당대에 대한 급진적인 혁명과 변혁, 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전통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접근과 이에 대한 전복의 수행이 그들의 주요 작업이었다.

또한 그들의 사조명인 '다다이즘' 은 그 이름이 우연적으로 탄생했다는 설이 가장 지배적이기에 그 탄생부터 기성에 대한 반발이 드러난다. 이러한 기원의 우연성과 더불어 '다다'의 의미 또한 어린아이의 옹알이랄지 루마니아어의 '목마'랄지 속한 기수들에 따라서 그 주장하는 바가 제각각으로 다르며, 기성의 해석에서의 일원론이나 작가성을 부정한다. 즉 다다이즘의 경우 기성에 대한 환멸과 전복, 혁명의식이 그들의 공통된 사상에 다름 아니며, 이것을 행하는 기수들의 방법론은 죄다 제각각이나 기성 형식에 있어 파괴적이라는 것과, 비합리성 및 우연, 상상력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는 비교적 동일하다. 그리고 마르셀 뒤샹은 이러한 다다이즘의 가장 대표적인 기수이자 선구자로,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뒤샹과 20세기

이러한 다다이즘의 선구자인 마르셀 뒤샹은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와 더불어 형제들도 예술계에 속해 있었다. 다다이즘의 기수이기 이전의 뒤샹은 상징주의, 야수파, 표현주의, 큐비즘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는 상징주의의 르동과 같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비합리적인 내면의 영역을 선호하였고, 또한 야수파 및 표현주의가 강조하는 감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색채에도 매료되었다. 즉 모더니즘의 영역에 있는 화파들을 선호함에 있어서도, 그의 관심은 기존의 전통과 단절되어 어떻게 독자적이고 새로운 표현을 드러내는 표현에 집중하였다. 이러한 그는 큐비즘을 정식으로 거쳤었고, 그 이후에는 이들보다도 더욱 급진적인 방법으로 전복을 행하며 어떠한 기성의 전통과 규칙, 장르에도 얽매이지 않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러한 그의 미학은 20c shock experience 및 새로운 형태의 숭고함으로 규정되어, 사람을 심미적인 체험으로 안주시키는 기성의 미적 체험이 아닌, 사람을 언제나 깨어있게 만들어주고 기성의 균열을 드러내고 이러한 불쾌함과 마주하는 아방가르드의 급진적인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레디메이드를 통해 작가에 대한 역할을 재조명하거나, 성에 대한 통념, 기성의 의미 및 속성에 대한 전복이 주요하다. 이러한 뒤샹의 혁신적인 작업의 연속은 10년대와 20년대에 집약되어 있으며, 30년대에는 예술 활동을 그만두고 체스를 하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1920년대에 그의 예술세계는 종언한 셈이지만, 195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네오 다다, 포스트 모너디즘의 개념미술 등에 영향을 끼치고, 이러한 영향력이 지금도 이어져오는 동시대에도 그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뒤샹의 회화

이러한 마르셀 뒤샹의 온 생애를 이번 겨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총 4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2관부터 4관까지 아방가르드의 기수로 유명한 그의 다다이즘 시기의 작품들 및 해체적인 오브제 작품들과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1관에서는 그에게서는 엿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초기시기의 유화 및 드로잉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데, 소재에 있어 훗날 다다이즘으로 이어진 이후의 그의 관심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러한 1관의 작품들부터 살펴보자. 가장 먼저 <블랭 빌 교회와 정원이 있는 풍경>이다. 그의 풍경화로서 그는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굳이 먼 외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그저 그의 주변의 풍광들을 진솔하게 담아냈으며, 이런 점에서 보다 일상성을 추구하고 유리된 예술의 정치성을 매개하려는 관심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지곤 한다. 이러한 그의 풍경화에서는 거친 필치와, 물성이 적나라하게 강조되는 두터운 마티에르가 도드라져, 인상주의의 영향력이 강하게 감지된다. 뒤샹 역시 초기시기에 빛의 산란과 시간의 변화로 인해 시시각각 변하는 고정되지 않은 시각의 한계를 드러내는 풍광에 관심이 있었음을, 그리고 재현은 그의 관심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인물을 그려낸 작품들에 있어서도 명확하지 않은 재현과 일상성은 드러난다.


블랭 빌 교회와 정원이 있는 풍경, 1902


<예술가의 아버지>라는 작품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그려내며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오롯이 드러낸 소재라는 측면에서, 실재 삶을 담아내려 했던 그의 정치성이 감지된다. 풍경화에 비해선 다시금 재현이 부활되고 있는 본 작품이지만, 그 탄탄한 재현은 3차원을 2차원의 화폭에 고스란히 옮겨오는 재현의 환영과는 다르다. 이는 세잔적인 재현으로서, 드로잉의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나 그림자를 표현하는 역할로의 변주, 그리고 최소화된 미니멀한 재현으로 대상의 형태를 이루려는 시도에서 세잔의 영향력이 드러난다. 또한 멜랑콜리한 색채는 대상의 내면 및 대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야수파 및 표현주의의 영향력이 서서히 감지된다. 이러한 표현주의의 영향력은 <의사 뒤부셀>에 이르러 가장 단적으로 드러난다. <예술가의 아버지>에서보다 현실에서 벗어난 듯한 과격하고 강렬한 색채가 가장 인상적이다. 그리고 대상의 본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예술가의 아버지>에 비해, 본 작품에서는 대상에 대한 데포르메가 일어나고 있어 형태감에 있어서도 자유분방한 표현이 드러난다. 이렇게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의 주요한 모더니즘 운동을 체화한 뒤샹의 초기 작품에서는, 예술가의 자율적인 역할과 표현을 강조하려했던 그의 에고를 결코 숨길 수 없다.


예술가의 아버지, 1910


의사 뒤부셀, 1910



*큐비스트 뒤샹

이러한 그는 이후 큐비즘 운동에 공식적으로 몸담으며, 큐비즘의 대표적 기수로서의 이력도 쌓는다. 큐비즘 화가로서 그의 초기작인 <체스선수들의 초상>에서는 분석적 큐비즘의 경향 중 하나인, 당시 산업시대가 도래하며 새로운 풍광 및 색채에 다름 아니던 기계적인 조형 및 어둡고 차가운 색채를 통해 기계로 대체되는 인간들의 새로운 초상이 포착된다. 또한 그간의 회화에서는 정교하게 배경과 피사체의 분리를 보여줬으나, 큐비즘에 이르러서는 대상과 배경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해지지 않는다. 모든 바는 뒤섞여 있어 쉬이 구분되지 않고, 선수들의 얼굴과 손만이 미약하게 드러날 뿐이다. 더욱이 드러나는 선수들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단일한 시점에서 구현되지 않은 채 다양한 시점에서 해체되고 합쳐지는, 다시점에서 그들의 형태가 드러난다. 즉 뒤샹 또한 2차원적인 평면에 담아낼 수 있는 특권으로서 다시점에 주목하였다. 이렇게 <체스선수들의 초상>에서 큐비즘의 주요한 기수로서 뒤샹 또한 몸담았음이 포착된다.



체스선수들의 초상, 1911


이러한 본 작품에서는 체스라는 그의 관심이 미약하게 표현됐으나, 이후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에서는 그의 관심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해체된 형체 속에서 우리는 잔존하는 운동감만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운동감은 큐비즘 이후 다다이즘으로 나아가서, 그가 추구할 미학의 중심을 이루는 바 중 하나이다. 또한 보편적인 재현 대상의 부재 또한, 그가 오브제 작품으로 선회한 이후에도 추구한 바들 중 하나로서, 우리가 기대하는 ‘누드’화는 본 작품에서 부재한다. 이러한 에로티시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는 큐비즘 시기의 작품 중 하나를 더 꼽자면 <신부>를 꼽을 수 있다. 기계적인 조형과 과정으로 인간은 해체된다. 이러한 차가운 조형성을 통해 인간이 해체되고 다시금 조립되는 그 과정에 집중한다. 미약하게 남아있는 부드러운 살갗 및 따스한 색채로만 본 대상이 인간임을, 그리고 신부임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누드에 대한 관심 속에서, 당대의 금기에 다름 아니었던 성에 대한 파격적인 그의 태도가 포착된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1913


신부, 1912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이러한 그의 큐비즘 시기의 작품들은 1910년대 초반에만 국한된다. 이후의 큐비즘의 기수들이 그간의 분석적 큐비즘에서 벗어나 종합적 큐비즘으로 나아가며 모더니즘에 국한됐던 큐비즘이 아방가르드로 나아감을 보여줬다면, 뒤샹은 그러한 종합적 큐비즘의 오브제와 캔버스의 결합에 만족하지 않고 오브제 자체를 중시하고, 그간의 예술 장르의 단일성을 타파하는데 관심을 두며 아방가르드의 효시에 다름 아닌 다다이즘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드러난다. 그간의 ‘예술적이다’라는 수사가 함의하는 일련의 보편성을 전복하는데 그는 주목한다. 그간 예술적이라 평가되곤 한 천재로서의 창작자로서의 예술가, 기성품들과 파인아트와의 경계, 성을 표현함에 있어 신성하고 고귀하게 표현하는 전통, 그리고 명백하게 나뉘곤 하는 작가, 작품, 감상자들 간의 경계를 전복하며 이러한 질문에 그는 답하려고 하였다.



*레디메이드

이러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전복을 살펴보자. 르네상스에 이르러 예술가들은 비로소 당대에 폄하되었던 기술공의 지위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창작을 행한다는 현대적인 예술가의 지위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격상된 지위 속에서 그들의 위상은 당대의 학자들의 지위에 비견됐다. 그리고 낭만주의에 이르러 예술가는 조물주와 마찬가지로 유일하게 ‘자율적인’ 창조를 행할 수 있다는 천재이론에 의하여, 예술가의 신적인 지위는 더더욱 강조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술가에 의한 자율적 창조물인 파인아트와, 타율에 요구에 응한 일련의 기성품에서 보이는 타율적인 창조물에 있어서는 명백히 위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뒤샹은 이러한 기성품에서 보이는 형식미에 주목한다. <자전거 바퀴>와 <벽걸이>와 같은 작품들은, 뒤샹이 작품을 위해 따로 창조한 작품들이 아니다. 그것은 미리 제작되어 있던, 레디메이드 작품들로 뒤샹은 그 작품들에 주목하고 일련의 아이디어를 부여하여,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을 뿐이다. 이를 통해 그간의 전시 시스템에 대해서 반문하고, 고상한 것과 키치한 것의 경계를 허문다. 또한 그간 원본성이 중시되고 희소성이 강조되며, 작품 자체의 특질보다도, 희귀한 바가 현현함으로 인해 생기는 아우라를 파괴시킨다. 무한히 복제되고 생산되는 공산품들을 레디메이드하는 뒤샹에게서, 작품 고유의 원본성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즉 뒤샹에 의해 단수적으로 여겨졌던 예술매체에 있어, 다수적인 확장이 열리게 되고, 무엇보다 아우라의 파괴를 통해 작품 자체에 진정으로 다가가는 감상의 이상적인 가능성이 포착된다.


좌측부터 자전거 바퀴, 옷걸이, 샘



이러한 레디메이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샘>에 다름 아니다. <자전거 바퀴>나 <벽걸이>에서는 일련의 기능성이 남아있었다면, <샘>은 남성용 변기가 뒤집혀있어 그 기능조차 온전하지 못하다. 허나 그렇게 뒤집어진 변기를 통해서 ‘샘’이라는 새로운 역할에 주목하고, 오히려 그 기능에서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남성용 변기의 형식미 및 개념주의의 효시가 된 뒤샹의 작가적 아이디어에 주목할 수 있다. 이렇게 뒤샹은 <샘>과 같은 레디메이드 작품을 통해서 창작과정에 대한 물음과, 일상의 전복을 통해 새로운 진리가 현현할 수 있음을 드러내어 아방가르드 미학의 가장 대표적인 역할에 주목하며, 또한 예술가의 천재성을 과연 신적인 절대자가 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제시한다. 특히 마지막 물음에 있어서 예술가의 천재성은 예술가를 공인하고 그들에 선행하는 ‘예술계’에 의해서 부여된다는, 작가의 형성에 있어서도 솔직한 예술제도론 담론을 형성한다. 어쩌면 파인아트와 기성품의 영역도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저 예술계에 의한 막연한 나뉨인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일련의 레디메이드 작품들도 예술계에 의해 공인되고 예술작품으로서 자격을 얻는다는 예술제도론의 담론을 형성하기에 크나큰 단초를 제공한다.



*유동하는 성

그리고 세 번째 물음, 즉 성에 대한 물음을 살펴보자. 우리는 고야의 <누드의 마하>, 마네의 <올랭피아>, 세잔의 <강간>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 이르러 성에 있어서 보다 솔직한 작품들이 제작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었다. 허나 이러한 표현은 일련이 리얼리즘의 수준에 그치고, 무엇보다 외관의 리얼리즘에 다름 아니다. 뒤샹은 이에서 더 나아가 외관에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퀴어적인 욕망을 드러내는데 선구적으로 접근한다. 가장 먼저 <에로즈 셀라비로 분한 마르셀 뒤샹>의 경우 뒤샹이 자신의 뮤즈로 여장을 행한다. 이를 통해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이분법적인 섹스에 대한 통념에 균열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뒤샹은 그러한 에로즈 셀라비를 자신의 내면적 정체성으로 여겼으며, 무엇보다 이는 명확하게 여성으로 규정할 수 도 없는 정체성이다. 이러한 뒤샹의 작품을 통해서 무한한 젠더의 열림을 주장하는 동시대 젠더 담론의 효시를 포착할 수 있다. 더욱이 주체적인 창작자와 이에 수동적일 것을 요구받았던 뮤즈의 관계를 허문다. 창작자로서 뒤샹은 본인이 뮤즈로 분하며 이 고전적인 두 관계에 전복을 행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작품들의 공동 저자로 셀라비의 이름을 함께 적어 놓는다. 이를 통해 위계 및 경계가 존재했던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 또한 허물어내고 있다. 그리고 <몬테카를로 채권>의 경우, 뒤샹의 대표작중 하나인 <L.H.O.O.Q.>에서 드러났던, 사티로스 및 육욕, 악마적인 모티브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그는 그간 종교의 치하 속에서 부당하게 악으로, 부조리로 낙인찍혔던 가치들의 복권을 보여주며, 아방가르드 및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요한 담론 중 하나인 금기시 된 것들을 양지로 복권시키는 작업의 원류가 되고 있다.



에로즈 셀라비로 분한 마르셀 뒤샹, 1920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신부>

이러한 성에 대한 기존 통념의 전복은 그의 대표작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신부>에 의해서도 드러난다. 여성과 남성의 영역은 명백하게 구획되어 있다. 여성은 상층부에, 남성은 하단에 오브제를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날 뿐이다. 여성의 욕망은 그들에게 육체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보다 정신적인, 그리고 남성의 욕망은 빨리 여성을 마주하고 싶은 육욕에 중점을 둔다. 이렇게 서로 바라는 욕망이 다르다 보니 이 둘의 욕망은 일치될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발가벗겨지는 신부’라는 폭력적인 불일치가 제목을 통해서 암시된다. 이러한 두 가지 다른 욕망은 여인의 은하수를 통해, 그리고 남성의 기계적 오브제를 통해 상반되게 드러난다. 특히 뒤편의 폭포를 동력으로 삼아 정액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계적으로 표현해낸 바가 본 작품의 백미일 것이다. 폭포는 그간 신성하고 고귀한 것, 정액은 불결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폭포와 정액이 만들어지는 욕망의 과정의 위치가 동일하며 사실상 뒤샹에게서 이 둘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양자 모두 생명력의 원류가 되며, 그간 종교로 인해 성에 있어서 불결하게 규정된 바의 복권을 보여준다. 또한 본 작품은 마지막 질문 감상자의 영역에 대한 답변 또한 함의한다. 본 작품의 또 다른 제목이기도 한 <큰 유리>는, 감상자가 본 작품을 감상하며 작품 속에 비춰진다는 의미 또한 내포한다. 이러한 바를 통해 네 번째 질문에 대한 일련의 답을 표한다. 감상자는 작품의 일부를 점유하며, 명백하게 나뉘어져 있던 창작과 감상의 영역에 균열을 일으키고, 작품을 완성시킴에 있어 중요한 감상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감상자의 행위에 따라 무한히 열린 의미를 창출해내는 인터렉티브 아트의 효시가 되며,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감상자의 역할과 해석을 강조한다.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지는 신부, 1915~1923



*영향과 의의

이렇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는 뒤샹의 일대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모더니즘의 실험들 중에서도 집중했던 운동성과 과정에 중시하는, 다다이즘의 커다란 중심이 되었던 실험적 정신을 마주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 속에서는 동시대 미학자들의 여러 담론들이 포착된다. 천재성이나 작품의 지위를 절대자가 아닌 예술계가 부여한다는 단토의 예술제도론, 단수적인 예술에서 기인하는 아우라의 파괴는 벤야민, 보편성에서 벗어난 사건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비미학의 바디우, 성에 대한 솔직한 담론은 바타이유의 이론을 이루는데 중심이 된 그의 영향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개념미술 및 인터렉티브 아트, 키네틱 아트 등 동시대 미술을 이루는 여러 사조에 있어서도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지대함을 우리는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여전히 그의 유산 속에서 둘러싸여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개성과 파격, 해체로 가득 찬 동시대 미술 속에서 더 이상 새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른다. 허나 그것들은 명백한 뒤샹의 유산으로, 당대에는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보다도 더욱 거대하게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무엇보다 뒤샹은 당대에 어째서 이런 미술들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일련의 답변을 제공한다. 우리는 기초교육과정 속에서 아방가르드 및 동시대 미술의 감상에 있어 필요한 적절한 지식을 수학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방가르드의 기수들의 사명과도 같았던, 우리 삶 속의 예술은 다시금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허나 뒤샹의 영향관계와 그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아카이빙하는 본 전시는 동시대 감상에 필요한 일련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그의 탄생이 100여년이 지나가고 그의 사후 50여년이 지나가도, 여전히 뒤샹은 유리된 우리 삶과 예술을 그의 유산들을 통해서 여전히 매개하려 하고 있다.




만 레이, 〈에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1.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Gift of Jacqueline,


마르셀 뒤샹, 〈초콜릿 분쇄기(No.1)〉, 1913. Philadelphia Museum of Art: The Louise and Walter Arensberg Collectio



리처드 해밀턴, 〈<안과의사 목격자>와 뒤샹〉, 1967. Philadelphia Museum of Art, Library and Archives: Gift of Jacquelin






아트렉처 에디터 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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