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삶과 죽음을 말하는 방식-
바니타스
성경의 <전도서>는 다음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세속적인 삶과 물질의 추구가 갖는 무의미함 그리고 삶의 유한함에 대한 허무주의 정서가 짙게 서려있다.
이 허무주의는 예술의 오랜 주제이기도 하다. 16-17세기의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에서 성행하였던 정물화는 인간의 허영과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바니타스'(vanitas)를 주제로 한다. 황망한 모습의 해골, 불 꺼진 램프, 죽어있는 시계, 금방이라도 쨍그랑하고 깨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유리잔. 이처럼 다양한 죽음의 알레고리들이 한 손에는 상실감을 또 다른 손에는 삶의 겸허함을 올려놓고 우리를 향해 외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의 관념 전복
그러나 현대미술에 와서는 이 죽음의 관념에 세속이 섞이면서 죽음의 공포와 잔인성이 해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가브리엘 오로즈코의 작품 <검은 연 black kites>은 실제 사람의 두개골에 흑백 사각형을 그려 넣고 삶과 죽음의 이원성과 그 충돌을 한판의 체스 게임으로 가볍게 휘발시켰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데미안 허스트의 유명한 작품 <신의 사랑을 위하여 For the love of God>도 역시나 인간의 두개골을 소재로 하였다. 화가는 해골에다 물질과 욕망의 상징인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칠갑하는 것으로 죽음이 갖는 엄중함을 무력화시켰다.
깊은 슬픔
그러나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인식은 –역시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자아내는 깊은 슬픔이다.
호흡을 거두고 온기를 빼앗고 몸을 굳게 하는 죽음은 마치 물이 얼어붙어 얼음이 되듯 모든 생동하는 것들을 정지시킨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라는 넘나들 수 없는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죽은 이를 떠나보내고 덩그러니 남겨진 자들은 절대로 소각될 수 없는 기억들을 매개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빙점을 기어이 녹이려 든다. 바로 애끓는 사랑으로 말이다.
여기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고 그 상실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남편의 부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그 어떤 것도 버리지 못하고 집에 쌓아두는 저장강박증에 걸렸던 여인이 있다. 그리고 이런 어머니 탓에 오랫동안 폐소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던 한 예술가가 있다. 베이징 출신 예술가 쑹둥과 그의 어머니 자오샹위안의 이야기이다.
어머니 자오샤위안이 물건에 병적인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쑹둥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부터이다. 쑹둥은 제발 쓸모없는 잡동사니 좀 내다 버리자고 어머니를 다그쳐 보기도 하였으나 "네 아버지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구나. 네겐 쓰레기지만, 내겐 추억이다"라는 그녀의 말에 차마 더는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대신 쑹둥은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와 어머니의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2005년 베이징에서 오랜 세월 어머니가 모아 온 소유물들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 놓는 설치미술을 선보였다. 폐가구는 물론이거니와 비닐봉지, 책 더미, 신발, 밑이 시커멓게 타버린 가재도구 까지....... 전시장에 진열된 30년 묵은 잡동사니들은 거대한 묘지와 진배없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어머니의 마음이 찬란하게 빛났다.
(쑹둥은 이 작품을 통해서 국제 미술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베니스 비엔날레와 카셀 도큐멘타에 중국 대표작가로 참여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가장 창의적인 중국 현대미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영광을 얻었다.)
몇 년 전 우리는 세월호 참사라는 충격과 공포를 발만 동동 구르며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작가 김윤경숙의 설치미술작 <하얀 비명>은 그날의 비극과 절규를 구현한 것이다.
흡사 물방울 같은 304개의 전구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왔다가 꺼졌다 한다. 그 하얀빛들이 모여 파도가 되어 물결친다. 우리가 잃어버린 304명의 목숨이다. 차가운 바닷물에 삼켜진 아이들의 비명이 소리 없이 하얗게 깜빡인다. 전구 옆에는 빨간색 비닐테이프로 통로가 나있다. 그날의 끔찍한 참사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의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붉게 벌어진 상처처럼 아프게 열려 있다.
위태롭게 깜빡이다가 이제는 영영 꺼져버린 빛 잃은 영혼들에게 우리가 무어라 위로할 수 있을까. 다만 우리의 복잡하고 참담한 심경을 릴케의 <기도시집>의 한 구절로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아트렉처 에디터&칼럼니스트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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