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프로젝트>
데이트 모던에 떠오른 태양
올리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날씨 프로젝트>
날씨가 뭐라고, 이거 때문에 사람들은 울고 웃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날씨만큼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주는 것도 없다. 이런 사소한 기분의 변화부터 자연재해와 같이 생과 사를 오가는 생존 문제까지, 날씨는 우리의 삶과 긴밀하게 연관돼있다.
삶의 기본 조건인 의식주만 봐도 그렇다. 눈과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집을 지었고,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의 먹고사는 일이 달린 농사는 날씨에 따라 성패가 결정됐다. 이렇게 날씨는 우리 삶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니 날씨는 신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문명권을 보면 날씨와 관련된 신이 등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 포세이돈 등 주요 신들은 기후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단군신화만 봐도 환웅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바람, 구름, 비를 다스리는 관리들과 함께 내려온다. 그만큼 날씨는 우리 삶에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문명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날씨의 영향을 덜 받게 되었다. 물론 태풍, 홍수 등 자연재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긴 하지만 하루 중 대부분을 실내에서 지내다 보니 일반적인 날씨 현상에는 무감각해졌다. 오늘 날씨가 어땠는지 모르는 날이 흔하고 햇빛보다는 형광등 불빛을 더 오래 받는 게 현실이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니 햇살도, 빗방울도 창문 너머로만 볼뿐이다. 견고한 콘크리트 건물 속에서 우리는 제한적으로 날씨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거리를 걷고 싶을 때가 많다. 특히 요새는 미세먼지 때문에 화창한 날을 보기 힘들어 날씨가 조금만 좋다고 하면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비가 하도 자주 와서 해가 뜨기만 하면 밖으로 나와 공원에 누워 일광욕을 즐긴다는 영국 사람들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다. 서로 다른 이유지만, 따사로운 햇살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이러한 마음을 알았는지, 올라퍼 엘리아슨이 런던에서 흥미로운 전시를 진행했었다. 그는 태양을 미술관 안으로 옮겨놓았다. 바로 <Weather Project>이다. 이 프로젝트는 6개월 동안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진행됐으며 무려 200만 명이 방문했다. 200만 명이라는 수치는 전시회 관람객으로는 엄청난 숫자이다. <Weather Project>은 그의 설치 작품 중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작품 중 하나이다.
이 프로젝트는 전시가 시작하기 전부터 시작됐다. 전시회 홍보부터 전시회장 안에서까지 그는 한정된 정보만을 제공했다. 사실 우리는 작품을 보기도 전에 많은 정보를 제공받는다. 작품이 그려진 홍보 포스터에서부터 미술관 벽에 걸려있는 해설까지. 이러한 정보들은 우리가 작품을 경험하고 이해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그는 작품에 대한 경험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작품과 직접 연관된 설명은 제시하지 않았다. 전시회를 홍보할 때도 미술관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날씨와 관련된 설문조사 결과를 활용했다.
73% OF LONDON CAB DRIVERS DISCUSS THE WEATHER
WITH THEIR PASSENGERS
- 올라퍼 엘리아슨 <날씨 프로젝트> 전시 광고 문구
예를 들어
“얼마나 자주 날씨에 대해 이야기합니까?”
“우리 사회에서 날씨에 대한 생각은 자연과 문화 중 어느 것에 기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이 날씨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등등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통계내서 게시했다. 그리고 작품 사진 대신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전시 광고에 썼다. 그는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기대에 영향을 적게 줄 수 있는 정보를 선택한 것이다. 이는 작품을 경험하기 전에 갖는 기대치와 실제 경험 사이에서 오는 간극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렇게 그는 전시회 전부터 관람객의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를 최대한 배제시켜, 관람객이 온전히 작품을 일대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럼 작품을 감상해보자.
테이트 모던 미술관, 터빈 홀에 거대한 태양이 들어섰다.
전시 입구를 들어선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온몸을 감싼다. 이 빛의 발원을 찾아 뿌연 안갯속을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거대하고 눈부신 태양과 마주하게 된다. 흡사 거대한 일몰을 바라보는 착각이 든다. 이렇게 올라퍼 엘리아슨의 태양은 광활한 터빈 홀을 황금빛으로 물들어버린다. 거대한 태양, 그리고 온 공간을 채우는 신비로운 안개. 이러한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누구나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중세 농부들이 우뚝 솟은 고딕 성당에 처음 들어갔을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평균 신장 150cm에, 2층 높이 이상의 건물은 없었던 시절, 그보다 몇 배나 더 높은 성당은 그 자체로도 위압적이었을 것이다.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여있는 도로 위로 찬란하게 고고히 솟아오른 고딕 성당에 처음 발걸음 하는 농부는 그 자체만으로도 떨렸을 것이다. 농부는 긴장된 마음을 붙들고 화려한 정문 파사드를 지나 어둠이 짙게 깔린 성당 안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드디어 동쪽 끝 거대한 제단소에 다다른 순간, 오물로 얼룩진 농부의 온몸으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들어온 형형색색의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린다.
그때 농부가 느낀 감동은 우리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태양을 보았을 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특히 희미한 촛불에 의지하면서 살았던 그 당시에는 그 감동이 더욱 컸을 거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어우러진 훌륭한 유희는 지상의 존재를 훨씬 능가하는 듯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품도 역시 고딕 성당이 만들어냈던 환상처럼 범접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 내지 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환상을 만들어낸 재료는 다르다.
고딕 성당은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황금으로 만들어냈다면,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차가운 거울과 노즐이 드러나는 기계로 만들어냈다. 이 거대한 태양의 아우라는 어지럽고 복잡한 기계 설비가 만들어낸 환영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태양이라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느끼게 해 준 이 작품의 실체는 전혀 성스럽지도, 자연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작품은 자신이 인공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눈부신 태양에 압도되어 긴 터빈 홀을 걸어 내려가다 보면 우린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의 환상을 만들어낸 기계 설비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확인할 수 있다. 강렬하게 빛났던 태양 빛은 수백 개의 모노 주파수 램프였고, 온전하고 완벽했던 둥근 태양의 모습은 반원이었다. 천장을 가득 채운 거울에 반사돼 둥근 모양처럼 보였던 것이다. 공간을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게 했던 안개는 노즐이 그대로 드러낸 기계식 장식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환영의 실체는 이곳이 노을이 지는 보라카이의 해변이 아닌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미술관 안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지하게 해준다. 그것도 원래 화력 발전소 건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진실을 알아도 멋진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선택할 것이다. 이곳에서 펼쳐지는 경이롭고 숭고한 아름다움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올라퍼 엘리아슨은 관객들에게 환상과 함께 진실을 제공하고 그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상할지에 대한 결정권을 우리에게 넘긴다. 이 작품과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는 관람객에게 달려있다.
더 나아가 관람객은 그 공간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다. 바로 천장을 가득 채운 거울이 이러한 참여를 가능하게 해준다. 관람객은 작품 속에서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 그곳을 구성해나간다. 거울 속에 비치는 공간 중 일부를 점유한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이용해 멋진 작품을 만든다. 大자로 눕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트나 별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관람객 모두가 ‘몸’이라는 재료를 가진 하나의 아티스트가 된다. 관람객들이 자신의 몸을 이용해 만든 작품들은 작품 속 천장에 비춰서 그대로 반영된다. 내가 어떻게 동작을 만드는 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천장을 보는 일은 즐겁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옆에 있는 친구나 연인들과 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며 즐거워한다.
지금까지의 예술 작품들은 액자 속에서 고정된 채, 우리의 공간과 분리돼 동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수동적인 자세로만 그 작품을 감상했었다. 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건 안짱다리를 하건 작품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스스로 무력해지는 감상에서 벗어나 우리가 역동적으로 작품의 일부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이다. 작품 속에 우리가 구성해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창조적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터빈 홀에 설치된 거대한 작품은 고정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변화한다.
결국 이 작품은 멋진 황홀경에서부터 자신의 민낯까지 전부 보여주더니, 관람객에게 너도 함께 하자며 말을 건넨다. 그리고 이 작품은 관람객이 함께 한다면 언제든 변할 용기가 있다.
아트렉처 객원 에디터_손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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