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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Sep 27. 2018

완벽의 열망 VS. 미완의 걸작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통해 본 인간의 삶-

완벽의 열망 VS. 미완의 걸작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통해 본 인간의 삶-


차가운 추상으로 유명한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그림은 비단 미술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화가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 2>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다루는 만큼 우리에게 더없이 친숙하다.

몬드리안의 구성 연작은 주로 삼원색을 사용한 직사각형 면과 그 사이사이에 여백인 듯 접속사 인 듯한 흰색(때때로 회색) 면으로 구성된다. 검정 선은 그 면의 테두리를 두르며 가로와 세로의 격자를 만든다. 그렇게 화면에 나타난 수직선은 나무가 되고 남자가 되며, 수평선은 바다가 되고 여자가 된다. 자연과 인간이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화면 위에서 교차한다.



그림1 Piet Mondrian, 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 1930


르네상스 원근법의 발명 이후, 미술의 화두는 줄곧 2차원의 평면에 3차원의 공간과 깊이감을 구현하고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회화는 평면성을 강조하며 대상을 닮게 재현하기를 거부했다. 화가는 이 세상의 물(物)을 관조해보면 아무리 복잡한 상(像)이라도 점, 선, 면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이 기본 조형요소만으로 대상의 본질을 그려낼 수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몬드리안의 회화는 '추상미술', '구성주의',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로 불리며 근대 미술사에서 회화양식의 전환을 일으킨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또한 자연의 재현적 요소를 걷어낸 자리에 근본적인 우주 질서와 법칙을 '비구상적 형태'로 드러내고자 한 점에서 모든 사물에는 확고한 정형이 없다고 주창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맞닿으며 과학의 주제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운 좋게도 필자는 몬드리안의 그림을 실제로 감상할 수 있었다. 몇 해 전 독일 뒤셀도르프에 소재한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좌)그림 2 Piet Mondrian, Composition with Blue, 1937 (우)그림 3 Piet Mondrian, composition (No. 1) Gray-


필자가 보기에 몬드리안이 이룩한 위대한 미술사적 성취, 그의 작품이 주는 심미적 즐거움은 차지하고라도 그의 회화세계에 감명을 받을 만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화면에 온전한 면과 격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화가가 쉼 없이 기울인 '지우기와 덧칠의 반복'에 있다. 안료를 두텁게 바른 바탕 위로 거짓 없이 배여 나오는 실수들, 붓이 지나간 자리마다 전달되는 화가의 숨결, 완벽의 추구에도 끝내 감추지 못한 미세한 요철들, 그 미완의 완전성이란!

더욱이 몬드리안이 작품《승리 부기- 우기 Victory Boogie-Woogie》을 놓고 18개월 동안 씨름할 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던 친구들이 회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흡사 탈무드의 구절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는 말을 상기시킨다. 몬드리안의 친구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와서 보니 이 작품은 망가진 걸작이다! 몬드리안이 이 작품을 완성한 것만 수차례였다. 그러나 매번 그는 마무리한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여 친구들을 아연식색케 했다."(핼 포스터,《1900년 이후의 미술사》중에서)



그림 Piet Mondrian, Victory Boogie-Woogie, 1942-44


이제야 뭔가 알듯도 싶다. 어찌하여 몬드리안의 그림이 그토록 자연 초월적인 가운데 인간적일 수 있는가를. 보흐밀 흐라발의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믿음이 가득한 예수가 산 하나를 들어 옮기는 동안 노자는 화가의 지하실에 불가해한 지성의 그물을 펼쳐놓고 화가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숨을 참아가며 화폭에 우주를 풀어낸 것이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탓에 때때로 어지럼증을 느끼며.

몬드리안처럼 큰 세계를 면으로 선으로 정리하는 일이란, 머릿속에 내린 잔뿌리 같은 상념을 하나둘씩 제거해가는 과정과 비슷한 것일까? 정제되고 다듬어진 정신. 그 토대 위에 빛나는 여유로운 얼굴 아늑한 평화.

그러나 잔머리 한 올 없이 한 가닥으로 잘 끌어 묶은 어린아이의 머리 모양 같지는 않은 것 같다. 물질의 형상과 구조를 관념과 비물질적인 언어로 번역하여 내면에 바다 한 줄 긋고 나무 한 구루 세우는 일이 어찌 타자와의 부딪힘 하나 없이 말끔히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쩌면 화폭에 울리는 떨림, 선 위로 보인 그 미세한 요철들은 화가의 숨결과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 말고도 '나와 내가', '나와 외부항' 이 서로 부딪히고 교감할 때 비롯된 크고 작은 전율, 필수 불가결한 잡음 일지도 모르겠다. 제 갈길 가는 수평과 수직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 교차하면서 격자를 만들 듯 나와 내가, 당신과 내가 만나 관계를 만들고 그 교차점에서 나의 바다와 당신의 바다가, 나의 나무와 당신의 나무가 생기는 거겠지.

태초의 말씀으로 생겨나 창조의 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존재할 것. 수평선과 수직선. 반듯하고 완전한 삶을 향한 인간의 열망. 그러나 여전히 감출 수 없는 무수한 요철들.


"우리는 한계 속에 살다 무한 속에 죽을 것이다. 그러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우리는 무한을 누리다 한계 속에 죽을 것이다."(최승호,《수평선》)




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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