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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ul 25. 2019

한낮의 악마, 아케디아(1)

한낮의 악마아케디아(1)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 미술-  


존재하지 않는 목적지를 향하여 


https://artlecture.com/article/909


한낮의 동네 놀이터에는 좀체 사람들이 없다.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 있을 시각이고 부모들은 집 안팎에서 일하느라 한창 바쁠 때다. 노인들이 나와 쉬기에는 오후 햇살이 너무 강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한가로이 광합성을 하고 있던 차, 발밑으로 새까만 것들이 우글대는 게 눈에 들어온다. 개미떼다. 근처에 개미집이 있는 모양이다. 개미들은 줄을 지어 분주한 발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Giorgio de Chirico, The Enigma of the Hour, 1911



이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나는 전진하는 개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곧장 개미들이 결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따라붙는다. 언젠가, 개미들의 분주한 움직임에는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곤충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이에 따르면 목적 없이 떠난 개미들에게 목적지가 있을리 만무하다.

이어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말이 떠오른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만큼 인간에게 더 환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을까?" 나는 다시 전진하는 개미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것들 틈에 내가 있다.



Giorgio de Chirico, The Red Tower, 1913

 


드리워진 그림자 

머리 위에서 태양은 이글이글 타고, 그것의 뜨거운 광선이 교회의 종탑, 들쑥날쑥 어깨동무한 건물들, 잎이 풍성한 가로수들을 비춘다. 땅에는 뾰족하고 네모나고 동그란 그림자들이 마치 검정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해를 등지고 앉아 있다. 조르조 데 키리코의 그림에서 본 낯익은 그림자가 내 앞에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Giorgio de Chirico. The Arrival. 1912–1913


 

본래 그림자는 '나'를 원천으로 존재하나 눈앞에 드리워진 이것은 엄연히 나를 벗어나 존재한다. 자신의 기원을 무시함으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이것은 "본질적 실체에 대한 자국을 드러내는 기호(찰스 퍼스Charles S.Peirce)로서 서있다.


내 몸집보다 훨씬 크고 시커먼 그것이 입을 크게 벌린다. 슬픔과 권태로 가득 찬 동굴이 되어. 오래 삭힌 분과 멸시의 기억이 보태지면서 동굴은 점점 거대해 진다. 나는 이제 그것에게 내 자리를 내주어버림으로써 송두리째 사라지고 없다. 


“아케디아는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나타나는 무기력의 증상을 뜻하는 용어로써, 오늘날 권태(ennui)의 기원이 되었다고 여겨지는 개념이다.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아케디아는 데 키리코의 시대에 팽배했던 권태에 대한 원형을 제시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데 키리코 도시정경의 시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외형적인 긴 실루엣에도 불구하고, 밝음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는 ‘그림자 이미지(imageofshadow)’ 의 부조리한 특징은 자연적 시간을 벗어나 버린 데 키리코의 수수께끼 같은 도시 광장을 ‘한낮의 무기력’이 만연해 있는 아케디아의 상태로 견인하는 단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정경의 공간에서 두드러지는 허무(nothingness) 역시 아케디아의 대표적 특징이라는 점에서, 아케디아는 데 키리코 도시정경의 시간 및 공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개념이 될 것이다” (출처: 한선경, <조르지오 데 키리코 도시정경 연구: 아케디아와 멜랑콜리 개념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미술사 석사학위 청구논문, 2005)


2편에서 계속




글_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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