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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Sep 07. 2019

에릭 요한슨:Impossible is Possible

이성의 건너편, 저 너머로

에릭 요한슨 : Impossible is Possible - 이성의 건너편, 저 너머로

https://artlecture.com/article/1019


서구 지성사의 역사와 이를 뒤따라온 예술의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육체의 영역은 괄시되곤 하였다. 인간의 동물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육체보다는 그들과 차이를 보여주는 정신이, 그리고 주관성이 강조되어 불완전하고 유동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정념 대신에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객관성을 필두로 하는 이성과 합리성이 그간의 역사에서 강조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별의 차이, 그리고 민족과 문화 간의 우열이 구별되기도 하였으며, 육체와 정념을 강조한 예술들은 나약한 것, 천박한 것 등으로 격하되곤 하였다. 언제나 예술에서는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고 이해하였으며, 또한 정복했음을 드러내는 이상화 작업이 주를 이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옮겨 담은 것이 아니라, 이를 더욱 지고한 것으로 고양시키기 위한 수학적 연구가 동원되었다. 이에 불완전한 자연이 아닌, 흔들림 없고 절대적이며 영원으로서의 자연이 작품 속에 정초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합리성과 이성을 바탕으로 이뤄진 서구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우생학과, 이 같은 실측으로 판단되고 계량된 것들 이외의 가능성을 전면 불허하는 전체주의로의 이행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도래하였다. 이에 지성사에 있어서는 실존주의가 열어젖혀졌고, 창시자에 다름 아닌 샤르트르의 실존과 자유가 너무 정신에 치우쳐있다는 것이 비판으로 지적되어, 우리가 가진 육체라는 필연을 간과하지 않은 메를로-퐁티의 실존주의와 절충을 이뤘다. 그리고 예술계에 있어서는 이성과 의식 너머의 무의식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으며, '고결한' 지성이 아닌 '천박한' 육체와 본능에 집중하는 초현실주의가 열어젖혀졌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온전한 육체의 복권은 이뤄지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현상계는 온갖 제약으로 가득하기에, 이 같은 굴레에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초현실주의는 여전히 그 영향력이 지대하다. 



19세기 중후반에 처음으로 사진이 대중화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사진은 차가운 객관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다. 회화와 조각이 아무리 제작자의 정념을 소거해내더라도, 결국에는 재현을 함에 있어서 창조자의 주관은 섞여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진은 카메라를 든 주체가 담아내고자 하는 일련의 취향을 제외한다면, 포착하는 대상을 모방하고 재현함에 있어서는 어떠한 주관성의 개입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 같은 사진에 의해 회화도 크게 영향을 받아서, 당대의 인상주의자들은 사진기의 태도처럼 작품 속에 어떠한 의도도, 내용도 담아내지 않으려는 객관적인 화풍을 지향하였다. 시각이 주관적인 것이라 할지언정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한 눈을 드러내는 것일 뿐, 지각된 세계를 기계적으로 옮겨 담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진기의 태도 그 자체에 다름 아니었다. 당대에는 분명 사진에 예술가의 서명이나 손길이 닿을 여지가 없었다. 그러한 개입은 사진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었지, 사진 내부로는 침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서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이행 및 포토샵과 같은 그래픽 툴의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사진은 객관적인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여전히 객관적인 세태를 전달하는 사진가도 존재하지만, 동시대의 많은 사진가들은 자신의 작업물에 주관적인 표현을 가한다. 대상에 합성을 행하는 콜라주, 대칭으로 복사하는 데칼코마니, 색채를 비자연적이고 창작자의 내면과 정서에 관련된 색채로 뒤바꾸는 표현주의 경향 등 회화에서 탐구되었던 여러 작업방식과 화풍은 이제 사진에서도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동시대의 사진은 더 이상 차가운 세계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바라보는 주관적인 세계를 드러내기도 하고, 물질적인 세계 이면을 들춰내기도 한다. 



이번 여름 한가람 미술관에서 스웨덴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에릭 요한슨 특별전에서 펼쳐지는 세계도 이와 같다. 육체가 갈망하는 것, 이성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열망하는 우리의 꿈이 담긴 세계가 광대히 펼쳐진다. 1985년 스웨덴 태생의 에릭 요한슨은 동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사진작가 중 한 명일 것이다. 에릭 요한슨은 여러 초현실주의자들 중에서도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와의 접점이 아주 크다. 후앙 미로와 같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선호했던 의식과 이성의 영역 대신 무의식의 영역으로 침잠하여 즉흥성을 강조했던 오토마티즘과는 거리가 멀고, 일반적인 의미의 개념, 사물, 인물들의 관계를 '추방'하고 재배치하는 데페이즈망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그가 예술대학의 커리큘럼을 밟지 않고, 찰머스 공과대학을 졸업했다는 측면이다. 그래서 요한슨의 작품세계는 분명 초현실주의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며 공상적인 측면이 대두되긴 하지만, 그 작업방식에 있어서는 실제적인 과정이 도드라진다. 그는 작품세계에 담아내는 사물들을 실제로 촬영하고 이를 합성 및 편집, 리터칭하는 작업을 추구하는데, 그래서 종합된 작품세계는 우리의 실제와 유리되어있지만, 각각의 오브제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실제로 마주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같은 실제적인 방식은 우리의 상상력이 온당 현실에서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또한 무한함보다는 유한함을 강조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한함과 현실과 유리될 수 없는 필연 속에서 무한한 환상을 추구함으로써, 끊임없이 절대적 운명에 거스르고 도전해야만 하는 인류의 여정을 녹여낸다. 



,leap of faith, 2018
(좌)  leaving home, 2014 / (우)  cumulus & thunder, 2017



요한슨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바로 해방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광대하고도 절대적인 대지가 인류에게 부여한 중력이라는 족쇄를 홀가분히 벗어던지고 청명한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경쾌한 인류 및 지상포유류들의 모습이 포착된다. <leap of faith>를 보자, 대지와 안개, 산등성이의 협곡들은 거대하며 뾰족뾰족 날카롭게 그려져 있다. 이 같은 풍광은 나약하고 작게나마 그려진 인류와 풍선을 금세 부셔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이러한 제약으로부터, 그리고 위협으로부터 인류는 훨훨 날아간다. 본 작품 속에서 주목해야하는 또 다른 사물은 오른편 하단에 있는 철조망에 다름 아니다. 다 헤어져서 사실상 경계선으로서의 역할은 상실한지 오래다. 이 같은 철조망이라는 경계가 일깨우는 것이 우리의 한계를 규정하거나, 이성과 무의식의 구분을 구획 짓는 것이라면 요한슨은 이 같은 철조망을 찢어내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러한 철조망을 찢어내는 작업으로서 조명되는 것이 종속되어 있던 것들이 비로소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소재라 할 수 있다. <leaving home>과 같은 절대적으로 대지에 종속되어 움직여선 안 될 사물들이 서서히 마치 자유를 위한 여행을 떠나는 듯한 사진을 구성해내기도 한다. <cumulus & thunder>와 같은 작품에서도 이 같은 해방은 도드라진다. 양들에게 종속되어 있는 털들이 비로소 해방되어 하늘 위 구름이 되어 두둥실 떠올라가며 창공을 유유히 헤집고 나아간다. 



expectations , 2018


(좌) arms break, vases don't, 2008 / (우)  iron man, 2008



이 같은 자유를 구성하는 요한슨의 작업에 있어서 형식도 중요한데 바로 상승과 하강하는 운동감의 대비라 할 수 있다. 요한슨의 작품은 비교적 둔탁한 하단으로부터, 경쾌하고 가뿐한 상단으로 나아가는 구도와 운동감이 도드라진다. 이 같은 여정을 떠나는 사물들을 살펴보면 구조에 의해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은 즉자들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머물러야 할 거처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은 집과, 양으로부터 자신들의 지켜낼 역할을 부여받은 털들은 이 같은 즉자로서의 역할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떠나간다. 이 같은 사물들에 국한되던 자유의 테마는 인류를 포착함에도 드러난다. 하지만 요한슨은 인류에 있어선 즉자가 대자로 향하는 모습보다는, 즉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시대 인류의 초상을 담아내는데 주력한다. <arms break, vases don't>에서는 사물을 지키려다 깨져버린 자본주의 내에서 위치가 주객전도 되어버린 인류의 초상을 파괴적인 상상력으로 구성한다. 또한 타인의 시선에 맞춰서 자신을 다림질 하는 듯한 <iron man>, 과 같은 작품들에서는 즉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개조하는, 신체변형이라는 테마로 구조에 의해 재단되고 규정되는 동시대 인류의 삶을 풍자한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무수한 기대감으로 차있는 것 같지만 똑같은 외형의 다채롭지 못한 표정만을 띤, 차이가 없는 즉자적 기대감만이 복제되어 무수한 <expectations>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이 구축하거나 구조가 만들어낸 프레임에 끼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즉자로서 우리의 초상을 포착한다.       



(좌) breaking up , 2013 / (우)  endless reflections , 2015



그리고 이렇게 초상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에서도 일련의 구도는 도드라진다. 그것은 하단을 강조하는 구도에서 도드라지는 갑갑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또 다른 구도를 즐겨 쓰는 요한슨의 작품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구축해낸 숭고한 구도에 다름 아니다. 대지를 포착하는 요한슨의 시선에서도 얼핏 느껴졌지만, 그는 비교적 거대한 세계, 자연을 구축해낸다. <breaking up>과 같은 작품에서는 프리드리히의 <북극해>가 연상되고, <endless reflections>와 같은 작품에서 남자가 서있는 포즈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와 유사하다. 전자에서는 인류만큼이나 나약하게 그려진 집이 무력하게 자연에 의해 파괴되어버리고, 후자에서 인류는 하늘과 바다가 쉬이 구분되지 않은 풍경 속에서 길을 잃어 버렸다. 요한슨의 초현실주의는 자연의 불가해함과 미지의 두려움을 더욱 극대화하는데 사용되며 이는 자연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구도 및 자연의 신묘한 요소들을 조합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뤄진다. 또한 자연 뿐만 아니라 이 세계의 절대적 원리에 다름 아닌 시간을 <lifetime>에서와 같이 극단적인 구도를 통해서 포착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세계는 <impact>에서처럼 자연재해는 인류의 초상을 분열되고 해체된 형태로 비춰낼 정도로 강력하다. 이로써 인류를 보다 겸허히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자연을 우리가 해할 수 있음을, 이로써 우리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는 경고가 <demand & supply>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좌) nightmaere perspective , 2010 / (우)  set them free , 2012



요한슨의 세계, 거대함과 함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러 세계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계절을 네 개로 나뉘어서 시간을 나누고, 의식과 무의식과 같은 혼재될 수 없는 세계 또한 나누곤 하며, 예술에서는 3차원과 2차원은 명백히 차이가 존재하는 세계에 다름 아니다. 허나 요한슨의 세계에서는 이 같은 경계들이 혼재되어 있고, 무엇보다 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nightmaere perspective>에서는 꿈속의 꿈에 다름 아닌 미장아빔처럼 해석될 여지도 있지만 꿈이 현실을 관조하거나, 현실에서 꿈을 바라보는 섬뜩한 시선처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재이며, 무엇보다 바라보는 행위는 끝나질 않으며 꿈에서 현실로, 또 현실에서 꿈으로 무한히 순환한다. <set them free>는 2차원의 해방과 3차원과의 경계의 구분을 무디게 만드는 것을 보여준다. 감상자가 1차적으로 마주하는 3차원적인 환영의 사람은 그 속에서 2차원에 다름 아닌 명백한 액자를 들고 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며 평면으로서의 2차원과 입체로서의 3차원의 경계는 무너진다. 작품으로 구축된 3차원이 현실이라면 그 안의 2차원으로서의 액자는 곧 예술이다. 현실과 예술의 분리, 허나 예술이 이내 곧 현실의 영역으로 침범한다. 과연 예술은 독립적일 수 있을까, 현실에서 지양분을 얻으면서도 한편 현실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가. 이 같은 요한슨의 미학은 20세기를 대표하는 판화가 마우리츠 에셔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impossible escape>나 <under the corner>는 에셔가 즐겨 사용한 공간들이 보다 직접적으로 오마쥬되어 있다. 다시점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있지만 3차원을 2차원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3차원의 시점들이 혼용되어 있는 세계, 현실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세계.       



(좌) closing out , 2014 / (우)  the cover-up, 2013



이를 요한슨의 서정적이고 전원적인 색채로 녹여냈다 할 수 있을 <closing out>을 통해서 살펴보자. 중경에는 널따란 대지가 펼쳐져있지만, 상단부에는 폐쇄성이 도드라지는 벽과 조명이 존재한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분명 작품들은 닫혀있다. 완결되어있고 빠져나갈 여지없는 세계이지만, 그 세계의 내부에는 다시점을 통해서 무수한 가능성이 공존한다. 요한슨이 주목하는 초현실주의가 바로 이 같은 닫혀있는 세계일지언정 무한히 열려있는 가능성, 대자로의 나아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변이를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개인이 주변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변형시켜 나가는지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daybreaker>에서는 개인이 직접 밤에서 여명을 밝혀내고, <expecting winter>에서는 계절을 수놓는다. 그리고 <the cover-up>에서는 침울하고 음침한 3차원의 현실에 밝고 화사한 2차원의 가상을 커튼마냥 장식한다. 3차원이 현실이고 2차원이 가상으로써 굳이 분리해야 할까.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으려면 우리는 경계를 넘어야한다. 경계를 넘어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길어오고, 우리의 현실에 도입해야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합리적인 사고로 계산하여, 그리고 치환하여 바라볼 필요도 없다. 첨단시대라곤 하지만 여전히 요한슨의 세계처럼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도래시키는 님프와 신들과 같은 여전히 미지 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을 일깨운다면 잿빛 문명에 찬란한 색채를 덧입힐 수 있으리라. 


fishing with granpa, 2018



그래서 요한슨의 세계는 결코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사물과 인물들을 촬영하여 그것을 디지털을 통해서 조합하는 실제적인 작업방식, 그리고 환상과 공상을 비추면서도 우리의 현실을 비춰내는 냉철한 시각이 그의 몽환적인 세계 속에 숨겨져 있다. 그래서 그의 최근 색채는 현실의 자기 자신을 비추는, 보다 자전적인 테마도 엿보인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하고 고기를 구워먹던 시간이 합치된 <fishing with granpa>의 초현실주의는 우리의 명쾌한 기억이 아니라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는 기억의 속성을 일깨우고, 아스라한 유년기의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분명 성인이지만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오브제들이 불가해하고도 무시무시한 안개 속의 세계 속에 흩어져 막막함을 일깨우는, 마치 유년기의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를 환기시키는 듯한 <drained memories>와 같은 작품에서는 우리의 잠재의식에서 소재를 길어온다. 그래서 요한슨의 작품은 시각적인 흥미도 분명 배제할 수 없지만 골똘히 몰입하다보면 침잠해있던 나와 우리, 세계가 서서히 부상한다. 그래서 요한슨의 작품은 보다 긴 시간을 들여 몰입하면 감상자들에게 사유의 장으로도 기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유의 장으로서 본 전시가 작용하기에는 한계가 따른다. 전시에서 사진촬영을 허용한다는 것이, 그간 수동적이고 딱딱한 전시환경을 극복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관람을 조성한다는 의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례를 봤을 때 득보다는 실이 더 많아 보인다. 전시의 가장 큰 역할은 여전히 작품과 감상자를 매개하는 관람환경의 조성이 제 1 본령이 되어야만 한다. 사진촬영은 언제나 후순 이어야하지만, 모든 작품들에 사진촬영을 허용한 전시들은 언제나 관람이 뒷전이 되어 버리고, 몰입을 원하는 감상자의 집중을 줄곧 깨뜨린다. 그리고 본 전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많은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는 좋은 마케팅임에 틀림이 없지만, 사진 관람을 위한 공간이 아닌 그저 사진 찍는 공간으로 전락한다면 본 전시공간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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