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한 예술과 대중
2018 광주비엔날레 : 상상된 경계들 (1) 본전시관 - 화해한 예술과 대중
*상상된 경계들
올해로 12회를 맞이하는 광주비엔날레의 이번 테마는 '상상된 경계들'이다. 본 테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론인 상상된 공동체에서 기인한 제목으로, 그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근대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상된 공동체'로 보는 것으로, 종교의 몰락 이후 기댈 곳이 없게 된 유동하는 인간은 그 의지할 곳을 민족으로 봤다고 주장한다. 그 민족은 인쇄술의 발달 이후 전파되는 활자매체 속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실상 동일한 언어의 공동체가 민족의 기원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근대화의 흐름에 맞춰 서구국가들의 우월한 민족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전파하고자 하는 전쟁의 당위성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쇄술의 발달로 형성된 민족성이라면, 인쇄매체 이상의 매스미디어로 전 세계인들이 하나 되는 동시대에도 과연 민족성이란 게 유지될 수 있을까? 그래서 그저 상상되었다는 민족성의 허구성을 강조하고, 이로써 그들이 띠었던 보편성을 무너뜨리며, 특히나 동시대에 민족성은 더 이상 유효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러한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의 민족개념을 모티브로 삼아 본 비엔날레는 동시대의 엄격한 국경 및 국적문제랄지, 각 민족 간의 갈등, 최근 불거지는 고립주의의 물결을 지탱하는 경계들의 속성이 희미하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다 범인류적인 화해를 외치는 작업을 행한다. 이는 보다 동시대에 수면 위로 부상하는 개별자들의 사례를 통해서, 그들이 구축해놓은 보편성의 신화를 희미하게 만들기도 하고, 여러 경계들과 이데올로기의 역사에 선행해야 마땅할 주체적인 개인의 역사에 주목한다. 전자는 후기식민주의적인 담론을 통해서, 탈서구적이고 본인들의 고유한 역사 및 민속을 드러내는 한편,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에 있어선 서구와의 화해를 통해서 그들의 민속을 결코 고립적인 위치에 두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다채로운 개별의 삶 그 자체를 아카이브화 하여, 그들의 다양한 삶 자체가 난민, 정치범, 추방자와 같은 단순한 보편적 개념으로 규정지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규정됨으로써 파생되는 경계의 근거들을 희미하게 만들고, 이러한 개별의 입장들이 총체를 이루는 것이 우리 세계임을 보여주며,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고 있는 동시대에 화해와 봉합을 촉구하는 것이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지는 유럽에 불어 닥치는 극우열기와 미국의 트럼프 시대, 국내 또한 남북이나 남여와 같은 '경계'를 통한 분열이 고조되기에, 이러한 우리 세계를 투영하는, 보다 정치적이고 그간 대중들과 유리되었던 예술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전시구성
본 전시는 2016년도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유산을 계승한다. 그것은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 독점적인 전시체계에서 벗어나, 보다 광주 자체를 거대한 비엔날레의 장으로 펼쳐내려는 시도로써, 이는 이번 비엔날레의 메인 전시관을 광주비엔날레 본전시관과 ACC로 나뉘어서 전개한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갤러리 및 대안공간과의 협업을 통하여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준다는 점을 통해서 드러난다. 우선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관의 전시로, 이전처럼 5관 구성을 취한다. 이러한 5관 구성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구성을 보여주는데, 과거와 동시대, 미래의 시간성과, 우리가 근시일의 미래에 마주할지 모르는 사이버 스페이스로 이행된 우리 세계 또한 비춰낸다. 그리고 이는 거대 권력들의 거대한 신화보다는, 개별의 역사들에 귀를 기울이며, 더욱이 5관에서는 비엔날레 본인의 역사에 주목한다. 과연 우리가 작은 개별들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상상된 국가들 : 모던 유토피아 · 과거 · 아도르노
우선 1관과 2관이다. 이러한 1관과 2관의 제목은 상상된 국가들 : 모던 유토피아로써, 주목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이다. 특히나 1관에 과거의 아카이브들이, 2관에 과거와 연속선상에 놓인 현재가 제시되며, 본 전시의 연대기 구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1,2관을 관통하는 주요한 담론은 동일시의 폭력이 작용했던 방식과, 과거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1,2관의 주제 의식은 예술과 사회와의 보다 친밀한 관계, 특히나 예술이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깊이 천명하였던 아도르노의 미학을 통해 더욱 깊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 아도르노는 개별자들의 목소리를 은폐하고 보편성의 신화를 편찬하는 과거의 유산으로부터 파시즘이 기원됐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예술은 아방가르드이다. 당대의 아카데믹한 예술들과 대중예술들의 심미성은, 사람들로부터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일체의 개별성이 의도적으로 소거된 예술들로 이러한 예술들의 움직임으로부터 파시즘이 감지된다. 그의 입장이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러한 특성을 갖는 예술들은 당대의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시종에 다름 아니요, 이렇게 흘러온 예술의 역사 속에서 2차 대전의 인류가 비인류로 추락한 비극의 전개가 포착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선호한 것은 보다 당혹스러움과 불쾌감, 숭고함을 일으키는 아방가르드한 예술들로, 이러한 아방가르드한 예술들은 당대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자 하는 바를 지속적으로 일깨운다. 고통을 기억해야 한다는 그의 입장도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들이 일으키는 불쾌감과 고통, 그리고 파시즘의 비극과 연관된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가능한가?"라는 그의 유명한 질문처럼, 그는 홀로코스트의 비극 이후에 예술은 더더욱 고통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쉰베르크의 불협화음처럼, 불쾌감과 고통을 수반하는 형식을 통해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인류가 비인류로 추락한 그 기억을 망각해서는 안 되고, 이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며 경각심을 일깨우며 사회를 후퇴하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로 읽어낼 수 있는 1관의 주요한 테마는, 과거 보편성을 띤 소수의 국가권력으로부터 시민들이 당해야했던 폭력이요, 오만하고 독선적인 서구중심적인 역사가 타자로서의 국가들에게 일으킨 폭력에 주목해야 한다. 1관에서 다뤄지는 주요한 국가들은 동남아권과 남미권이 주요하며, 이들은 2차 대전 이후 서구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고 급격하게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루며 성장하는데, 그 과정에서의 상흔을 포착하는 작업들이다. 가장 먼저 마우로 레스티프, 레이스 마이라의 작품들을 보자. 이들 각각은 멕시코와 브라질이라는 상이한 남미 국가들을 포착하지만 그 속에서 포착되는 것은 상이한 두 국가임에도 유사해 보인다. 바로 모더니즘 건축의 풍광이다. 그들 국가들이 신속히 산업화를 이루며 채택한 방법론은 다름 아닌, 그들을 식민통치한 서구의 방법론이요, 이는 범세계적인 흐름으로써 그들이 결코 거부할 수 없었다. 프리다 칼로나 디에고 리베라가 그들의 민속과 역사, 삶과 문화를, 그들 고유의 문법으로 풀어내는 후기 식민주의적 미학은 결코 건축에 적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모더니즘 건축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서구의 풍광들과 다른 바를 읽어낼 수 있을까.
레스티프의 작품 속에서 포착되는 건축은 아즈텍의 폐허인 틀라텔로코 위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유적의 파괴가 이루어지며 들어선 획일적인 모더니즘 건축들에서는 폭력이 감지된다. 더욱이 1968년 틀라텔로코에서 일어난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틀라텔로코 대학살의 기억은 우리는 공허함을 통해서 마주할 수 있다. 이는 대단히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운 공간들을 점유하지 못하는 기이한 쓸쓸함을 통해서, 부재의 불편함을 통해서 마주한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이성의 시대가 문을 열고 이 같은 이성의 시대를 상징하는 개념이 모더니즘에 다름 아니었고, 이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전문화된 문화의 육성 및 문명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움직임 이었다. 하지만 그 모더니즘 건축을 누려야 할 그 인류는 어디로 갔는가. 모더니즘이 실제 삶과 유리된 비정치성의 한계가 지적된다. 레이스 마이라의 작품도 이와 유사한 맥락에 놓인다. 정치권력의 관저를 이루는 모더니즘 건축은, 서구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움직임과 그들의 근대화가 성공했다는 선전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랜드마크들은 오히려 그들을 식민통치 했던 서구의 방법론을 답습하고, 그들과의 경제적인 외교를 위한 도구에 다름 아니기에,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식민의 역사를 포착한다. 결국 우리가 이 두 남미작가들의 작품들에서 읽어내는 것은 기형적인 아름다움의 고통과 부재의 고통, 그리고 서구중심적인 동일시의 폭력이다. 더불어 에이미 시켈의 영상작업들 또한 살펴보자. 그 아름다운 모더니즘 건축 및 가구들은 그저 전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 공간들은 텅 비어 있어, 그것들 자체가 물신화되고 그것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할 인물들은 부재해있다. 연결되는 이후의 작품에서 인간들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들은 그 가구 및 건축들을 점유하지 못한다. 그들은 관람객의 형태이거나, 그것을 단지 소유하고 숭배할 구매자와 경매인의 형태로 모더니즘은 우리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역사의 고통을 응시하는 작품들은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매체성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알렉산더 아포스톨의 영상 작품들은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러한 작품들이 충분히 채색 사진 및 영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백이라는 매체나 보다 빛바랜 색채를 강조한 바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색채도 띠지 않는다는 그의 작업, 또한 레스티프와 마이라의 작업 또한 관통할 수 있을 그 매체성은, 서구가 앗아가 버린 그들 고유의 다채로운 문화의 사멸, 이로 인한 획일화된 세계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고, 이는 서구 중심적으로 흘러가는 세계화의 흐름을 지적한다. 이러한 매체성과 더불어 아포스톨의 작품은 보다 심미성을 지향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러한 심미성조차 잊혀지고 흉물이 되어가는 동시대 모더니즘의 쇠락을 드러내어, 영원불멸할 미의 이상의 추락을 보여준다. 필리핀 출신의 피오 아바드의 작품은 보다 팝아트적인 성격과 일조하는데, <오!오!오!(부당함의 보편 역사)>에서는, 독재자 마르코스 부부가 대외적인 선전 전략으로 내세웠던 필리핀의 이미지들이, 결국 서구의 흔하디흔한 공산품을 물신화하며 서구의 시선에서 보다 조야하게 보였을 그 수치의 역사를, 한편 그 수치로 얻어낸 수치스러운 경제원조의 역사와 서구와 비서구간의 위계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카를로스 가라이코아의 <사진-지형학>을 본다면, 보다 이상적인 모더니즘 도시의 디오라마를 보여주지만, 그 디오라마에는 색채가 없고(흑백의 매체성) 대단히 바스라지기 쉬운 스타이렌수지라는 매체로 이루어져, 동일시의 폭력으로 이루어질 그 이상의 제국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대단히 바스라지기 쉬운 이상임을 드러낸다.
한편 이러한 1관이 언제나 잃어버린 역사의 쓸쓸함과 부재, 상흔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역사로부터,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 기반으로부터 그 고유의 민속을 드러내려는 움직임 또한 포착된다. 이러한 바는 알렉산더 아레치아의 <마스크 시리즈>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서구화를 토대로 이루어진 도시들의 여러 건축들을 조합한 테피스트리로써, 이러한 마스크의 형태는 원시예술 속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원색성과 단순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은 고조된 분열이 아닌, 서구가 이뤄놓은 동일시의 폭력과 화해하며, 그 속에서 공존하는 문화와 되찾은 민속을 보여준다. 레바논의 마르완 레치마우이의 <블레이즌>도 이러한 민속을 보여준다. 허나 그 민속성은 레바논이라는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민속성이나, 베이루트시라는 하나의 도시만을 대표하는 민속성이 아니다. 그 민속성은 베이루트시를 이루는 59개 마을 개개의 민속으로서, 그들 각각 고유의 건축들과 문화를 깃발의 형태로 전시한다. 한 국가와 문화를 이루는 것이 결코 하나의 보편성으로 그리 간단히 귀결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두 작가의 작품들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서 보다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다는, 그 형식에도 주목할 법 하다.
*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 · 현재
이후 2관은 보다 이러한 담론이 동시대를 비춰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본 전시의 특징이라면, 각 전시관들의 '경계'또한 희미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연속선상 속에서 그리 쉽게 구획지어지지 않으며, 전시 자체도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딘 Q.레의 <식민지>라는 영상 작품을 통해서, 1관에서 나아간 2관의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다. 1관의 영상 작품들이 역사에 대한 상흔의 아카이브로써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다소 수동적으로 정보를 획득하는 감상자의 위치에 놓인다면, <식민지>라는 작품이 소개된 공간구성은 감상자가 어느 동선에서 감상하든 그 그림자가 작품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 보다 감상자의 현존이 작품에서 얘기하는 동시대성에 침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2관이 보다 현재로, 동시대로 나아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식민지>나 라팔 밀라치의 <백마를 쫓아서>시리즈를 통해서, 이러한 과거의 상흔을 결코 해결하지 못한 동시대와 마주한다. 1관의 주요 테마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기였다면, 2관은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현재를 마주하며 느끼는 고통이다. 이러한 과거로부터 재건이 시도되지만, 여전히 서구나 열강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독립한 소국들에서는 식민주의의 연장선이 포착된다. 더욱이 서구의 식민지배 속에서, 그리고 갑작스러운 독립 이후 불안정한 정치체제 속에서 강요된 일반 시민들의 희생 또한 여전하다. 과거와의 연장선상에 놓인, 그리고 그것을 결코 청사하지 못한 현재 속에서 우리는 고통을 느끼고, 결국 이러한 고통은 우리 동시대의 정치권력들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향한 불만으로 터져 나온다.
*블로흐 · 미래
이러한 각 관의 연속선상과 모호한 경계는 3관에서도 마찬가지로 스튜디오 리볼트의 <앉으세요>가 가장 대표적이다. 여전히 동시대를 비춰내는 작품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을 주창하지만, 그러한 자유를 위해서 미국을 굴욕적으로 숭배해야할 일종의 노예정신과, 특히 이로써 구획 지어지는 백인과 유색인종간의 위계, 내국인과 외국인 및 이민자, 난민 간의 위계가 포착된다. 더욱이 본 작품이 통렬한 것은 공간 배치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간접체험하게 만드는 것으로, 대단히 좁은 입구를 통해서 배타적이고 비인도적인 이민정책을 드러내고, '앉는' 방향을 통해서 미국이 착석시킬 그 자리는 맹목적으로 미국을 향한 숭배만이 제시되는 작품을 마주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미국이 결코 주목하지 않고 외면하려 하는, 난민 및 이민자들이 겪는 그들의 척박한 삶과 정치범 및 난민들을 향한 그들의 가혹한 추방정책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러한 연속선상 속에서도 3관은 미래 및 방향성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아도르노의 미학과, 다른 한 편에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미학이 자리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블로흐는 아도르노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사회 참여적 역할을 강조하였으나, 그 방향성은 다소 달랐다. 그에게 예술은 '예측된 상'으로써 다가오지 않은 미래 및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우리가 욕망이자 무의식의 현현으로써 밤꿈이 있다면, 이러한 예술은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낮꿈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블로흐의 미학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가능한' 미래라는 점이다. 밤꿈이 아니라 낮꿈이라는 것도 꿈의 변천 가능성을 인정하되, 밤꿈의 무의식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라는 책임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실현가능한 미래로써, 무의식 및 본능이 갈망하는 제의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바가 제시된 미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예측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미래는 보다 냉엄한 현실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의 연속선상에 있는 현실의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미래의 제시로서, 현실에 대한 반성이 그 구체적인 방안이라 할 수 있을 테다. 이러한 3관의 특징은 미래의 제시 및 현재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성의 제시가 가장 두드러진다. 3관의 서문을 파격적으로 장식하는 수퍼플렉스의 <외국인 여러분, 제발 우리를 덴마크 사람들하고만 남겨두지 마세요>라는 포스터를 보자. 본 작품은 2002년 제작된 작품으로써 16년이 지난 작금에 다시금 전시되는 작품이다. 이는 여전히 미해결된 이민자를 향한 내국인들의 적대적인 태도와, 특히나 동시대에 불거지는 난민을 향한 적대적 태도 및 고립주의에 대한 엄포이다. 더불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관점의 톰 니콜슨의 <나는 인도네시아 출신입니다>라는 거대 디오라마에 주목하자. 합성수지로 조형된 인물군상 속에서 우리는 그들의 어떠한 국적도, 인종도 밝혀낼 수 없다. 모든 인종에 초월적인 흰 색은 인도네시아 출신이라는, 그 출신과 민족성, 인종이 대단히 무의미하다는 초탈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리고 난민들이 이러한 이상향을 염원하고 이국으로 향하는 '현실'과, 그러한 난민들과 뒤엉킨 어떠한 폭력과 분열도 보이지 않는 다양한 군상들의 공존을 통한 이상 공동체가 펼쳐진다. 표현하려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보도하는 사회, 운동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보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펼쳐지는 사회, 무엇보다 중간의 거대한 아기를 통해서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긍정하는, 실현 되어야 마땅할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3관의 작품들은 우리는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한다.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 태어나서 누리는 행운 및 특권을 우월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그 행운이 있기에 같은 인간으로서 베풀 수 있는 온정과 그럼으로써 나아가는 모든 국가, 민족, 인종 간의 평등, 그리고 이를 통해 모호해지는 국경의 경계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비폭력이요 화합이며 다원화다. 이러한 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로 스베이 사레스는 <카사바 임시 수용 캠프>를 통해 본인이 겪어낸 난민으로서의 기억을 보여준다. 그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제작하는 작품은 <침묵&외침>과 같은 화합의 테마가 깃든 작품들이다. <침묵&외침>은 국경을 넘어서기 위한 난민의 위장에 다름 아니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들은 불교에서의 정화를 상징하고,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끈질긴 적응력을 보여주는 연꽃이다. 후자의 경우 난민들의 처절한 생명력이기도 하지만, 전자의 테마는 그들을 향한 멸시 및 분열이 고조된 사회를 정화하는, 그들이 마주한 폭력적인 방법론을 결코 답습하지 않을 지향해야 할 방향성이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태국의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위라세타쿤의 영상작업을 주목하자. 그의 <불가시성>에서 우리는 동굴 속에 갇힌 거산 같은 답답함과, 이와 더불어 강조되는 어두움에서 기인하는 암담함, 그리고 병자의 이미지 등 암담하고 가망 없는 미래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 뒤에는 "반란을 일으키게 했던", "꿈속에서 빛을 보다.", "잠에서 깨어나는 꿈"과 같은, 현실의 변혁 가능성과 미래에 상응한다. 이러한 암담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변혁해서 동굴 바깥으로 나아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의지가 제시되는 것이다.
*종말들 :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참여 정치 · 보드리야르 :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
이후 4관 또한 테마는 보다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허나 3관의 미래가 보다 방향성 및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물질계에서 이루어졌다면, 4관의 미래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즉 물질계에서 가상현실로 이행될 사이버 스페이스를 포착하고 예견한다. 이에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시뮬라크르 이론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4관을 이루는 많은 이미지들은 현실을 모방한 플라톤식 표현이라면 이데아로부터 '이중모방'된 가상들이지만,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가상과 이중모방된 것들의 독립된 잠재력에 주목한다. 이러한 이중모방의 결과물들이 결코 현실을 온전히 모방하지 않듯, 오히려 현실을 왜곡하거나 이상화하여 보여주기 때문에, 모방된 현실과는 무관한 잠재력을 지니고 오히려 이러한 시뮬라시옹의 결과물들인 시뮬라크르들을 물질계에서 모방한다는 것이다. 즉 오히려 시뮬라크르들을 이데아로 삼으며 역전된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4관에서 주목하는 바는 그렇게 시뮬라시옹된 결과물들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는 것이다. 시뮬라크르들이 온전히 새로운 진리를 드러낼 수 도 있지만, 그것이 왜곡이나 이상화라면 소거된 바를 통해서 창조되는 거짓 진실과도 관련될 수 있으며, 현실 유리적이라 여겨진 것의 이면에는 이데올로기의 손아귀가 내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아영의 <다공성 계곡>과 <이동식 구멍>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손아귀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보다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광고영상처럼 보이는 비디오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과정이 드러나는 비디오 각각이 드러나는데, 우선 전자의 경우 동시대 자본주의의 광고전략을 보다 과장하여 따라한다. 사이버 스페이스에 대한 광고로서, 그것은 또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광고이다. 마치 그 이데올로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강박관념을 자아내는 영상들은 동시대의 광고들이 보다 온건한 형태로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 즉 시뮬라시옹 된 사이버 스페이스를 창조하는 과정은 '잔여물의 삭제'를 통해서, 즉 이상화와 보편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즉 이렇게 이주되는 세계 자체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수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이먼 데니의 <창시자들의 보드게임 디스플레이 프로포타입/창시자들의 규칙>의 경우에는 서구중심적인 시뮬라크르의 민낯을 드러낸다. 시뮬라크르된 결과물은 단순히 미술이나 사진,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텍스트, 게임 등 다양한 매체들을 총망라한다. 그렇게 시뮬라크르되고 보다 대중들에게 친숙한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열강들의 식민통치와 침략이 인류 전체를 향한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이상화되고 비호되는 과정을, 그 고통의 역사에 대해서 대단히 무감각하게 만드는 시뮬라크르들을 통한 서구 정치권력들의 전략을 까발린다.
이렇게 서구중심적으로 전개되어 전세게적으로 범람하는 시뮬라크르들에 의해서 과연 서구 기준으로 타자에 속하는 국가들에게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한 타자의 대표적인 아시아를 향한 서구의 선전 전략을 드러내는 바를 폭로한 작가가 호 루이 안이다. 그는 <기적이 아닌 아시아>의 비디오 및 아카이브를 총망라하는 거대한 볼륨의 작품을 통해서 서구가 동양을 규정해왔고, 이는 동양인의 행동양식들 또한 규정되었음을 폭로한다. 서구에서 스테레오 타입처럼 비춰내는 똑똑한 동양인과 같은 바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한다는 것이다. 일련의 창의성을 상실하는 기계적인 똑똑함 속에서 오히려 동양은 서구의 선전에 놀아난 셈이다. 즉 동양은 서양에 의해 규정된 즉자로서, 동양이 주체성을 발휘하려면 서양이 그간 동양을 규정해왔던 바를 모두 부정하여, 주체적인 대자로 거듭나는 수밖에 없다는, 동양인의 침탈당한 주체성에 관한 아카이브를 작가는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작품들의 공간에 놓인 대단히 푹신함을 자아내는 카페트나, 김아영 작가의 비디오를 지탱하는 바위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시뮬라크르의 온전한 독립성보다도, 결국 그들이 맞닿아 있는 실재적인 감각의 물질계를 주목하게 된다. 결국 그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물질계로서 그들의 고유성보다는 그들이 물질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주목할 것을, 그리고 그 푹신한 감각성은 이렇게 관계 맺는 바를 파악하고 우리가 이 대지를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관련될 것이다. 이렇게 범람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 우리에게 거대한 영향을 주는 주요한 시뮬라크르들은 여전히 불평등하게, 소수권력에게 독점적인 형태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알랭 바디우의 표현대로라면, "한편에서는 민주주의가 주인에 대한 사랑으로 벗어나게 만드나, 자본주의 상품의 법칙에, 즉 새로운 주인에 대해 노예가 되길 원하는 욕망."이 이러한 시뮬라크르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체득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이러한 독점적인 시뮬라크르들을 극복하는 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뮬라크르들의 선전 전략에 현혹되지 않고, 소수의 시선에서 전개되었던 역사 편찬의 몫을 보다 다수의 몫으로 전개하는 수 가 대표적이리라. 그래서 본 전시에서 많은 작품들은 개별의 목소리와 개별의 역사들에 주목하였다. 소수 권력들이 편찬하는 역사와 신화에서 배제되고 소거된 것들에 대해서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바는 라라 발라디의 <지나치게 솔직하지 마라>라는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다양한 관점의 아카이브를 통해서 한 역사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역사편찬에 있어서 텍스트 중심적인 아닌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다원성과, 더욱이 이렇게 다채로운 매체들로 포착하는 것은 사건 하나의 다채로운 일면들이요, 여러 다양한 목소리의 주목이다. 이렇게 현실과 관계 맺는, 그리고 현실이 오히려 역으로 모방하는 시뮬라크르의 힘은 보다 다양한 관점 속에서,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관점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등을 통해서, 그리고 일의성이 아니라 다의성을 지향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이는 스타냐 칸의 <흐름 속에 서서>에서 도드라진다. 본 작품에서 포착되는 바는 우리가 한때 작은 맹아의 형태로 몸담고 있던 태반, 즉 생명의 기원과, 이후 치매를 통해서 상실되어가는 생의 기억과 죽음의 예고가 비춰지며, 삶과 죽음이 드러난 한 인생의 총체성이 드러난다. 그러한 총체적인 인생사 속에서 우리는 태반으로, 그리고 부모님의 집으로, 독립 이후의 집으로, 결혼한 이후의 집으로, 그리고 보호센터 등 여러 집을 옮겨 다닌다. 우리의 집들은 대단히 실존적이다. 이러한 실존적인 태도를 강조한다. 이러한 집과 함께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욕망과 음악의 장르들, 그리고 일련의 발전사는 결국 이러한 기술의 발전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즉 우리는 죽음이라는 유한적 필연성처럼 결코 이를 거역 못할 것이라는, 집을 옮겨 다녔듯이 이러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유동적인 태도를 취해야 함을, 이는 제시되는 새로운 세계인 물질계를 이행한 사이버 스페이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지 그 세계를 살아가는 태도가 위해서 언급한 비판적 태도여야 할 것이다.
*귀환
이렇게 4관까지 과거에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로 서서히 나아갔다면, 5관은 이러한 모든 시간들이 혼재된다. 5관의 제목은 귀환으로, 4관에서부터 암시되었던 현실로의 귀환이다. 우리가 예술의 세계 속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고 그 예술들로부터 세계를 마주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흠뻑 행했다면, 이제 우리가 밟고 있는 대지로 귀환하여 그 바를 실행할 차례다. 탁한 공기와 목재 냄새들이 대단히 불쾌한 감각이지만 우리가 현실로 복귀했음을 드러내고, 이러한 고통은 여러 관을 관통하는 고통의 기억이라는 테마와 연결되듯, 그 불쾌감을 통한 우리의 변혁 의무를 드러낸다. 그리고 5관에서 주목하는 바는 여러 다양한 국가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아닌, 비엔날레 자기 자신으로써 대단히 자전적이고 미시적인 시선으로 낮춰진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예고된 미래가 얽히고설킨 비엔날레의 역사와 마주하며, 오히려 우리는 한 개별의 목소리와 역사에 주목해야하는 당위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그 20여년의 역사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거대구조, 그리고 시간이 새긴 흔적들과 마주한다. 즉 한 개별의 역사는 결코 거대구조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 역사가 아니기에, 그리고 오히려 그 시대의 폭력성과 민낯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우리는 그 개별의 역사에 주목해야 하며, 이로써 한 개별의 역사들은 이 시대와 세계에 대한 범인류적인 역사를 간접 드러낸다.
이렇게 광주비엔날레 본관에서 열리는 5관 구성의 전시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한다. 이러한 과거와 현재는 서구가 행한 동일시의 폭력을 드러내는 것이자, 그 아픔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았음을 드러내며, 이러한 반성으로부터 우리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방법론으로 끝내 나아간다. 그래서 실현되어야만 할 미래를 제시하며, 이는 동시대의 고조되는 분열과 갈등의 흐름에 대해 예술이 우려스런 답변을 취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에 예고되고 있는 물질계를 넘어선 사이버 스페이스와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비춰낸다. 이렇게 포착되는 바는 그렇게 이행되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행동양식과, 지금까지 시뮬라크르들이 작동해온 역사를 포착하여 새로이 다시 쓰는 시뮬라시옹의 방법론에 대한 바이며, 보다 온건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이다. 그리고 전시는 다시금 현실로 돌아오며, 우리가 이러한 전시 구성 속에서 들은 개별의 목소리의 중요성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 고찰하게 만든다. 이렇게 본 광주비엔날레는 대단히 포스트모던하다 볼 수 있는 해체적이고 오브제 중심적이며 혼성적인 매체들이 가득하긴 하지만, 그런 매체들이 바라보는 바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적나라한 세계의 민낯이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비춰내며 멀어졌던 예술과 대중의 간극을 다시금 중재하고 메워내고 있다. 이렇게 현실을 바라보는 예술들 속에서 우리는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관계 맺는지 고찰하고, 더욱이 그런 예술을 마주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이 과연 어때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2편에서 계속
글_아트렉처 전문 에디터_박정수
Artlecture.com
Create Art Project/Study & Discover 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