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어디로 향해 가는가?
2018 광주비엔날레 : 상상된 경계들 (2) ACC - 세계는 어디로 향해 가는가?
*2018 광주비엔날레 전시 공간 및 구성개괄
2018 광주비엔날레 : 상상된 경계들 전시는 주 전시관을 두 곳으로 나누어 진행한다. 한 곳은 지금까지 그간 진행되던 북구의 비엔날레 전시장, 한 곳은 신설된 동구의 ACC에서 펼쳐진다. 두 전시 각각은 일말의 서사를 띠고 있지만, 두 전시가 연계되어 서사를 띠지는 않기에 특별히 두 전시관 중 먼저 봐야한다는 우선순위를 딱히 정할 필요는 없다. 다만 본전시관의 5관인 '회귀'가 사실상 2018 비엔날레의 피날레를 장식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동선이 허락한다면 ACC를 먼저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한편 보다 전시의 명쾌함(작품 개개의 명쾌함과는 별개로)을 중시한다면 본전시관을 먼저 보고 ACC를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ACC의 전시구성은 본 전시관에 비해선 그 주제의식이 명확히 전달되지 않고 다소 산만하기 때문이다.
ACC의 전시구성도 총 5관구성이라 볼 수 있는데, 마지막 5관의 대칭적 상상력을 통한 결말은 본 전시관에 비해서 명확하다고 볼 수 있지만, 각 관의 주제의식을 전달하기 위한 작품들이 충실하게 구성되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그래서 본 전시관의 각 관의 동선을 따라가며 진행했던 이전 글과 달리, 본 글에서는 이전 글에서 중심적으로 다뤘던 아도르노 이상으로 본 전시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론가 세 명의 담론을 중심으로, 각 전시관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 개개로 전개할 예정이다. 그래도 개괄적으로 각 관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20세기까지 이뤄졌던 본질을 구성하는 바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각 관의 제목에서 엿보인다. 1관이라 할 수 있을 <집결지와 비장소>는 어떤 권력이나 이데올로기가 집결하라고 명령해진 규정된 것을, 장소로서 규정되지 않은 비장소를 통해 이러한 통념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다음으로 2관 <지진, 충돌하는 경계>들의 경우, 집결지와 마찬가지로 규정된 경계들을 통해 고조되는 갈등을 포착한다. 그리고 3관 <한시적 추동>의 경우 그간 20세기까지 이루어졌던 보편적인 물결에 반하는 개별자의 목소리와 증언에 집중하고, 그러한 개별자들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이루어지는 '한시적 추동'이지만 이내 곧 서로의 개별성을 이해하는 대화합의 움직임을 보인다. 그리고 4관 <대칭적 상상력>에서는 무의식의 규정 불가능성을 중시하는 '대칭적 사유'개념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러한 현재의 디스토피아에서 이상향을 제시하는, 블로흐적이라 볼 수 있는 예술들이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매스컴에서 보도되며 주목을 끈 북한의 예술들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사이드의 후기식민주의론으로 작품읽기
이제 동시대의 주요한 담론들을 토대로 본 전시의 작품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후기식민주의적 이론을 주창한 에드워드 사이드다. 그는 백인 중심적이고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서구문화와 비서구문화 간의 차이를 몰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몰지각하고 몰이해적인 관점에서 서구는 비서구 문화들의 예술사를 편찬하였고, 이러한 바는 식민치하 속에서 그들을 스테레오 타입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세 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데 가장 먼저 '담론적 차원' 으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고 동양에 대한 권한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서구적 양식의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학술적 차원'으로 동양에 대해 그러한 몰지각한 시선으로 연구하는 모든 것을 오리엔탈리즘으로 보았다. 세 번째로 상상적 차원으로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만들어진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차이에 기초하는 하나의 사고유형으로써, 결국 서구중심적 사고를 오롯이 탈피하지 못하면 비서구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세 차원으로 기술된 동양성은 그들의 식민치하 속에서 사용되어, 동양인들은 주체들이 아니라 즉자로서 '동질적이고 얼굴이 없는 주민들'을 형성했다. 즉 서구가 동양 및 비서구를 향해 동일시의 폭력을 행한 것으로, 그의 후기식민주의론은 식민지배하에 있었던 서구의 폭력 탐구하고, 그 이후 그들이 저항적으로 그리고 복권시키기 위한 정체성에 대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이러한 방법론을 그는 '대위법적 읽기'로 표현하는데, 서구 중심적인 개념이 기존의 음율(독단적 관점)이라고 한다면, 이에 반항적이고 독립적인 새로운 음율(저항적 관점)을 병치하여, 기존의 음율에서 침묵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고, 그들이 은폐하려는 바를 고발한다.
이러한 사이드의 입장으로 고찰할 수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일본 출신의 작가 아키라 츠보이다. 그는 사이드의 대위법적 읽기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일본 출신인 그는 일본에서 나고 자라며 가진 관점이 분명 존재하겠지만, 한편 그의 할머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써 그에게 저항적인 관점을 부여한다. 이렇게 포착된 바가 우선은 <무주물>으로,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일본의 독단적인 관점에서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희생들을, 그의 저항적 관점을 통해서 고발해낸다. 그렇게 축소된 상흔이 포착되고, 우리는 그 피해를 응시하게 되며,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단순한 물질적 피해를 떠나 이러한 독단적인 관점 속에서 일본의 전통 또한 상실되어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 티모르, 베트남, 중국, 싱가포르, 오세아니아 지역 등 일본군이 성노예를 강제시킨 지역들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본군 성노예>라는 작품이다. 그는 피해자들의 유형을 특정 국가의 출신이라는 보편성으로 묶지 않는다. 그저 개별의 증언들을 듣고 작품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보편권력이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소거되는 바들을 드러내고, 또한 정치권력이 편찬하는 역사에서 은폐하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그들을 보편의 범위로 묶어내지 않지만, 그녀들의 피해 이후 각 국가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이루어진, 즉 타자로써 그녀들을 궁지로 내몬 정치권력 및 거대구조의 민낯을 까발린다.
다음으로 존 풀레의 <풀레노아 세 폭 제단화>와 <원형 고대 신화의 장>이다. 언뜻 보기에는 폴리네시아 니우에의 원주민들의 미술을 복권시켜놓은 것만 같다. 그들의 전통적인 매체성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제목부터 ‘세 폭 제단화’즉 서구적이라는 것에 집중해야한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집중해보면 그러한 문양들의 통일에 균열을 일으키는 문양들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바로 십자가 문양으로, 그것은 자생적으로 태동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도 누군가가 들여오고 있다. 존 폴레는 이러한 종교를 중심으로 그들의 문화를 침탈한 영국에 대한 비판을, 또한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미술은 역사를 고발함과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즈라 우베의 <멘지드 메르카토>를 보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비디오 아트인 그의 작품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식민통치하던 과정에서의 천편일률적인 서구의 모더니즘 건축과 도시계획을 투영하던 것을 보여준다. 이전의 에티오피아가 보다 곡선적이고 다채로운 건물의 형태가 눈에 띠며 사선의, 보다 입체적인 구도에서 포착된다면, 식민통치 이후의 에티오피아는 보다 직선적이고 평면적이며 획일화된다. 서구가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하다 못해, 아예 서구적 사상을 이입하려는 야욕을 보여준다. 하지만 식민통치 이후 다시금 복권되는 에티오피아의 형태를 통해 되살려진 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모더니즘의 획일화와 그들 전통문화의 다채로움이 대비되며, 모더니즘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에즈라 우베의 작품이나 사이드의 담론은 ACC뿐만 아니라 본 전시관의 1~3전시관의 작품들과도 연계된다.
*스피박의 후기구조주의론과 후기식민주의론으로 작품읽기
다음으로 사이드와 함께 중요한 후기식민주의자이자 후기구조주의자,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가인 가야트리 스피박이다. 그녀는'세계구성' 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세계구성은 서구 및 백인중심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며, 비서구들은 이렇게 서구화된 세계에 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구가 세계구성으로서 행하는 본질주의는 전략적 본질주의로서 서구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페미니즘 관점에서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고 보았다. 규정되는 본질에는 서구가 몰이해적으로 비서구를 규정하는 것들, 그리고 특정 성 역할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들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그녀에게서 중요한 '하위주체'개념은 인종, 민족, 성, 종교 등 많은 이데올로기들의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를 지적하고,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이에 예속되어야 하며, 한편 예속되지 않으면 권리를 박탈당하며 타자로서 규정되어 배제되던 폭력의 역사를 드러낸다. 그리고 후기구조주의자로써 구조의 불변하는 본질에 반대한다. 그녀에게서 구조는 초월적이거나 명확한 경계가 구획되는 것이 아닌, 맥락에 따라 변화하고 보다 외부의 맥락과 상호 작용하면서 역동적으로 변화학고 유동하는 구조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기존의 '경전화'에 반대하여, 보다 혼란하게 얽힌 총체로써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고정불변의 본질 대신, 보다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담론 개념을 선호하고, 초월적인 구조의 변동 가능성을 긍정하기에 비록 구조에 가로막힌 인간이지만, 명확히 경계 지어지지 않는 유동하는 구조에 대한 거대한 계기가 없더라도 행동을 실천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이러한 스피박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첸 웨이의 작품을 살펴보자. 중국 출신인 그는 <신세계 도취의 역사 터널>이라는 작품을 통해 세계구성의 중심으로 향하려는 중국을 포착한다. 이는 중국의 정치권력이 행하려던 움직임과, 이에 반하는 지식인들의 대위법 속에서 읽어진다. 중국의 정치권력이 행하던 개혁개방 속에서 이루어지던, 즉 서구가 정치권력으로 치환된 상황에서 중국의 인민들은 스테레오 타입을 규정받는다. 또한 중국이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국가를 개방한 것은 서구의 원리를 체화한 것이다. 이를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 이러한 정치권력에 반하는 중국의 정체성을 지키려던 하위주체인 지식인들은 음지에서 그들의 사상을 키워나가고 정체성을 지키려했다. 한편 이러한 음지조차 허용되지 않아 거대권력에게 포착되고, 이내 곧 상실되어 버리는 그 슬픈 역사를 보여준다. 다음으로 니나 샤넬 에브니의 <항상 준비된, 항상 그곳에>라는 작품으로, 백인군인들과 노예 및 광대의 복식을 하여, 식민주체로서의 전자, 하위주체로서의 후자의 도식을 이룬다. 이를 통해 하위주체가 당하는 폭력의 민낯을 드러내며, 이러한 바는 아프리카 원시미술의 강한 원색성 속에서, 그리고 대단히 단순화된 조형들로 이뤄내 그들의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한다. 단순화된 조형성 속에서 서구의 모더니티를 수용한 게 아니냐고 볼 수 도 있겠지만, 그러한 서구의 모더니즘이 결코 순수한 본인들만의 성취가 아니라 비서구의 조형원리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코 모더니즘의 반복으론 보기 어렵다.
이러한 스피박의 논의를 보다 동시대의 지평으로 확장시켜보자. 우선 시야디의 나비 시리즈로, 성 소수자인 그는 작품에 성 소수자들의 사랑을 그려 넣으며 젠더 담론을 담아낸다. 하지만 그 매체는 전통적인 종이공예 및 문양으로써 이는 확립된 전통적 구조로서의 매체성과, 이러한 구조의 변화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바는 앞서 언급한 사이드의 대위법적으로도 볼 수 있는데 매체성을 기존의 관점으로, 그리고 젠더담론을 저항적 관점으로 포착하여, 이 미묘한 균열 속에서 전통적인 이데올로기가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당대의 금기와 동시대에는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할 것을 포착한다. 다음으로 파올로 시리오의<잊혀지기>의 경우에는 정보 권력을 지배주체로 두고, 이 정보 권력이 쥐고 있는 무고한 용의자들을 하위주체로 두어, 그러한 정보 권력들이 행하는 2차 가해와 동시대에 정보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독재에 논의한다. 그리고 사타미치 모토유키의<경계의 파편들>은 본 전시의 취지에 잘 어울리는 작품으로, 여러 나라의 경계를 이루는 장소들에서 수집한 물과 오브제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지도 및 경계라는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러한 구조가 대단히 인위적인 것임을 오히려 갈등을 촉구하고 있는 것임을 고찰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스피박의 논의를 한국에 적용시켜 살펴보자. 먼저 백현주의 <기만과 방첩>, <양지리 디텍토리>다. 작가는 DMZ의 민북 마을을 포착한다. 본래 대북선전 및 자유주의 세력의 체제선전을 위해 기획된 민북 마을은 국가에 의해 특정의도를 띠고 형성된 마을이었다. 그래서 지배주체인 정부에 의해 민북 마을의 주민들은 특정 행동양식과 스테레오 타입을 강요받은 것이다. 한편 동시대에는 더 이상 민북 마을이 그러한 형성의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을 및 구성원들은 더 이상 하위주체가 아닌, 동등한 주체로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세대 간의 차이와 직업군간의 태도차이를 통해서, 여전히 지배주체가 쌓아올린 보편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흔을 포착한다. 그리고 박화연의 <당신의 할머니, 김정복>과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5.18의 상흔을 포착하는 작품이다. 박화연이 주목하는 것은 쌓아올린 구조의 변혁가능성으로, 과거 정치권력이 광주폭동이라 규정했던 바가 보다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5.18로 규정되는 그 흐름에 주목한다. 그리고 지배주체에 의해 철저히 은폐되길 요구받았던 하위주체인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는 것을 통해, 소수권력들이 쌓아온 과거의 구조가 아니라, 보다 민주적으로 쌓아올려지고 수정되는 구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욱이 그러한 과거로부터 동시대의 연속선상 속에서 특정 경계를 엿보는 게 아니라, 맥락과 상호작용하며 보다 혼재성을 띠며 변화하는 구조와 마주한다.
*바디우의 『비미학』으로 작품읽기
마지막으로 인간의 유한한 운명 속에서 무한함을 포착하려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담론이다. 그는 이러한 그의 철학 체계를『비미학』을 통해 미학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예술 또한 유한한 체계 및 매체성 내에서 무한한 변주를 일으킨다고 보았다.그는 시를 일례로 들어 언어 자체는 유한하지만, 방언 등을 토대로 무수한 변천 가능성이 주어지며, 이러한 유한한 매체성 속에서 무한성을 실천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오히려 형식의 해체를 통한 동시대의 해체적인 예술들이나 혼성적인 예술들, 즉 유한성을 뛰어 넘으려는 예술들을 긍정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세 개의 도식들을 전면 비판한다. 우선 예술은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지도적인 도식과, 예술은 진리를 '담아낸다'는 낭만적인 도식, 그리고 예술은 치료적(카타르시스)이라는 고전적 도식, 이 세 개의 도식을 모두 탈피할 것을 요구하고, 비미학을 통해 새로운 도식을 주장한다. 그것은 예술이 진리를 '생성'한다는 것으로, 그는 단일한 진리가 아닌 무한한 진리를 주장한다. 예술은 전혀 예상치 못한 특정한 자리에서, 독특한 '사건'을 일으키고 보편의 부재를 일으키며 각각의 작품들이 개개의 진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일반 보편률에서 벗어나기에 과잉으로 느껴지며 이러한 과잉의 포착이 곧 진리의 포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그는 숭고함을 긍정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는 예술작품이 감상자를 방해하여 새로운 진리를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건, 과잉, 진리들은 과거에는 없는 것들로, 보다 과거의 유한한 규정들을 깨뜨리는 현재의 아방가르드의 계보를 긍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디우의 담론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작품으로 먼저 변재규의 <에폭시필름>이다. 그에게서 공백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에게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운동의 부재를 통해서다. 그의 필름상영은 대단히 분절적이고 파편적인, 각각의 필름들을 자각할 수 있는 형태로 행해진다. 이를 통해서 감상자가 기대했던 매끄러운 상영과 운동이 부재하고, 이러한 보편의 운동이 부재하며 운동의 원리 그 자체를 현현시킨다. 그리고 르와정의 <Trio>는 퍼포먼스 작품으로, 퍼포먼스는 주로 춤과의 경계를 허물고, 이를 통해 미술의 시각성과 혼재된 촉각성을 드러내고, 그리고 연극의 현존성과 불완전성을 드러낸다. <Trio>에서 혼재되는 것은 불완전한 현실과 유실되는 기억을 대체하기 위한 예술이었지만 이 또한 불완전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리고 닫힌 예술이 아닌 열린 예술을 지향하며 세 명의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협연하는 현악 3중주는 즉흥성을 필두로 이루어져 퍼포먼스가 이루어 질 때마다 달라지는, 일회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이상 시각성이 중요하지 않은, 단지 그 공간에 감상자가 존재하여 음악을 듣는 것만을 통해서, 시각성이 더 이상 중시되지 않는 역설적인 미술과, 오히려 청각성이 강조되는 기이한 미술의 형태를 통해 본질의 파괴를 보여준다.
그리고 조형섭의 <엑시토피아>는 공간에 입구가 출구가 없다는 것을 통해 보편의 부재를 일으킨다. 그렇게 오브제들과 공간 그 자체로 감상자와 소통하는 작품은, 마치 에셔 판화들의 주제의식을 연상케 한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레일 속에서, 작품 자체는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무엇보다 그것은 카메라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받는다. 이러한 작품에서 부재되는 보편성은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며 갖는 보편성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새로운 감시체계가 공간에 떡하니 자리 하고 있으며, 우리가 동시대로부터 다채로운 개별성을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바는 천편일률적으로 돌아가는 레일 속에서 무너진다. 이렇게 본 작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며, 세계의 민낯을 드러내는 작업을 행한다. 마지막으로 여상희의 <검은 대지>로서 비석의 보편성을 깨뜨린다. 본 작품이 부재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비석의 이름이다. 비석에 새겨진 것은 익명의 경험 및 상흔들로서, 대한민국 근현대사 발전 속에서 파시즘 정권 속에서 이루어진 익명의 희생자들의 경험을 드러낸다. 그렇게 부재한 이름과, 그 대신 자리한 개인의 상흔, 경험 속에서 과연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해야 하는 바가 과연 그 대상의 이름인지, 아니면 그 대상이 당한 피해나 경험 그 자체를 추모해야하는지, 추모 및 기억의 형태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부재시키고, 새로운 진리를 자리하게 만든다.
*정리 및 한계
이렇게 각 작품들은 후기식민주의 관점에서 지금까지도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서구의 폭력과 압제상을 고발하고, 더욱이 서구에서 그치지 않고 보다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식민주체와 하위주체를 포착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각자가 행하는 매체성의 실험과 혼성성, 그리고 해체적인 실험 속에서 우리의 거부할 수 없는 유한한 흐름에서 무한하고도 새로운 진리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이러한 바들이 명쾌히 제시되던 본 관과 달리, ACC의 구성은 다소 의아스러운 구석이 있다. 과연 <지진, 충돌하는 경계들>에서 모더니즘 작품들이 제시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대칭적 상상력>에서 제시된 유토피아는 너무도 낙관적이며, 이전 관들에서 제시된 작품들의 주제의식을 관통하지 못하며 전시와 동 떨어진다. 더욱이 유토피아를 제시하며 사용된 매체들은 다소 보수적이며 오히려 과거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또한 포착한다. 이전 관까지 주를 이루던 매체들이 대단히 동시대가 지향하는 해체성과 혼성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또한 북한미술이 다채롭다는 주장 또한 우려스럽다. 그들의 미술이 다채롭다는 바가 증명되려면, 그들이 예술은 사회에 봉사해야 할 뿐이라는 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모델이 아닌, 예술의 독자적 가능성과 사회 참여적 성향 양자 모두를 강조한 마르크스-엥글스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모델이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채롭다는 설명과 달리, 본 전시관의 회화는 죄다 통통한 살집을 가지고 기름진 윤택을 표현한 이상화만을 보여주는 레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다름 아니었기에 다양한 회화의 가능성을 포착하긴 어렵다. 더욱이 <가진의 용사들>의 경우 터너의 화풍을, 그리고 <파도>나 <금강산>과 같은 산수화의 경우 프리드리히의 숭고함을 답습할 뿐이기에 그들이 고유한 미술세계를 보여줬다고 하기 에는 무리가 따른다. 더욱이 동시대 산수화는 중국, 일본, 한국 동북아 각각의 국가성을 떠나 모두 다채로운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동시대 산수화들의 경우 국가적인 맥락보다는 작가 개개인의 맥락으로 파악하는 바가 나을 텐데, 동시대 산수화들을 늘여놓고 중국, 일본, 한국 못지않게 개성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의 풍경화들이 선전적 색채를 제외하여 그것 자체로 집중할 만 하지만, 네덜란드 풍경화처럼 그 풍경화들이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색채를 지닌다면, 예를 들어 높다란 기상이랄지 그들의 권위, 힘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고도의 선전물에 다름 아니다. 여하튼 전시의 후반부에 유토피아라 제시하고 다채롭다 제시하는 바들은 죄다 어폐가 있다. 그래서 본 전시를 통해서 과연 이 세계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는지 그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은 정밀히 짜인 전시구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작품들을 감상자들이 재구성하면서 고찰해야 하는 몫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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