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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10. 2019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

연극의 지속

https://artlecture.com/article/1256



*잉마르 베리만, <결혼의 풍경>

스웨덴의 전설적인 시네아스트 잉마르 베리만, 그는 <페르소나>, <침묵>, <제 7의 봉인>, <화니와 알렉산더>등과 같이, 형이상학적인 물음과 관계의 이면 및 존재의 내면으로의 파고듦, 신의 침묵과 같은 무거운 진리를 탐구하는 걸출한 걸작들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은 이 같은 진중한 작품들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편인 <결혼의 풍경>이었다. 물론 결혼과 부부의 표피만을 훑어내는 극은 아니다. 베리만은 둘이 하나가 되는 신성한 결합을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진실과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가 된 둘로서 행했던 많은 약속들이 무너져가는 붕괴를 포착하였다. 또한 그 속에선 타인과 결합된 자신과 실존적인 자신의 관계 사이에서 번뇌하는 개개인들의 초상이 담겨졌다. 그들이 살아가는 가정의 풍경에는 결혼이 일련의 질서와 정돈이라면,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개개의 욕망으로서 동물적인 무질서와 혼란으로, 양자의 영역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팽팽한 긴장감을 베리만은 담아냈다. 이 같은 베리만이 담아낸 결혼의 풍경에는 희생이 수반되었다. 타인을 위한 나의 희생, 그것은 욕망의 영역일 수 도 있고, 한편으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일 수 도 있다. 양자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인 결혼의 풍경일 수 있겠지만, 결국에는 양자 중 어느 하나가 희생된 상태로 결혼이 유지되거나, 결합되었던 하나가 다시금 둘로 분리되는 파국을 맞는다. 또한 파트너의 시선과 타인들의 무수한 시선에 의해 나 자신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베리만의 탐구는 결혼이 존속되는 지금에도, 그리고 여전히 남게 될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다. 이는 곧 결혼에 대한 탐구, 고찰 또한 유효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바움백의 연출

지금까지 청춘들의 주체성을 주로 탐구하던 노아 바움백은 이제 서서히 늙어감과 가족에 대한 탐구로 접어들며, 원숙하게 무르익어가는 주제의식의 변주를 보여준 바 있다. 근작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에서 가족에 대한 탐구를 선보인 그는 이 같은 구성원들 중에서 가장 중추적이라 할 수 있는 부부를 향해 시선을 세밀히 좁혀간다. 이 같은 시선이 그의 신작 <결혼 이야기>에서 드러나며, 주제와 플롯, 관계에 있어서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과 유사하게, 마치 오마쥬와 헌사처럼도 느껴지는 작품을 선보인다. 영화는 어둠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은 실제로 찰리가 감독하고 니콜이 연기하는 실제 연극의 시작이라는 것도 있지만, 이 같은 사전정보가 제공되기 이전에도 충분히 연극처럼 보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연극적인 연출 이외에도 그것 자체만으로 영화의 시작은 아름답다. 무에 다름 아닌 두려움을 자아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보이는 것은 니콜뿐이었을까. 그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유일하게 나타난 이가 서로가 서로였음에, 그 둘은 혼인을 한 것일까. 하지만 영화는 베리만의 <결혼의 풍경>처럼 그것의 삐걱거림을, 특히나 종언의 과정을 다룬다. 이를 다루는 노아 바움백의 스타일은 자국 감독으로는 우디 앨런이나, 타국의 감독으론 에릭 로메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제나 대화를 필두로 영화를 전개하는데, 한편 이들이 다루는 욕망이라는 주제의식보다는, 나이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튼 것이 독창적인 요소로 꼽을 수 있다.



여하튼 바움백의 스타일은 우디 앨런보다는 리얼리즘이 강조되기에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즉흥적인 구도가 더욱 짙게 느껴진다. 본 극에서도 그렇다. 일련의 핸드 헬드와 즉흥적인 구도는 매끈한 우디 앨런의 연출보다는 로메르에 가깝다. 영화는 바움백이 언제나 그랬듯 인공적인 연출보다는, 실제의 햇살이 가져다주는 자연스러운 따스함이나, 로메르를 연상케 하는 주변의 소음이 일상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 같은 소탈한 리얼리즘 속에서 일상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균열에 상응하는 상징을 사용한다. 영화는 초반부부터 문이나 창이 강조된다. 마치 그 사이를 엿보는 듯한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그 창들에 의해 찰리는 동선을 방해받다 이내 곧 부딪힌다. 영화의 끄트머리에서도 삭막함을 자아내게끔 굳게 닫히는 문들이 강조되지 않던가. 영화는 단절에 상응하는 또한 어중간하게 열려있어 오히려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이 같은 문들을 이들의 결혼에 상응시키는 듯 보인다. 영화는 단순히 프레임 내에 구축된 미장센만으로 이들을 서술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니콜과 찰리는 프롤로그라 할 수 있는, 서로가 서로를 소개하는 시퀀스에서는 하나의 프레임 내에 놓였었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라는 타이틀이 삽입된 이후에, 이들은 하나의 프레임에 놓이는 경우를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은 언제나 각각의 숏에 분절되고, 하나의 프레임 내에 놓인다면 기둥이나 문들을 통해서 서로의 단절을 강조한다. 또한 이 같은 방해물이 없더라도 영화는 망원렌즈의 흐릿한 속성을 이용하여, 한 명의 존재가 투명하고도 명확하게 포착될 수 있기 위해, 다른 하나가 불투명하고도 흐릿하게 그 존재가 희생되는 그들 결혼의 비극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 같은 흐릿함은 결코 어느 누구 하나에 국한되지 않는다.



https://www.youtube.com/watch?v=b4bgzQvX6xs




*연극성

타이틀이 삽입된 이후 가장 먼저 포착되는 것은 마치 영화의 시작이 암막 속에서 배우가 나타나던 연극을 연상케 했던 것처럼, 그것의 연기를 가능케 할 대본을 연상케 하는 진술서가 가장 먼저 포착된다. 이후에도 유모는 이 두 부부를 마치 배우 보듯, 마치 관객의 입장에서 '너무 멋있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리고 니콜은 이제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던가. 영화는 결혼을 연극에 비유하는 듯, 그것의 특성을 빌려와 결혼이 끝나가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20세기 영화가 성공적인 대중화를 이뤘을 때,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연극과 영화의 차이로 현존성에서 비롯되는 아우라를 지적하였다. 연극의 경우 실제의 공연장에서 실제의 배우와 마주하기에 관객이 열광하는 이유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원본성'을 가진 배우를 실제로 마주하는 아우라에 도취되는 것인지, 그 배우가 연기하는 배역에 집중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전자에 도취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배우와의 거리가 멀고, 또한 무한 복제되어 원본성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영화의 경우 오직 제시된 대상에로의 온전한 집중이 가능하다고 벤야민은 정의하였다. 본 극에서는 이러한 연극과 영화의 차이가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결혼이 하나의 연극이라면 이들은 부모이자 부부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의 끄트머리에서 이들은 자꾸 삐걱거린다. 영화는 연극에서의 배역과 배우가 불일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과연 이들이 열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그들 존재 그 자체인지, 아니면 그들이 맡은 부부와 부모라는 배역인지, 그 혼란한 경계를 포착한다. 어머니이자 아내인 니콜은 찰리 앞에서 울 수 없지만, 니콜 자체로서 그녀는 펑펑 울고 싶은 마음이다. 또한 수동적인 배역이 아닌 그것을 온당 지배하는 감독이 되길 바란다는 열망을 니콜을 통해 드러낸다. LA로 돌아온 니콜은 CG분장을 해야 하는 배역을 맡는데,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온당 주체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디렉팅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기도 하는 등, 자신이 분하고 싶은 것과 분해야 하는 것의 격차를 줄여나간다. 결혼에서 희생에 의해 거대했던 것이 바로 그 격차에 다름 아닐 것이다. "파이는 파이일 뿐이야", 하지만 그들의 연극에는 그저 파이일 뿐인 대상에 너무도 많은 상징성이나 역할이 부여되어 있던 것인지 모른다.




*뉴욕/LA

이러한 두 남녀의 세계는 너무나도 달랐다. 찰리는 인디애나 출신으로 뉴욕에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케이스인 반면, 니콜은 LA출신으로 그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배경 속에서 자라났다. 이러한 그들의 지역적 배경은 정치적, 문화적 차이를 자아낸다. 이들은 모두 부모님을 외면하고 그들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서로의 진술로 보건데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는 듯 보인다. 그 흔적은 곧 부모님이 간직한 지역적 색채에도 다름 아닐 것이다. 인디애나는 보수적인 정치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찰리가 상경한 뉴욕 또한 주 전체로 확대하면 민주와 공화가 서로 교차되는 지역이다. 허나 니콜이 자라온 캘리포니아의 경우 주 자체로 확대해도 진보세가 강하다. 또한 풍족한 자연환경과 기후와 더불어 안정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낙관적인 성향을 갖게 된 니콜과 달리,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와 자수성가해야만 했고, 또한 고된 업무강도나 치열한 경쟁, 높은 물가 속에서 살아남아만 하는 뉴요커로 자라온 찰리의 생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니콜이 살아온 캘리포니아에 내재한 헐리우드로서 명백한 가상으로서 영화, 찰리가 살아온 뉴욕이 브로드웨이로서 현실과 가상 사이에 발을 걸친 연극, 각각을 대변한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들이 각각 만나는 변호사들도 일련의 지역성을 대표하듯 보이는데, 니콜이 만나는 노라의 경우 처음에는 롱숏으로 포착되어 어색하게 보였지만, 이내 곧 감정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클로즈업으로 다가가지 않던가. 허나 찰리가 최종적으로 수임하게 되는 제이의 경우 조금이라도 그가 살아가는 뉴욕의 영역으로 그들을 포섭해오려고 하는데, 노라와 달리 일말의 감정적인 측면도 찾아볼 수 없다. 딱딱하게 계획을 말하고 수임료를 논하는 변호사들의 태도 차이에서도, 이들이 살아가는 지역이 대변하는 가치의 크나큰 차이가 드러난다.




*롱 테이크

서로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그들은 이제 각자의 시간을 갖는다. 이후 영화는 니콜이 결혼생활 동안 느꼈던 서러움을 기나긴 롱 테이크를 통해 포착한다. 지금까지 타인이나 아들 헨리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몰입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시간 속에서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배역이 아닌 진정한 자신이 노출되고, 결혼이라는 연극을 통해 희생한 것이 드러난다. 이후에 본격적인 소송에 들어간 상황에서, 그녀가 주체적인 어머니로서 살아온 바가 마찬가지의 롱 테이크로 드러나곤 한다. 하지만 그녀가 맡아야만 하는 배역으로서의 어머니는 노라의 말처럼 순결하고 완벽해야만 한다. 그래서 니콜 자신이 드러나는 롱 테이크의 경우에는 그녀가 결혼생활동안 불가능했던 것이 드러나며, 또한 찰리에게서는 이러한 롱 테이크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의 후반부에 니콜의 진술서를 통해 간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니콜과 달리 주체적인 공적 영역을 희생하지 않았기에 롱 테이크를 통해 희생의 일대기가 포착되지 않는 것이리라. 또한 그를 논하는 니콜의 진술서 막바지에 그녀의 감정이 섞여 들어간다. 그것은 결혼이 하나의 결합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다. 찰리를 논함에 있어 결합한 자신을 전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그 결합은 과연 얼마나 길었을까. 니콜과 헨리가 침상에 누워서 찰리가 들려주는 동화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들의 일치하지 않는 시선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다른 곳을 쳐다보고, 또 다른 것을 생각해왔을까. 어떤 누군가는 타인을 알지만 자신을 모르고, 어떤 누군가는 자신 이외에 다른 이를 모른다.




*배역

그래서 니콜에게 있어선 롱 테이크를 빌어 자신을 찾는 시간이 대두되곤 한다면 찰리는 니콜이 느꼈을,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시간을 몸소 경험하는 시퀀스가 주를 이룬다. 찰리는 뉴욕에서 노라와 통화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온당 전해지지 않는다. 도로 및 인파로 인한 소음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잊혀지고, 또한 찰리는 저 멀리 롱 숏으로, 그의 형체가 분간할 수 없게끔 포착되지 않던가. 또한 결혼 자체가 누군가가 기대하는 연극으로서 타율적이라는 것은, 변호사들에게 이행된 그들의 이혼과정 속에서 드러난다. 살아 숨 쉬는 그들의 존재가 현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는 서류와 자본이라는 가치로 환원된 존재자로서 그들의 기록만이 유효할 뿐이다. 그들은 온당 발언할 수 없으며, 이혼 자체가 그들 손을 멀어져간다. 결혼을 통해 자신이 어떤 배역을 연기하게 된다면, 그 끝맺음에 있어 그 배역을 누군가에게 이행하여 실행해도 문제없다는 듯이 말이다. 허나 그들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한 과정임에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자신이라는 존재가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영화 속에서 쉽게 일치하지 않았던 서로를 마주하며 그 시선을 일치시킨다. 위선을 벗어던지고 시선을 마주하여 서로의 민낯과 마주하고, 이렇게 시선이 일치함과 더불어 그들 서로를 포착하는 영화의 카메라도 근접하다. 그것은 지금껏 털어놓지 못한 원색적인 비난과 원통함의 폭로장이다. 허나 결혼이라는 연극이 하나의 이미지에 경도된 일이었고, 변호사들에게 이행된 이혼 또한 그들의 위선적이고도 편협한 시선으로 각자의 일면만을 강조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었다면, 그들이 이혼을 통해 궁극적으로 행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지로서 자신이 아닌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영화 속 사실상 처음이자 끝에 다름 아닌 서로의 고백에 의해 그들은 자신들이 염원하는 이혼의 타협점을 찾아 나선다. 그 와중에 노라가 일부 선수를 친 것은, 결국 결혼이나 이혼이 온당 그들의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타율적인 연극적인 한계를 남겨놓은 것이리라.




*연극의 반복

연극의 또 다른 요소는 시간의 제약이다. 이혼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연극이 서서히 끝나가는 것이 암시됨에, 한때 당연한 줄 알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시간의 유한함이 강조된다. 그것은 찰리가 헨리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을 논의함으로써 강조되며, 또한 역할극으로서 할로윈을 찰리와 함께 보내는 헨리가 지쳤다는 것도 끝나가는 시간을 암시한다. 그리고 복지사가 찰리의 집에 당도했을 때, 그는 나이프 묘기를 선보이다 실패하여 손목 부근을 긋고 만다. 묘기가 일련의 연극이라면, 그것의 실패는 연극이라는 시간의 끝을 논하는 것일까. 생명에 위협을 느끼진 않았지만 어지러운 현기증을 느낄 정도의 출혈은 그 연극의 죽음을 상징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 시간은 영영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이 끝나가던 순간에 결핍을 느껴 찰리가 불륜을 행한 것처럼, 이혼이라는 온전한 고독 속에서 이들은 다시금 새로운 연극을 행할 상대를 찾을 것이다. 이혼 이후에 니콜은 어머니 및 동생과 함께 일련의 연극을, 찰리 또한 바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결핍을 논하는 짤막한 무대를 선보이지 않던가. 이전의 연극을 새로이 부활시킬 수 는 없을 것이지만 그들의 한계로부터 시작한 연극이기에, 두 남녀는 다시금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연극을 시작할 것이다. 지리멸렬하게 끝나버릴 것만 같던 할로윈도 해가 지나 다시금 진행되지 않던가. 다만 맡은 역할이 다를 뿐이다. 이제는 더욱 무르익었을 것이다. 찰리는 자신이 헨리와 니콜을 잘 몰랐다는 것을 인지하고, 또한 이제는 그리스 샐러드를 선택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니콜은 보다 주체적인 배역을 도맡게 되리라.




*바움백의 변주

연극과 춤, 노래만을 행하던 바움백의 세계 속 청년들은 이제 결혼과 이혼을 논한다. 그것의 감각성을 필두로 청년세대의 젊음을 논하고, 그것을 갈망하는 중년세대의 결핍어린 시선을 논하던 바움백은 이젠 더 이상 그것의 감각성에만 경도되지 않는다. 작금의 그는 감각성을 넘어서 그것의 매체성을 탐구하고, 그것이 우리의 삶 특히 결혼과의 유사성을 띤다는 것을 목도하여 이를 바탕으로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결혼이야기를 풀어낸다. 결혼을 하나의 연극에 빗댄 서사적 장치와 미장센도 흥미롭지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선택한 연극적인 연출이라 할 수 있다. 연극의 매체성을 탐구하여 그것을 결혼에 대입한 바움백은 그 매체성을 영화에 도입해오고, 이 작업을 면밀히 하기 위하여 영화다운 특성 또한 골똘히 몰입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러한 연출 속에서 찰리와 니콜이 행한 한편의 연극은 이제 끝이 났다. 이전까지 바움백의 작품들에서도 인물들은 어떤 하나의 나이, 세대를 대변하였다. 하지만 본 작품은 바움백의 이전 작품들처럼 나이로만 규정된 한 개인을 포착하는데 그치지 않아 보인다. 본 작품을 통해 바움백은 특정 순간을 넘어서, 보편적인 순환을 다룬다. 우리의 연륜이 연극을 무르익게는 할지언정, 그것을 막을 순 없을 것이라는 연극의 지속을 말이다. 사실 우려도 들었다. 바움백이 펼쳐낼 <결혼의 풍경>은 베리만보다는 가벼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히 성숙해진 작금의 바움백은 그 우려를 온당 씻어냈다. 연극을 지속하고 여전히 이미지에 경도될 우리들의 초상을 비춰낸 바움백은 과연 앞으로 어떤 인류의 풍경을 담아내게 될까.




글.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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