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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12. 2019

얇은 땅 위에

작가소개: 노원희

https://artlecture.com/article/1235



노원희는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비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신적 고통과 무기력감, 경제적 어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 등으로 수많은 작가들이 붓을 놓는 와중에 노원희는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나이, 성별, 인종,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 등에 따라 우리 사회에는 노골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작품을 통해 날카롭고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C)노원희_얇은 땅 위에_2019



노원희의 작품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나’이다. 작가는 여성, 딸, 아내, 어머니,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화폭에 그려 낸다. 고래로부터 세상은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작게는 말과 행동에서 크게는 여성 개개인의 의식과 삶의 방향에 대해 사회는 전방위적인 압력을 가해 왔다. 2018년작 <지붕 위에 앉고 싶은 사람>은 그러한 작가의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어릴 때 작가의 오빠는 집 마당에 있는 나무를 자주 탔다. 하지만 작가는 나무에 올라가 보지 못했다. 부모는 딸에게 위험한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지붕 위에 있는 오빠가 너무나 부러웠다. ‘나’도 지붕 위에서 넓은 하늘 아래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고 싶었다. ‘나’를 옭아매고 있는 이 답답한 현실로부터 잠시라도 탈출하고 싶었다. 끝내 이루지 못한 소망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나’는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지붕 위를 꿈꾼다. 지붕 위에 올라간 오빠를 부러워하던 소녀는 자라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누군가의 아내로 사는 일은 과연 어떨까? 작가의 2006년작 <집 구하러 다니는 사람>에서 우리는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지친 표정의 여자가 눈을 질끈 감고 있다. 여자의 뒤편에는 낡은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다. 여자는 눈앞의 현실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집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을 구하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사방이 집인데 내 몸뚱이 하나 누일 곳은 없다. 내 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어떻게 집을 구할지 한숨만 나온다. 암담한 현실에 여자는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c)노원희, 지붕 위에 앉고 싶은 사람, 2018,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x80.3cm



거친 삶 속에서 여자는 마모되어 간다. 그 와중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기르는 파는 여자의 머리 위에 푸릇푸릇 돋아나 있다. 파를 송송 썰어 라면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 떡국에 파를 넣으면 감칠맛이 난다. 된장찌개에 파를 넣으면 맛깔스럽다. 요리를 하는데 파는 유용하게 쓰인다. 파는 값이 싸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그런 파를 살 돈을 아껴야 할 만큼 여자의 형편은 어려운 것이다. 집안 살림은 모두 여자의 몫이고 언제 어디로 이사를 갈지 결정하고 실행하는 일도 여자의 몫이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느라 집안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사실 신경 쓰고 싶지 않다. 그러니 파를 살 돈을 절약해서 그럭저럭 살 만한 집을 장만하는 일은 여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팟값이 여자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은 우습고 슬프다. 여자의 반대편 허공에는 축구공이 떠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축구공은 볼 수 있지만 잡을 수 없다. 축구공에는 별과 비슷한 무늬가 그려져 있다. 축구공은 별이다. 별은 잡을 수 없다. 축구공을, 별을,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다. 축구공은 이룰 수 없는 내 집 마련의 꿈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왜 집을 장만하는 일에 그렇게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일까? 집은 안전을 보장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다. 또 집은 물리적 자산일 뿐만 아니라 가정의 구심점이다. 하지만 집값이 너무 비싸서 서민들은 평생 일을 해도 집을 살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집이 없기 때문이다. 삶터를 마련하지 못한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제각각 월셋집을 전전한다. 따로 떨어진 가족들은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매달 월세를 내기에 급급하다. 그러니 결혼커녕 연애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살림을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내 집에 살든 세 들어 살든 집에서 해야 할 일은 많다. 매일 쓸고 닦고 치워도 집은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다. 간신히 청소를 끝내도 또 다른 가사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 시장 보는 것도 큰일이다. 그래도 밥을 제대로 먹어야 하루를 버틸 힘이 난다. <오래된 살림살이>에서는 밥이 한 술 가득한 숟가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다음에 들통, 주걱, 국자, 과일칼, 프라이팬 등이 보인다. 모두 살림살이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간이 낡아도 먹는 일은 계속된다. 삶이 우리를 비참하고 힘들게 할지라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또 하루를 살 수 있다. 



(c)노원희, 오래된 살림살이, 2001, 캔버스에 아크릴릭, 유채, 90.9x116.7cm



<오래된 살림살이>를 그리고 나서 이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작가는 <오래된 살림살이 2>를 내놓았다. 캔버스에는 냄비와 프라이팬 같은 주방용품이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에서 눈에 띄는 건 무거워 보이는 청회색 밥솥이다. 무쇠 또는 돌로 만들어진 밥솥은 매일 밥을 짓는 데 쓰이고 때로는 삼계탕이나 갈비찜 같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하는 데 쓰였을 것이다. 밥과 함께 쌓인 세월의 무게는 감히 가늠할 수 없다. 더께가 앉은 밥솥처럼 육신이 스러져 가도 ‘나’는 삶을 견딘다. 


최근작인 <무기를 들고>는 <오래된 살림살이>와 주제와 소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림 속에는 프라이팬을 높이 치켜들고 뭔가를 소리 높여 외치는 여자들이 있다. 남자들은 그런 여자들을 외면하거나 화를 내고 폭력을 행사한다. 구호를 외치는 여자들 사이로 낯익은 밥솥과 들통이 보인다. 바로 <오래된 살림살이>에 등장했던 주방용품이다. 세월이 흘러 세간이 낡으면 바꾸듯이 가부장제 사회의 낡은 관습도 이제 버려야 할 때가 왔다. 가사는 더 이상 여성의 몫이 아니다. 여성은 삼시 세끼 지어다 바치는 식모 노릇을 그만두고 자족적인 삶을 누리기를 원한다. ‘나’는 살림에 쓰는 세간과 같이 늙어 가고 싶지 않다. 반짝거리는 밥솥과 들통은 지긋지긋한 집안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가의 소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다. ‘나’는 혼자서 살 수 없고 사회 환경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해야 한다. 그러한 현대의 삶과 사람에 대한 탐구는 노원희의 또 다른 주요 주제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너무나 많다. 약봉지, 도장, 인주, 붓, 의자, 빗, 빨래집게, 청소기, 휴지, 라이터, 지갑, 로션, 전자레인지 등등. 2004년작 <주머니에서 나온 것들>에서는 우리가 평상시에 쓰는 여러 가지 물건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림 속의 남자는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다. 남자는 과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지극히 일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남자의 뒤편에는 허공에 떠 있는 침대가 있다. 그 맞은편에는 공중에 떠 있는 초록빛 식물이 담긴 병이 놓인 탁자가 있다. 이것은 너저분한 공간의 한편에 이질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남자가 있는 공간은 현실 세계가 아니다. 그곳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된 기이한 세계이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남자는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남자는 일상을 잠식하는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무질서는 불안과 혼란을 야기한다. 혼란이 계속되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범죄가 기승을 부리면 삶의 기반이 흔들리고 사회 체제가 무너진다. 무질서가 극에 달하면 결국 우리 사회는 문명 세계에 종언을 고하게 될 것이다. 무질서는 삶을 파괴하는 폭력의 전조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다.


외부 세계의 폭력은 8호 남짓한 크기의 캔버스들로 벽을 꽉 채운 연작 <몸>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몸>에는 수많은 몸들이 있다. 화면 안에는 꿈틀거리고 절망하는 육체와 목이 기괴하게 뒤틀린 육신과 벌렁 나자빠진 몸뚱이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어도 움직이지 않고 있어도 여유가 없어 보인다. 그냥 앉아 있거나 음식을 먹고 있어도 평온하지 않다. 먹을 때도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없다. 허겁지겁 음식을 한 그릇에 몰아넣고 씹지도 않고 꿀떡 삼킨다. 바쁜 사람에게는 식사도 일이다. 사람들은 잠을 자거나 누워 있어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다. 화면 속의 사람들에게는 짙은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한 공간 안에 여러 명이 있어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통과 근심에 휩싸여 있다. 탈색된 흰 공간에는 아무런 감정도 희망도 없다. 덩그마니 남겨진 그 자신의 육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곳의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그 자신의 절망만이 함께한다.


우리의 삶은 늘 고달프고 힘들다. 매일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가고 죽는다. 사람들은 사고로 죽고 스스로 죽고 병으로 죽고 다른 사람에 의해 죽는다. ‘나’는 타인의 삶을 관조하고 방관한다. 동시에 ‘나’는 생과 죽음에 맞서 싸우는 투쟁자이며 삶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갈 수 없는 무기력자이다. 그러한 무력감은 두 점의 <그림자> 연작에서도 나타난다. 작품에서 거무충충한 대지는 척박해 보인다. 세계는 메마르고 열기에 차 있다. 하얗게 빛이 바랜 사람은 땅속에 몸이 파묻혀 있고 머리만 지상에 나와 있다. 그의 주변에는 바싹 마른 검은 나무들이 있다. 그는 그냥 앉아 있을 뿐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굳이 뭔가를 해야 하는가? 땅속에서 빠져나오면 지금보다 상황이 좋아질까?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가? 그냥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하나의 사회는 개개인의 삶이 모여 이루어진다. 우리 생활은 사회 체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어 작동해야 할 현사회는 돈과 폭력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사회는 노동자의 생활을 보호해 주지 않는다. 현재의 사회 제도는 민생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의 무관심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노원희의 또 다른 작품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모습이다. 작가는 법과 질서가 붕괴된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베일에 가려진 인권 유린의 실상을 고발한다.


얇고 비치는 천 위에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미지들이 떠 있다. 빗자루, 가방, 뒤집개, 망치, 총, 면도기, 쓰레받기, 의자, 전투기, 목걸이, 안경, 가위, 톱, 미사일 등이 어지러이 뒤섞여 있다. 별만큼이나 무기들도 많다. 2008년작 <청천 하늘에 잔 별도 많고>는 일상에 침투하여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늘리고 있는 폭력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총, 전투기, 미사일 같은 무기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돈에 영혼을 판 모리배들은 무기를 팔아 배를 불리고 도처에 희생자를 만들어 낸다. 폭력과 우리의 삶은 한데 뒤엉켜 있다.


노원희가 그려 내는 폭력의 현장에는 흰색 직사각형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것은 어쩌면 제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항복하는 의미의 백기일 수 있다. 또는 탈색되고 희미해진 꿈을 반영하는 거울일 수도 있다. 텅 빈 직사각형은 희망이 없는 현재와 앞으로도 그러할 미래를 상징한다. 출구 없는 삶의 편린은 <얇은 땅 위에>에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품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에게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 무릎 꿇고 읍소하고 있다. 그러나 민생의 호소는 높디높은 거대한 벽에 막혀 들리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엎드려 있는 땅은 살얼음 같다. 춥고 위태위태하고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처럼 보인다. 노역자에게는 쉴 곳도 삶의 터전을 일굴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아침부터 밤까지 온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 할 뿐이다. 화면 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절망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살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치는 와중에 사람들은 마음의 안정을 잃고 삶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기력이 쇠하고 만사에 흥미를 잃는다. 노원희는 오랜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붓을 움켜쥐고 여기에 사람이, 삶이 있다고 부르짖는다. 이 세상은 폭력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걱정과 불안과 절망이 존재한다. 삶이 고달파도 ‘나’를 비롯한 사람들과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우리의 시대상을 그려 내는 노원희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다. 


(c) 노원희, 머리가 복잡하다, 2019, 캔버스에 유채, 132x230cm




글.아트렉처 에디터_나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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