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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13. 2019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만나다

윤이상 Isang Yun

https://artlecture.com/article/599



우리나라의 가장 세계적인 음악가는 아마 윤이상(Isang Yun)일 것이다. 동양에서 유일하게 음악가의 이름을 건 음악경연대회가 바로 통영에서 열리는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다. 북한에서도 1982년부터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쉬쉬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그는 동백림 사건과 같은 간첩사건으로 더 유명하다.





서양악기로 동양철학을 담다 

그는 도교와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동양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소리>, <피리>, <예악> 등 한국식 제목도 많다. 하지만 악기는 모두 서양악기였다. 서양악기로 동양적 음악을 한다. 뭔가 안 어울리지 않나?


서양은 화음을 중요시한다. 어릴 적 배웠던 ‘도미솔 도파라’과 같이 으뜸음을 바탕으로 음을 더하고 채우면서 조성(調性)을 만드는 원리다. 또한 서양음악에서 사용하는 음은 정확히 직선을 그리며 같은 굵기로 진행한다. 네모반듯한 도형을 그리듯이 정확히 딱 떨어진다. 그래서 피아노는 서양의 음악을 표현하기 위한 정확한 악기다.


동양은 음을 더하기보다 그 음 자체를 중시한다. 그래서 한음이 다른 굵기로 연주된다. 예를 들어 판소리 춘향전에서 “업고놀자” 하는 것처럼 떨면서 꺾는다. 트로트 역시 비틀어줘야 맛이 난다. 그 사이 여백도 중시한다. 굿거리장단에서 덩 기덕 할 때 덩과 기덕 사이의 여백의 미가 살아야한다. 대금이 이런 특징들을 반영한 대표적인 악기다.


윤이상은 동양적 기법을 적용하기 위해 한음을 중심적으로 그 음을 변형시키는 ‘주요음’ 기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연주가 어렵다. 함부르크 오케스트라 한 단원은 리허설이 막 시작될 때 이 곡을 연주하면 뇌에 이상이 올지 모른다는 의사 진단서를 내밀기까지 했다. ‘이건 쓰레기다. 동양인이 음악도 모른다’며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급기야 연주거부에 나섰다. 그 후 윤이상은 벌레 씹은 표정의 단원들을 보며 곡을 쉽게 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난해한 전위음악의 세계 

윤이상은 쉽베르크가 창시한 12음 기법에 동양철학을 담고자 했다. 이윽고 1959년 9월 4일, 윤이상은 독일 다름슈타트(Darmstadt) 현대음악 강습회에 큰 성공을 거둔다. 연주회에서 맨 처음 연주된 곡은 윤이상의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었다. 한국전통음악이 베인 음악에 청중들은 경청했다. 청중들은 ‘브라보’를 외치며 열렬한 찬사를 보냈고 윤이상이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허나 유명세로 그의 음악을 기대하고 들었다면 실망하기 십상이다. 그의 음악은 쉽게 남에게 들려주기 어렵다. 들려주면 욕먹기 딱 이다. 사실 그의 음악은 귀곡 산장에서 틀어줄 정도로 으스스하거나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괴상하고 난해하다. 연주자들도 벌벌 떤다. 그 난해함 때문에 연주도 감상도 어렵다.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칠 수도 있다. 그 음악세계를 이해하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그는 백남준과 비슷한 전위 예술가다. 보통사람이 봐서는 뭐가 예술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다. 기존 형식과 질서의 파괴, 난해한 철학적 접근으로 흘러온 현대 예술적 흐름인 셈이다. 현대 음악의 한 분야를 개척했다고 하는 그의 음악은 기존의 익숙한 음악과는 완전히 다르다. 




정치적인 음악가 윤이상

윤이상은 사회적 문제에 침묵하지 않은 음악가였다. 많은 예술가는 순수예술을 주장한다. 음악가가 음악이나 하지 왜 정치에 관여 하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도 그는 빨갱이 취급을 당한다. 그런 그가 왜 예술 지상주의를 꿈꾸지 않고 정치적 문제에 관여했을까. 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게 정치라고 봤다. 그래서 윤이상은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일제시절 윤이상은 귀국한 유학생들과 반일지하조직을 만들기도 했다. 그 지하조직원들은 향후 일본과 전쟁을 대비해 폭탄을 만드는 방법을 모의했다. 그러던 윤이상이 갑자기 체포되었다. 만약 섬에서 무기를 제조한 사실이 발각되면 큰일이었다. 그 때 경찰관이 문건을 꺼내들었다. “조선말로 쓰인 문건, 너희 집에서 압수한 거야. 조선말로 가곡을 쓰는 것은 불온한 사상을 퍼트리는 짓이다.” 다행히 비밀이 발각되지는 않았지만 윤이상은 옥고를 치룬 뒤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겨우 탈출하게 된다. 




동백림 간첩단 사건 

한국전쟁 후 1956년 윤이상은 현대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동베를린으로 유학을 갔다.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은 불안했다. 1961년 5.16 쿠테타가 일어나고 박정희가 집권했다. 그러던 중 윤이상은 헤어졌던 친구가 북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교에 대한 관심으로 그는 좌청용 우백호가 그려진 고구려의 강서고분사신도를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북한에 갔고 간첩 누명을 뒤집어썼다.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시절 동베를린은 ‘동백림’으로 불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보내는 친서를 전달하겠다며 그를 부른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그를 한국행 비행기에 태웠다. 한국에 도착한 후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온 그는 모진 고문을 받으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윤이상은 자신의 육신을 민족과 민주의 재단에 바치기로 각오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를 포함한 34명 전원은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부인 이수자 여사도 징역 5년형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작곡을 계속했다. 그렇게 옥중에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완성됐다. 이수자 여사는 옥중악보를 가방에 넣어 다시 유럽으로 향했다. 1969년 독일 뉘른베르크(Nuremberg)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은 대성공을 거뒀다. “현대 오페라의 갈 길을 윤이상이 열어주었다”는 비평가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그 이후 스트라빈스키, 카라얀 등 음악 거장들이 161명이 그의 석방을 청원했고, 압력을 느낀 박정희는 1969년 대통령 특사로 그를 석방시켰다. 


윤이상은 서독으로 추방을 당하고 입국금지를 당하게 된다. 윤이상 음악도 연주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1972년 뮌헨올림픽의 개막 오페라 <심청전>과 같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73년 서울신문사 주최로 윤이상 음악회를 추진했지만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방한은 또 다시 좌절되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윤이상은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성명을 내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의 민주화를 바랬던 서독의 유학생들은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결성하고 윤이상을 의장으로 세웠다. 그는 1977년 일본에서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을 창립하고 유럽본부의장에 추대되었다. 




5.18 광주와 통일운동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


https://www.youtube.com/watch?v=dHoDw-PupYs


전두환의 쿠데타로 인해 한국 현대사의 질곡은 계속되었다. 윤이상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처절한 학살을 보고 분노와 증오에 떨며 교향곡을 작곡했다. 불의에 맞선 교향곡 <광주여 영원히>는 그렇게 탄생했다. 곡 초반부는 강렬한 타악기 연타와 고음으로 시민군들의 항쟁을 표현했다. 중반부는 낮은 현악기와 느린 음율로 학살의 비극을 표현한 후, 종반부는 정의와 새 세상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을 표현하며 장엄하게 끝난다. 윤이상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한 일이라면 고통스러워도 기꺼이 나서면서도 작품 활동은 더욱 철저했다. 그의 예술혼으로 71세의 윤이상은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는다. 


그는 남과 북이 서로 한 핏줄임을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에 통일운동에도 나섰다. 1987년 윤이상은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인터뷰에서 남북합동음악회를 건의했다. 이윽고 1990년 평양에서 범민족통일음악회가 개최된다. 윤이상은 건강이 악화되어 산소 호흡기를 낀 채 평양에 갔다. 10월 14일 서울전통음악연주단 일행 17명과 함께 민간단체가 처음 군사분계선을 넘은 역사적 쾌거였다. 또한 그는 1990년대 초 열사정국을 맞아 <화염속의 천사>라는 곡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분신자살을 했던 대학생들을 기리는 진혼가를 썼다. 



돌아오지 못한 윤이상 

그의 소원은 죽기 전에 한번 만이라고 조국 땅을 밟는 것이었다. 마침 1994년 한국에서 윤이상음악제를 개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윤이상에게 한국 방문에 앞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반성문을 요구했다. 완전한 명예회복을 바랬던 그는 38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려던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윤이상은 병환이 중해져 범민련 해외본부 의장직도 반납하고 일본으로 갔다. 통영 근처까지 가고 싶었던 그는 생애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멀리서 고향땅을 바라만 봐야했다. 그 이후 죽는 날까지 그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다시 독일로 돌아간 그는 멀리 이국땅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음악보다 더 충격적인 윤이상의 인생, 그는 1995년 78세로 삶을 마쳤다. 그가 음악에 담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순수한 열정이 아니었을까.




글_아트렉처 에디터_김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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