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
알론소 루이즈팔라시오스, <박물관 도적단> - 전복과 모순
*케이퍼 무비로서 본 극의 의의
케이퍼무비의 희열은 하층민들이 상류층 및 거대권력을 상대로 벌이는 통쾌한 복수극이라는 것에 있을 테다. <오션스 일레븐>으로 케이퍼무비의 대가에 오른 소더버그의 복귀 작 <로건 럭키>에서 이러한 바가 도드라진다. 범죄를 일으키는 그들 집단의 구성은 한때 군인이었으나 현재는 퇴역하여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얻지 못한 인물과, 직장에서 헌신짝처럼 내버려지는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토사구팽한 그 거대권력을 향한 복수를 행하는데, 이는 비록 반사회적이지만 국가가 그들에게 행한 행동이 더욱 비인간적임을 고발하고 그들의 행위에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파고>에서처럼 그러한 인물들이 인간성을 잃고 행동한다면, 그러한 인물들에게 정의를 구현하는, 보다 사법체계의 정의를 긍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케이퍼무비에서 범죄자들의 행동이 정당화된다면 그것은 더 악한에 가까운 상류층들에 대한 전복으로써, 그리고 범죄자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없다면 그것은 범죄자들의 비인간성을 강조하며 정의 및 인간성을 긍정한다. 그리고 본 글에서 다룰 <박물관 도적단>은 80년대 멕시코로 향하여 이러한 케이퍼무비를 펼쳐내는 작품으로, 본 작품에선 과연 그들의 행위가 긍정될까? 부정될까?
이러한 본 작 또한 '루저'로 규정되는 후안과 윌리의 반항이자 전복에 다름 아니다. 그 도적단은 그들을 둘러싼 기성의 자본체계 및 이데올로기에 전복을 가하고자 한다. 그저 ‘땅꼬마’나 ‘정신병자’ 취급받게 당하지 않는 그들이, 보다 지배 권력을 향해 가하는 일련의 통쾌한 전복이자 반항이다. 하지만 본 극의 전복과 복수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들의 발화를 순수하게 믿는다면 그들은 자본을 바라지는 않는다. 부당한 착취와 자본의 소수독점, 그리고 부르주아지의 부패상에 반하는 기존 케이퍼무비와 달리, 그들이 전복하고자 하는 바는 이 동시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인류사의 근간을 이뤄왔던 역사체계에 반하고자 한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상에 불과한지, 하나의 사건 및 유일한 진실들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고 추측되고, 그것이 정설로 기록되는지 그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의 연출
이러한 바를 영화는 연출의 다양한 변주를 통해서 드러낸다. 가장 먼저 극의 초반부와 후반부의 대비이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대단히 평면적인 구도와 정적인 프레임이 주를 이룬다. 무빙도 이뤄지지 않으며 공간은 여백이 많아 대단히 공허하며, 평면적인 구도가 주를 이루기에 대단히 딱딱하기 그지없다. 한편 후안이 목도하는, 허나 그가 어울리지 않은 세계는 사선구도로 매우 역동적이다. 이렇게 초반부에는 어떠한 생의 즐거움도 찾기 어려운 후안의 세계를 포착하나, 윌리와 함께 박물관 약탈 계획을 진행하며 이러한 그들의 세계를 포착하는 연출은 동적으로 변한다. 그의 관계망만을 역동적으로 포착하던 사선구도나 빠른 무빙은 이제 후안과 윌리를 포착하는 데도 사용된다. 한편 그러한 구도의 역동성은 부숴 지기 쉬운, 그리고 영화의 주제의식에 다름 아닌 유한성에 다다르는 것과 결부되기도 한다.
*역사를 쓰는 주체와 박물관의 역할
케이퍼 무비로서 본 작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역사와 이 세계를 바라보는 후안의 시선에서 기인한다. 우선 후안은 박물관을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기의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진보한 서구문명의 프로파간다에 다름 아니라고 보았다. 더욱이 동시대의 박물관들 또한 자본체제 속에서, 단지 무력 없는 약탈이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후안이 부정하는 것은 그간 역사가 쓰여 진 방식이다. 후안에게서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진실은 그 대상이 유한성, 즉 죽음을 마주했다는 진실뿐이다.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편찬하는 주체에 따라서,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변하므로 그렇게 서술된 역사는 무한히 열려있는 허구이다. 무엇보다 역사는 곧 기억인데, 기억은 영속적이지 못하다. 기억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 편린들과 파편들을 잃어가며 소멸한다. 애써 유한성을 부정하는 유물들은 그 유일한 진리를 거스르고 있음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이는 일상 속에서도 포착되는데, 후안의 조부의 저택에서 났던 화재는 실은 아버지의 실수였지만, 삼촌이 그 누명을 대신 쓰며 그 역사의 진위가 왜곡된다. 후안 자체도 허구에 다름 아닌 역사 속에 둘러싸여 살고 있던 것이다.
*가치의 상대성 및 벤야민의 아우라
더불어 이러한 유물들의 절대성 또한 부정한다. 그러한 유물들의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벤야민이 언급한 원본성이 있고 현존재를 느끼며 아우라를 느끼는 예술들의 경우, 그것 자체가 가진 절대성이라기 보단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거나 유한을 지연시켰다는 희소성에서 기인한다. 그렇기에 본 극에서 두 도적들이 유물을 훔치고 그것이 대서특필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목도하는 많은 예술들은 그 유물들의 진품성을 마주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억겁의 세월을 버텨낸 유물들은 그저 골동품에 다름 아니요, 그 상대적으로 규정된 거대한 가치를 마주하지 못한다. 유물의 가치는 후험적으로 얻은 지식과 경험에 상응하여, 그러한 후험적인 배경을 축적되지 못한 이들은 그 아우라를 목도하지 못한다. 선험적으로 그 유물들은 아무 가치도 갖지 못한다. 이러한 가치의 상대성은 두 도적들이 유물을 강탈하고, 박물관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희소적인 상황인 텅 빈 전시장에서도 발견된다. 그 텅 빈 전시장에서 우리는 어떠한 경험과 지식도 마주할 수 없지만, 오히려 박물관의 텅 빈 상황의 상대적인 희소성 때문에 관람객들은 문전성시를 이룬다.
*새로운 역사 쓰기
이러한 관점에 따라 열려있는 역사편찬의 다의성에 대해서 중후반부의 연출이 상응한다. 영화는 단순히 정적인 연출에서 동적으로만 나아가지 않고 다양한 연출들을 동반한다. 우선 이들이 유적들을 진열대로부터 꺼내는 장면에서 영화는 슬로모션처럼 보이는 트릭을 사용한다. 실제로는 배우들이 멈춰있는 것을 연기하고 있는 바를 마치 사진을 통한 인서트 숏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인데, 이는 역사는 한 사건을 단정 짓고 닫혀있게끔, 마치 스톱모션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사건은 절대 멈춰있지 아니하고 무던히 유동하고 있다. 더욱이 시각과 청각 또한 일치하지 않게끔 만들어, 실제 사건과 역사의 불일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실제와는 거리가 멀 후안이 액션 영화에 나올 법한 역동적인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연주자 없이 피아노가 연주되는 초현실적인 장면 등, 대단히 현실유리적인 연출은 마치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 하나의 단일한 관점만이 사용되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후반부의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동반한 감각성은 후안의 심리에 상응할 텐데, 결말에서 "행동의 의도는 본인만이 알 뿐이며, 때론 본인조차 모른다."는 후안의 말처럼, 후안의 감각성에 상응하는 그러한 연출은 역사가 상상 속으로 집필하는, 그리고 후안이 주장한 역사의 허구성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의 한계
하지만 이러한 연출들이 마냥 감독의 시선에서 오프닝에서도 언급 했듯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의 복제본이다."라는 연출의 방향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출의 다의성은 후안의 모순에서도 기인한다. 후안은 자본체제를 부정한다. 조카들에게 산타를 부정시키고 냉엄한 진실을 드러낸다. 산타는 선한 행동을 하면 그것을 자본으로 보상받는다는 자본체제를 지속시키기 위한 일련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조카들에게 그것의 민낯을 까발리는 것이다. 하지만 후안은 이러한 강탈을 통한 전복을 통해서, 단순히 역사 속에서 유일한 것은 유한성이라는 바를 주장하려 하거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내려는 의도가 서서히 변질된다. 그는 역사 속 왕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본인은 왕이 되기를 자처하며, 더욱이 극의 후반에는 거액을 받고 유물들을 넘기려 한다. 자본체제의 권좌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는 이 체제에 불만족하고 그것을 전복하려 하면서도, 한편 그것에 순응하려는 모순을 띠는 것이다. 이러한 바는 후안의 아버지에 대한 결핍에서 기인할 것이다. 후안은 약탈 직후 아버지가 등장하는 꿈을 꾸고, 이후 잠자리에서 실수를 한다. 소변을 실수한 것인지 몽정을 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자라면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후자라면 아버지의 애정을 갈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자든 후자든 후안의 행동은 가부장적인 제도를 뛰어 넘어서 이를 충족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허나 전복 이후의 방향성이 없기에, 그는 끝끝내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리고 그 애정을 확인받으며, 그는 체포된다. 그래서 본 극은 케이퍼무비로서 모순적인 그들의 행위를 오롯이 긍정하진 않는 것이다.
*정리 및 사담
이러한 바는 윌리가 체포되지 않았기에 감상자들에게 그 전말이 제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바는 이것은 윌리에 의해서 기록된 역사, 특히 극의 중후반부에 윌리가 부재한 역사는 감독의 재량에서 서술됐을 것이라는 바다. 비록 그들은 이데올로기 전면을 전복하지 못했지만, 그 일탈 속에서 우리는 역사 및 아우리가 결코 절대적이지 않음을, 희소적인 상황의 상대성에 다름 아님을 마주할 수 있었다. 더불어 우리를 규정하는 거대구조 및 이데올로기를 전면으로 극복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본 극은 역사와 원본성을 가진 사물들, 그리고 박물관에 대한 절대성을 허물고, 다양한 관점에 따라 다의적으로 규정되는 상대성임을 드러내기 위해 연출조차 이에 상응시켜 대단히 현란하게 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바가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본 극을 정리하고 사담으로 마무리하자면, 본 극이 더욱 흥미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유튜브가 제작한 최초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헌데 유튜브는 동시대에 구글과 함께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박물관에 다름 아닌 거대한 시청각을 아카이빙하는 제국을 세우고 있지 않던가? 그들은 결코 그렇게 아카이빙 된 바를 절대적으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독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천명인 것일까? 과연 유튜브가 제작한 본 작품에 그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할지도 대단히 궁금증을 자아내는 바이다.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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