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짢은” 아름다움에 대하여
-낯설고 두려운 추의 미학-
예술에서 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레디메이드들의 선택이 결코 미적 쾌감의 명령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 마르셸 뒤샹은 심미적 특질이 전혀 없는 남성 소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이고 예술이라 명명했다. 뒤샹의 정신을 잇는 현대 전위예술가들은 좋은 예술이 꼭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라는 데 적극 동참한다. 이들은 예술을 정의하는 필요조건에서 미를 과감히 제거하고, 예술감상의 주요한 목적인 쾌를 파괴하며,미술계가 오랫동안 공식화했던 작품이 되기 위한 요건과 미의 개념을 전복한다.
전통적인 미인식상에서 본다면 -특히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미 란 완벽한 균형, 비례, 질서를 갖춰야 하는 것이고 이를 충족시키지 않거나 욕보인 예술은 추하다. 추한 것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며, 풍요로운 감상을 방해하고, 합리적인 해명을 하지 못하므로 불쾌를 유발한다.
이러한 전통적인 미 개념의 지배를 받지 않는 추한 것을 볼 때 밀려드는 언짢음은 우리에게 충격과 공포와 무기력감을 들게 한다. 그러나 이 뒤틀린 미의식이 미를 보는 다른 시각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우리는 이 뒤틀린 아름다움에 두렵지만 강하게 매료되고, 가늠할 수 없는 파격에 열광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에 의해 유기된 상상력은 믿기 어려운 괴물들을 생산한다.
이성과 결합된 상상력은 예술의 어머니이다”, 프란시스코 고야
추의 미학
미술사에서 '추'*가 전면적으로 부각된 건 20세기 전위예술가들의 행보와 맞물리지만, 추의 등장은 그보다 일찍 낭만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 글에서는 불쾌하고 낯설며 정의하기 힘든 비합리적인 것을 통칭하여 추라고 부르겠다.
낭만주의적 경향인 '추',다른 말로 '그로테스크'는 합리주의적 미학의 영역에 본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시대의 규범에 따라 정의되었던 획일적 미의 전횡으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해방시키면서 그 속에 편견과 억압, 체념과 원망, 잔인성과 광기, 해학과 풍자를 담아내었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파리』는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성당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들과 그것에 얽히고설킨 여러 인물들의 드라마틱한 운명을 당대 프랑스의 사회상과 결부시켜 묘사했다.흥미롭게도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는 괴물이고, 카지모도는 위고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보기 흉한 난쟁이다. 이들은 서사시적 신화의 웅대함과 환상적 요소, 인간의 추하고 아름다운 모든 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위고는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하여 부정하다 여기고 악이라 칭하며 금기시했던 것들, 어긋나고 비정상적인 기형,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추한 것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경험될 수 있음을 성토한다.
낭만주의의 선언문이자 정수라고 꼽히는 위고의 희곡 『크롬웰 서문』(1827) 또한 그로테스크 유형을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위고의 현대적인 미의식을 잘 드러낸다.
반대로 현대의 사고 속에서 그로테스크는 무한한 역할을 한다. 그는 도처에 존재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기형과 무서움을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희극과 광대짓을 만들어낸다. 그로테스크는 자연이 예술에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 풍요로운 근원이다.
기독교는 시를 진실로 안내한다. (…) 시는 창조에 있어서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 추함이 아름다움 곁에, 기형적인 것이 우아한 것 가까이에, 숭고한 것 이면에 그로테스크가, 선과 악, 그림자와 빛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김찬자: 2010)
자연이 어떤 혼란에 의해서 자기 법칙에서 벗어날 경우, 모순 속에 빠진 자연의 형상은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대척한다. 추는 자연의 합법칙성에 반한 결과물이다. 마치 고야의 작품 <the Giant>(1814-1818)의 거인처럼 말이다. 고야의 거인은 자연의 오류로 생겨난 잘못된 형상이다. 화가는 이 불쾌한 것을 은폐하지 않고 전면에 내세우며 회피하는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괴물의 모습은 친숙한 아름다음과는 분명 거리가 멀며 우리로 하여금 그 어떤 쾌의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이러한 비천하고 추한 존재가 위고의 글과 고야의 그림에서 나름의 특권을 가진 대상으로 인정되고 있는 점은 실로 놀라운 미학적 업적이다. 추를 미의 왕좌에 슬그머니 올려놓았으니 말이다.
칸트는 "역겨움만큼 미와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추는 때때로 뜻밖의 즐거움을 선사하며 -역겨움을 희화화로 전복시킴으로써- 미로 승격되는 가능성을 연다. 추가 즐거움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말은 언뜻 모순적인 것처럼 들린다.보편적인 추의 개념은 부정확하고 천박하며 역겨움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를 로젠크란츠(Johann Karl Friedrich Rosenkranz) 가 주장하기로 추는 미와 코믹의 사이 그 한가운데에 위치하기 때문에 희화화가 가능하다. 이와 같이 보건대 추가 유쾌해질 때 미로 전환될 수 있다. 추는 미에 대립적이므로 이 둘은 모순적 관계이나, 추는 코믹해질 수 있고 코믹은 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눈이 감기는 바로 그 순간, 생각보다 그리 무기력하지 않은 머릿속에서 또 하나의 다른 눈이 열린다.미지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모르고 지내던 세계의 어두운 사물들이 인간의 이웃이 된다” , 빅토르 위고
낯선 형태, 모호하고 두려운 감정
그로테스크하고 광적이며 비이성적인 낭만주의 미술은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 미술을 태동케 한 원동력이 되었다.낭만주의의 무한해진 아이러니는 초현실주의자들에게 보이는 것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 두렵고도 숭고한 것, 독일 철학자들이 말한 우리 경험의 ‘어두운 면’에 관심을 쏟게 했다. 이들은 꿈, 연금술, 영혼과 같은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에 몰입하며 신비의 관념, 자아의 발견, 무의식의 탐구에 열중했다.
단언했던 확실성마저 무한한 불확실성으로 변하고 모든 고정된 가치와 해석은 의심되자. 초현실주의자들은 경험적인 지각의 영역 너머로 너무나 심오해서 현실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리얼리티를 펼쳐야 했다. ‘꿈’과 '무의식', '우연의 기법'을 통해서 말이다.
앙드레 브르통과 그의 친구들이 원시 초현실주의자라고 위시했던 위고는, 초현실적인 성향으로 평가되는 회화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 <버섯>은 우리가 익히 인지하고 있고 경험한 바 있는 버섯이 아니다. 버섯은 거대한 나무처럼 땅위로 불뚝 솟아올랐다. 지평선 너머로 멀리 보이는 마을을 내려다보는 버섯의 모습은 위협적이다. 또한 브라운 배경에 점점이 이어진 하얀 물감칠은 버섯의 유독한 홀씨가 날리는 모양 같다. 버섯을 구성하는 주된 색채인 주황색과 녹색의 병치도 곰팡이와 균을 연상케 하며 유독한 인상을 준다.
감상자가 느끼는 이 불쾌한 감정은 정신분석학자 에른스트 옌치(Ernst Jentsch, On the Psychology of the Uncanny : 1906)가 주지하는 실사와 리얼리티 사이의 차이에서 생기는 거부감 및 혐오의 감정과 유사하다. 19세기 말 파리에서는 외관상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물 크기의 밀랍인형이나 자동인형 퍼레이드가 주요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파리 시민들은 이것을 보고 쾌가 아닌 불쾌의 감정을 더 느꼈다. ‘새롭고 친숙하지 않은(unfamiliar)’ 대상으로부터 받는 감정은 저것이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하는 의혹을 키우며 모호하고 두려운 감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20세기에 들어 낭만주의의 정신에 뿌리를 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대표적인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상이한 시-공간을 병치하거나, 우리의 확고부동한 인식체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과감하게 사고를 뒤집는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예컨대 그의 작품 <집단적 발명(돌연변이)>은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인어공주의 형태를 거꾸로 뒤집어 우리의 상식을 깨트린다. 인어공주의 예쁜 얼굴을 감상할 것을 기대한 관람자에게 난데없이 여성의 신체 하부를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를 난처하게 한다.
또 다른 초현실주의자 조르조 데 키리코는 익숙한 풍경에 낯선 불안감을 가미한 작품들을 많이 그렸다. 그는 우연의 기법을 사용하여 아무런 상관 없는 사물과 임의대로 배치해 놓고 우리에게 형의상학적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작품 <사랑의 노래>처럼 말이다. 작품속엔 아무런 연관성 없는 고대시대의 석조상과 외과 수술용 장갑 그리고 녹색 공이 동일한 무게를 가지고 화면을 무겁게 압도한다.
조르조 데 기리코가 직접 말했듯이 "가장 사실적인 묘사 기법을 사용하여 부조화를 창조할 때 우리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이하고 오묘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친숙한 것이 어느 날 낯설게 바뀌었을 때 우리는 당혹스럽다. 급기야 두려운 감정도 인다.
“우연의 지배, 생각지도 않았던 만남과 뜻밖의 인사, 긴장과 이완의 끊임없는 교차, 무시무시하고 기이하며 악마적인 것을 통하여 억지로 관중을 압도하는 수법”(아르놀트 하우저: 1999)은 감상자로 하여금 동일한 인식의 지평위에 꿈과 현실이 어우러지고 충돌하는 환상을 경험케 하며 곧장 ‘낯선 두려움’, 언케니(Uncanny)의 감정을 유발시킨다.
저명한 미술사학자 할 포스터는 언캐니의 감정을 경이(marvelous)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통합된 정체성이나 미적 규범이나 사회질서 등을 파열 시"킴으로써 발생된 이 "발작적 아름다움"은 흡사 "베일에 가려진 에로틱한 것이자 정지된 폭발"(진중권: 2014) 로서 우리를 당혹케 한다.
“나에겐 미를 암살하고 싶은, 별처럼 빛나는 미친 욕망이 있다”
, 트리스탕 차라
미를 향한 욕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랭보가 말했다. "어느 날 저녁 미를 무릎 위에 앉혔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어주었다."(《지옥에서 보낸 한 철》)
정숙하고 매끈한 아름다움은 고통받고 있다. 추는 예술의 영토에 자리를 마련하고 미에 씌워진 오래된 영광을 멸시한다.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이 되고 그 가치를 칭송받았던 미의 시대는 끝났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복잡해진 사회 양상 속에서 아름다움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 가? 무엇이 아름다움을 결정하는가? 우리는 이 난처한 질문에 합당한 답을 찾기 위해 숙고할 필요가 있다. 형식적으로는 역겨운 예술이 그 "내용면에서 사회적 문제와 관련이 있을 때 그 예술은 심미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아서 단토: 2018)지 않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미숙함으로, 부도덕함으로, 혐오로, 악이라 폄하되어 아름답다 공인받지 못한 추가 이제는 종래의 미를 욕보이며 예술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예술을 보는 눈'을 변화시키는 언짢은 짓을 마다하지 않으며.
[참고문헌]
김찬자(2010), 「빅토르 위고 연극과 그로테스크 미학; 『크롬웰』 서문과 『뤼 블라스』를 중심으 로」, 한국 프랑스학 논집 제 69집.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염무웅·반성완 옮김 (1999),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창작과 비평사.
진중권(2014), 『이미지 인문학 2: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천년의 상상.
아서 단토, 김한영 옮김, (2018) 『미를 욕보이다: 미의 역사와 현대에술의 의미』,바다 출판사.
아트렉처 에디터_양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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