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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18. 2019

파비안느에 대한 진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녀라는 신화를 둘러싼 비동일자들

https://artlecture.com/article/1271


스웨덴의 두 위대한 베리만(bergman)은 언젠가 서로 간의 협업을 다짐하였다.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탈리아와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을 이어갔던 반면, 잉마르 베리만은 스웨덴과 독일을 오가며 활동했기 때문에 서로를 높게 평하면서도, 그 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 두 위대한 베리만의 협업은 1978년에 이르러서야 성사되었다. 잉마르 베리만은 실제 잉그리드 버그만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가을 소나타>의 대본을 완성하게 된다. 배우라는 직업이 피아니스트로 뒤바뀌었을 뿐, 가정에 소홀한 어머니라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했다. 물론 실제 버그만과 <가을 소나타>속의 샬롯을 온당 동일시 할 순 없다. 버그만의 자식들에 따르면 그녀의 불륜이나 이혼, 그리고 연기로 인해 자주 가정을 비우던 생활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였다고 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그만은 딸 에바를 향해 냉혹하게 대해야만 하는 대본이 낯설게만 느껴져, 이를 친밀하게 연기하다 베리만과 일련의 불화를 겪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원만히 해소되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가을 소나타>는 어머니로서의 버그만의 삶에 일부 영감을 받아 부모와 자식 간의 자유와 구속의 딜레마를 포착하고, 서로의 열망이 쉬이 해소되지 않는 악순환을 포착한 극이었다. 이 같은 위대한 두 베리만의 협업을 언급한 이유는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처음으로 일본을 떠나 프랑스에서 펼쳐낸 신작 <파비엔느에 대한 진실>이 <가을 소나타>와 유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모녀가 띠는 애증의 관계가 이야기의 주된 소재라는 점에서 또한 까뜨린느 드뇌브가 맡은 파비안느라는 배역이 전설적인 배우로서, 그녀와 온당 유리되지 않는 점들이 마치 <가을 소나타>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진다.      





스웨덴의 두 베리만이 담아낸 모녀관계의 탐구에서 목도한 것은 갈증으로 메말라 쩍쩍 갈라진 인간의 내면이었다면, 과연 프랑스의 위대한 두 여배우와 협업을 행한 히로카즈가 바라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본 작품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가 연상되는 이유는 유명인으로서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방종한 보호자와 이에 결핍을 느끼는 딸의 구도가 나타난다는 것에서도 있겠지만, 본 극의 계절이 가을이라는 것 또한 본 작품과의 유사성으로 꼽을 수 있는 요소이다. 본 극은 시작 푸르렀던 한 여름날의 나무가 쇠하여 서서히 단풍으로 변해, 그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잎새들을 대지로 추락시키는 장면이 가장 먼저 포착된다. 그리고 영화의 채도가 비교적 낮고 그늘이 진 듯, 미약한 어둠이 강조되어 본 극의 미장센 자체도 생기를 띠진 않는다. 몇 년째 열지 않아 먼지가 잔뜩 쌓인 케케묵은 다락방을 열어젖힌 듯한 느낌이다. 파비안느의 저택 내부뿐만 아니라 바깥의 정원 또한 마치 미로처럼 느껴져, 뤼미르 내외가 그 어둠을 헤쳐 나오는 것은 온당 밝아 보이지 않고 지쳐 보인다. 이 같은 미장센을 더욱이 대단히 느리고도 더딘 움직임으로 포착하지 않던가. 메타 영화로서 과연 예술이 무엇을 담아야하는지에 대한 고찰도 담긴 본 극은 일련의 미장아빔 구성을 띠고 있으며, 영화 속 영화라 할 수 있는 어머니의 기억에 관한 작품을 촬영하는 현장에서 본 극의 연출은 역동적인 편으로 변모한다. 그래서 영화의 느린 호흡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모든 것이 추락해가고 사멸해가는 가을의 계절감에 기인한 우울한 형식인 것일까, 아니면 딸과 어머니의 느리고 진전 없는 관계에 기인하는 것일까.



<가을 소나타>에서는 어머니 샬롯이 에바의 저택에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샬롯은 에바에게 관심은 없고, 온당 자신의 여행, 무대 이야기만 토해내듯 늘여놓는다. 하지만 본 극은 딸 뤼미르가 어머니 파비안느에게 찾아오면서 변주를 가한다. 그리고 이 방문이 파비안느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한, 즉 어머니를 위한 딸의 방문이라는 것과, 뤼미르 내외가 도달했음에도 그들에게는 무신경하고 여전히 자신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보일지와 관련된 인터뷰에만 매진하는 장면을 통해 그녀의 이기심을 강조한다. 영화 속 언어는 파비안느의 세계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불어와, 그녀를 피해 떠난 뤼미르와 그녀가 결혼한 행크의 세계인 뉴욕의 영어로 양분된다. 방문에 앞서 영어를 사용하던 그들은 이제 불어를 사용해야만 하지만 행크는 그 언어가 서툴다. 하지만 파비안느는 해석도 할 수 없는 그를 향해 언제나 불어를 쏟아낸다. 그녀로부터 그는 소외된다. 샤를로뜨는 어릴 적 어머니가 묵던 방문을 열어젖힌다. 그와 동시에 뤼미르가 파비안느를 향한 서운함도 쏟아진 듯, 그녀의 고백이 이어진다. 영화는 뤼미르나 파비안느의 뒷모습을 포착하는 연출이 도드라진다. 그 뒷모습은 차이가 있다. 파비안느의 뒷모습은 언제나 누군가가 그 매무새를 빗질로 다듬어준 것이라면, 뤼미르의 뒷모습은 언제나 자신이 정돈한 것이다. 딸은 어머니가 자신에게는 빗질을 해준 적 없다고 그 서운함을 책망한다. 또한 파비안느가 인간을 동물로 변이시키는 '벵센 숲의 마녀'라는 별명이 붙여진 것은 왜일까. 파비안느가 남편 피에르를 가차 없이 쫓아낸 것이, 성가신 대상을 동물로 변이시키는 마녀의 잔혹함과 유사하진 않은가. 뤼미르가 언제나 떠나가고 싶었지만 방문해야만 하는 파비안느의 저택, 딸이 떠나고 싶었던 것은 모친의 자기중심적인 태도에 다름 아닐 것이다.



뤼미르 내외가 파비안느의 저택에 발을 들인 이유는, 그녀의 자서전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을 읽은 뤼미르는 파비안느의 자서전에서 어떠한 진실도 찾을 수 없다고 그녀를 비난한다. 파비안느의 라이벌인 것처럼 보이는 사라에 대한 이야기가 자서전에 쏙 빠져있다. 영화가 전개된 이후 파비안느가 사라의 배역을 가로채어 배우로서 성공을 했다는 것과 그것이 그녀의 죽음에 일련 영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라가 뤼미르에게는 어머니와 같은 친근한 존재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허나 파비안느에 대한 성공담은 사라가 배제되어 아마도 그 기술은 자기중심적으로 서술되었을 것이며, 사라가 맡곤 했던 어머니의 역할은 어느새 파비안느의 것이 되어있다. 자신을 오랜 시간 옆에서 보조했던 뤼크의 존재 또한 자서전에 온당 지워내고, 아마 마찬가지로 그가 했을 무수한 행위들은 모두 그녀에게 이행되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파비안느의 자서전은 하나의 신화이다. 그것은 아도르노가 신화를 설명하는 것과 유사하다. 태초 인류의 숭배대상인 자연은, 이내 곧 그리스 신화 속 인간과 유사한 신의 모습과 같이, 일련의 의인화 과정을 거쳐 인간과 동일해진다. 이러한 신들은 자연을 지배한다. 자연을 숭배하던 인간은 자신과 동일한 신의 모습을 숭배하게 되고, 그 신은 자연을 지배하니 인류는 어느새 자연의 숭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정복자가 되었다. 파비안느가 자서전을 서술하는 태도가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신적인 자신을 논하기 위해 나와 다른 비동일자들의 존재를 지우거나, 그 역할을 자신과 동화한다. 그렇게 탄생한 이기적인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 이 같은 신화를 방해하는 이들이 논하는, 그녀의 자서전에 반하는 진실을 참을 수 없다. 이기적인 그녀는 차가운 독설로 그들의 주장을 비난하고 관철시키려하거나, 촬영을 펑크낸다. 하지만 히로카즈는 그 이기심을 결코 파비안느의 요소로만 축소시키지 않는다.  



영화는 모두가 이기적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뤼미르가 파비안느에 대한 기억들을 파편적으로, 편향되게 회고하는 것에서 그녀 또한 버려진 딸의 모습을 위해 파비안느를 필요 이상으로 곡해하고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그리고 뤼미르는 파비안느가 일상 속에서도 어머니를 연기하지 않고 배우라는 역할을 연기하며 살았던 것처럼,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을 그녀에게 보이기 위해 행크가 알코올중독자라는 사실을 애써 지워낸다. 영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메타 영화적인 탐구가 도드라진다. 히로카즈는 배우인 파비안느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를, 영화 속 영화인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논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우주로 향하고, 지상에서는 늙어가는 딸의 일대기를 다루는 일련의 sf 드라마다. 그리고 본 극 속에서 죽음을 거부하고 우주로 향한 어머니는 마찬가지로 교도소 옆에 놓여 갑갑하기 짝이 없는 저택이 아니라, 환상과 우주를 논하는 세트장으로 향하는 파비안느와 동일시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 여기에서도 “엄마라고 부르지 마”라고 뤼미르에게 요구하며, 배우의 정체성이 자명한 파비안느라 부르기를 명한다. 또한 딸은 그녀보다 의젓해져버린 뤼미르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분명 가상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온당 진실이 아니다. 르누아르의 침울함이 과연 본 극이 요구하는 몰입과 온당 동일하다 볼 수 있을까, 개를 잃은 배우의 슬픔이 곧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논하는 극과 동일시되는 것이 진실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본 작품은 곧 어떤 진실을 가리킨다. 어떤 대상을 논하든 현실의 침울함이나 비통에서 비롯한 슬픔의 감정은 결국 진실이다. 영화 속에서 딸을 연기하는 것에 능숙한 파비안느가, 어머니와 관련된 연기나 감정을 연기하는 것에 있어서는 지속적으로 미숙하고 어려움을 겪는 것에도 그 감정의 진위와 관련된다. 그리고 파비안느와 행크의 대화 또한 둘의 다른 언어 때문에 온당 진실이 매개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행크는 파비안느가 논하는 어떤 감정의 진위를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발화의 모든 진실을 깨우치진 못했지만, 그 틀에 스며있는 정신을 이해한 것이다.     







히로카즈가 강조하는 것이 거짓이라고도 볼 수 있을 가상적 형식에 스며있을 진실한 정신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극의 후반부에 이는 적나라하게 강조되지 않던가. 파비안느는 뤼크에 대해 진실한 미안함을 갖고 있지만, 이를 표현하지 못해 뤼미르에게 대본을 요구한다. 이 대본을 연기하는 파비안느는 결코 거짓이라 보기 어렵다. 이후 뤼미르는 샤를로뜨에게 파비안느를 향한 어떤 대본을 써준다. 커서 배우를 희망하고 그렇게 되기까지 할머니가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대사, 아이는 그것의 진위에 대해 논하고 뤼미르는 그저 미소만 짓는다. 마치 답을 감상자에게 열어두는 듯, 허나 그것이 거짓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아이가 파비안느에 대해 애정 어린 감정을 가지고 그 발화를 행했다면 그것은 결코 거짓이 아닐 것이다. 이 같은 샤를로뜨에게서 포착되는 것은 극의 후반부를 관통하는 대사뿐이 아니다. 극의 서두에서 아이는 뤼미르가 어렸을 적 어땠을지 몸소 재현하는 듯 언제나 혼자 있었고, 파비안느가 행크에게 독설을 행하며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식사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사건들을 고사하고서라도 행크와 샤를로뜨의 친밀한 모습은 강조되지만, 뤼미르와 샤를로뜨의 유대감은 행크의 곁에 놓인 샤를로뜨 만큼 강조되지 않는다. 샤를로뜨는 뤼미르의 어렸을 적을 몸소 재현하는 듯 보인다. 파비안느, 뤼미르 양자 모두 그것을 수행한 적이 없기에 세대의 비극은 반복되는 것일까. 허나 파비안느는 어려워하던 연기를 어떤 연상, 몰입으로 인해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뤼미르의 도움 없이, 어머니의 역할을 표현하며 서서히 모녀의 관계도 개선되지 않던가. 언제나 두 모녀는 서로를 동일자로 바라봤다. 자신의 배우 신화를 위한 이상적인 딸의 모습, 핍박받은 딸의 이미지를 위한 악한 어머니의 모습, 허나 그러한 억견을 씻어내고 그저 자신과 다른 비동일자로서 존재 자체를 마주한다. 언제나 행크를 향해 번역되지 않던 불어가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번역되거나, 영어로 대화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중이 돋보이는 변화로서 엿보인다.     



그리고 이 같은 비동일자를 마주하는 일은 상대를 존중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구축하고자 하는 신화를 위해서 자신의 기억까지도 은폐하는 수고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파비안느는 사라를 연상케 하는 촬영을 힘겨워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응시하여 이겨내고, 지금까지 털어놓은 적 없는 어머니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뤼미르에게 내비친다. 어쩌면 이 같은 신화의 저술, 이를 위한 연극은 대단히 타율적인 것인지 모른다. 신화와 연극이 어떻게 보일지에 관련되기에, 이를 위한 행동들은 언제나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제 2의 사라로 불리는 신화를 써내려가는 르누아르가 내뱉는 “내 얼굴이 안보일까 해서요.”라는 대사 또한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 같은 시선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난다면 주체성의 회복이 가능하니, 행크는 그 과정을 겪는 뤼미르를 향해, 이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대본을 써보는 것은 어떠냐고 묻는다. 어머니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던 뤼미르에게서 주체성의 물꼬가 튼 것이다. 사실 영화는 파비안느를 통해서도 주체성에 대해서 줄곧 논의했다. 그녀의 삶은 이제 헐벗은 겨울의 고목처럼 죽음을 바라보고 있으며, 동료들은 모두 삶과 죽음의 교차로에 놓여있고 파비안느도 사실 피차일반이다. 그녀가 줄줄이 읊는 전설적인 배우들, 지속하고 싶은 그 역할, 허나 그녀는 죽음과 노화에 의해 그것이 불발될 것이 두렵다. 전자는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후자에 의해서 좌절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히로카즈는 논하는 듯 보인다. 영화 속 메타영화라 할 수 있는 시퀀스들로 보건데 파비안느는 지금까지 어머니와 관련된 역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제는 삶의 마침표를 바라보는 그 나이에, 그녀는 새롭게 연기할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하여 재촬영까지 요구할 정도다. 파비안느는 은퇴 논의에 걱정을 할지언정, 단정하지도 답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주체성은 열려있다. 파비안느로 보건데 뤼미르가 쓰고 싶은 것, 연기하고 싶은 것도 죽기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있을 것이다.      



그 죽음은 갑작스럽게 닥쳐온 것이다. 본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에 다름 아닌 무도회 장면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 과격하고도 거칠게 컷되어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갑작스러운 순간에 끝이 나고야 말 것을 예고하듯 보인다. 하지만 그 죽음이라는 숙명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 타인을 희생시키는 방종한 욕망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열망에, 영화의 결말은 하이 앵글에서 그들을 포착하며 일련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늙고 싶지 않았던 엄마, 그녀로 인해 너무도 빨리 성숙해져버린 딸, 베리만은 양자 사이의 넘어설 수 없는 거대한 심연, 골을 포착했다면, 히로카즈는 그보다는 희망적으로 좁혀질 수 있는 거리에 대해 논한다. 그것은 아도르노가 신화의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자기가 비동일적인 타자 속으로 들어가서 이해하는, 일련의 역지사지를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가고>에서처럼 여전히 부모 앞에서면 아이로 돌아가 버리는 어른들에 대한 시선을 프랑스에서 이어간다. 또한 본 작품은 히로카즈가 행하는 일련의 메타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가상이기에 기만이 아닐까? 배우들이 표현하는 것, 감독이 논하는 것 모두다 현실과 온당 일치하지 않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게 논의된 것, 설령 그 형식은 가상이더라도 이에 담아낸 것이 진실이라면 예술은 그리 무의미하지 않다는 태도를 히로카즈는 취하는 듯 보인다. 영화 속 영화가 그들의 인생을 가리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를 빌려와 그의 전작 중 하나인 <태풍이 지나가고>에서 보여줬던 주제를 이어나간다는 점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작품이지만, 이와 더불어 히로카즈가 지금껏 드러내지 않았던 예술론에 대한 탐구가 직접적으로 표명된 작품으로서 눈여겨볼 작품이라 생각된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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