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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Dec 23. 2019

열려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가, 새어 나가는가

마틴 스콜세지, <아이리시맨>

https://artlecture.com/article/1283


*미국의 마피아

미국 내 마피아 영화의 거장을 꼽으라면 단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마틴 스콜세지, 이 두 이름이 오르내릴 것이다. 하지만 둘의 마피아는 선명하게 다르다. 코폴라는 시칠리에서 넘어온 본토 적통의 마피아를 다룬다. 스콜세지도 분명 그들이 형성한 마피아 세계를 다룬다는 것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콜세지는 그 세계 속에 서서히 속해가는, 한편 속해가면서도 본래 미국에서 먼저 갱을 형성했던 아일랜드계를 주로 포착한다. 이를 코폴라와 스콜세지의 작품 양자 모두에 출연했던 로버트 드 니로를 통해 포착한다면, <대부 2>에서도 그리고 <좋은친구들>에서도 그는 마피아를 연기하고 있었지만, 전자에서는 시칠리 억양을 사용하는 이탈리아인을, 후자에서는 미국으로 이민 온 아일랜드계 미국인을 연기하였다. 그래서 코폴라의 시선은 시칠리의 마피아들이 미국으로 넘어온 직후인 1세대의 사건을 다룬다면, 스콜세지의 시선은 그 이후에 마피아 조직이 어떻게 지탱되는지를 포착하는 2세대의 역사를 포착하였다. 스콜세지가 포착한 마피아 세계에 속하기를 원하는 것은 대부분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이다. 그들이 미국 내에서 당해온 수모와 배척의 역사에 의해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대단히 어려웠음을 생각한다면, 마피아에 속하는 것은 삶의 지속과 출세를 위한 내몰린 선택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마피아 구성원들의 삶을 포착한 <좋은친구들>이나 <카지노>에서도, 그리고 보다 간접적으로 눈을 돌린 <갱스 오브 뉴욕>에서도 언제나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을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카지노>의 계보를 이어간다고 할 수 있을 그의 신작 <아이리시맨>에서도 이 같은 시선을 이어간다. 마피아의 세계, 그리고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삶은 본 작품에 이르러 거대한 집대성을 이룬다.



*디에이징을 비롯한 연출

영화는 본 극의 주인공 프랭크가 최후를 기다린다고 볼 수 있을 퇴직자 쉼터를 달리 인으로 파고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다. 비교적 현실의 이미지와 장르적인 기대 사이에서 절충을 선보이는 스콜세지의 연출은 본 극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본 극은 연출에서부터 서사까지 분명 이전 작품들과 다른 궤가 존재한다. 영화는 움직임이 대두되지 않는다. 물론 트래블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고정된 카메라에서 포착된 정적인 숏들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패닝과 같은 제한된 움직임이 트래블링보다 도드라진다. 이후에도 설명하겠지만 이 같은 제한되어있는 연출은 본 극의 주인공 프랭크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갈뿐, 일련의 주체적인 선택이 불가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연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트래킹은 조직 내에서 몸담는 프랭크의 삶이나,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삶 등에 상응하며 대비를 이룬다. 그리고 우리는 드니로를 비롯해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20세기의 전설들을 비교적 젊게 만들어놓은 디에이징에 자연스레 눈이 간다. 한 인물을 구축함에 있어 지금까지는 <문라이트>와 같이 섬세한 캐스팅이나 분장이 일반적이었다면, 이제는 한 인물이 몸소 시간의 흐름을 새겨가는 일대기를 더욱 정교하고도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도래한 것이리라. 영화 속에서 줄곧 인서트하는 현실의 푸티지들처럼, 스콜세지는 그의 막바지 작품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근접하고 있다. 그리고 <좋은친구들>이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사용된 전매특허와도 같은 프로즌 프레임 또한 본 극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죽음의 징후

프로즌 프레임이라는 기법 자체가 사용된다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연출이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이전 작들과 철저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전 작들에서 프로즌 프레임으로 인물을 포착하는 것은 현실 속의 그들을 사진기로 촬영한 것과도 같은 인상을 줬고, 무엇보다 프로즌 프레임 이후에 전개되는 그들에 대한 서사는 지속되고 있는 삶이었다. 하지만 본 극의 프로즌 프레임은 얼어붙은 형식 그것 자체에 집중한다. 프로즌 프레임은 죽음에 상응하고 특히나 자연사한 인물들을 평범한 프레임에 담아내는 것과 대비를 이루며, 마피아와 갱의 세계에 몸담으며 중단되어버린 개인들의 삶을 경고하듯 보여준다. 삶과 죽음을 드러내는 프로즌 프레임의 상반된 사용처럼, 본 극에서 폭력이나 죽음에 대한 스콜세지의 태도는 이전 작들과 사뭇 달라진 경향이 있다. 죽음 그것 자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 이를 차갑게 포착하는 연출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나 포착되는 죽음보다, 암시적으로 조심스레 다뤄지는 죽음이 더욱 많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죽을 때 영화는 카메라를 돌리거나, 아니면 대신 꽃을 포착한다. 더 이상 죽음 자체를 낭만적이거나 스타일리쉬하게 포착하는 스콜세지의 연출은 본 극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재즈선율과 슬로우 모션이 동원되었으나 포착되는 것은 소요사태인, 시청각적으로 모순된 상황 속에서 균열을 포착하는 것 이외에는 대단히 드물다. 폭력 또한 <성난 황소>랄지 <갱스 오브 뉴욕>과 같은 작품에서의 감각성이 동원되지 않는다. 죽음과 폭력은 그것 자체의 본질적인 속성처럼 대단히 차갑고 비정하게 다뤄질 뿐이다. 물론 이전 작들의 스타일리쉬한 경향에서 그것을 이상화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분명 그럴 여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 극에 이르러서 그는 이 모든 여지를 축소시킨다.




*혼탁한 세계

프랭크가 페인트공이라고 소개되는 동시에 벽에 번지는 시뻘건 핏줄기와, 죽음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도살된 소들의 주검에는 어떠한 감각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다루는 이들은 죽음이 두렵다. 러셀이 철저히 차내 금연을 행하는 것도 모든 위험으로부터 유리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스콜세지는 폭력이 어떻게 순환되고 비호되는지를 포착한다. 영화의 초반 시퀀스에서 프랭크의 부정함에 식탁은 얼어붙는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또한 세례를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누군가의 주검에서 흘러나온 피에 의해 프랭크의 가정에서는 새로운 생명들이 태어나는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생명을 교회는 축복하며, 이는 이후에도 마피아 구성원들이 줄곧 향하는 장소로서 그들이 죄를 씻어내고자 하는 장소요, 또한 그 공간은 그들을 사하는 듯 보인다. 교회가 마피아들의 자본에 굴복했다는 것은 암시되지 않으나, 정치권과 법조계를 들여다본다면 종교계에 대한 로비도 결코 그들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그들에게서 중요한 것은 정의나 진실이 아니다. 마피아 구성원들은 판사를 매수하여 그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리게끔 움직인다. 트럭운전노동자 노조가 마피아에 결탁한 것도, 케네디나 닉슨이 그들과 결코 유리되지 못하는 것도 결국에는 자본이다. 케네디의 암살이 생중계되는 와중에도 명랑한 네스카페 광고는 결코 배제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처럼 대단히 천박한 자본주의, 허나 영화는 퇴조하는 마피아들의 시대를 담아낸다. 자신을 괴롭히던 케네디의 시대에 지미의 성조기는 느슨하게 개양되었던 반면, 케네디의 죽음 이후에 그는 다시금 위풍당당하게 국기를 개양한다. 그가 바라는 미국이 바로 선 것만 같지만, 이후에 포착되는 것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들의 자멸이다.


영화는 어찌됐든 음지의 세계라 여겨지는 것을 포착한다. 그래서 프랭키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세계에 깊숙하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밤과 뒷골목, 자욱한 안개와 폐쇄성 등 느와르 극의 특징적인 미장센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오히려 빛이 들어오는 것은 지미가 수감된 감옥과 같은 음지요, 바로 이어서 하얀 차고가 포착되며 양지와의 대비를 이루는 것 같지만, 이내 곧 어두운 차량이 포착되고 여기에는 총격이 쏟아지며 오히려 양지에 그늘을 드리우게 만든다. 영화는 양지와 음지를 엄연히 구분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권력의 유무이다. 영화의 중반부로 넘어서면 이탈리아계로 대변되는 마피아들과 아일랜드계인 노조 위원장 지미의 갈등이 도드라진다. 이전에 지미는 아이리쉬임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 배지를 차는 등, 서로의 뒷배를 봐주는 결탁에 의해 두 세계는 친밀했다. 하지만 두 세계는 엄연히 분리되고 위계가 나뉘어있었다. 아이리쉬가 이탈리안임을 자처할 순 있으나, 이탈리안들이 아이리쉬를 자처하진 않는다. 그리고 두 세계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10분과 15분이라는 시간에 대한 자존심싸움 속에서 프랭키가 주장하는 12분 30초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결코 사과하지 않는 것도 타인의 권력 앞에서 자신의 권력을 굴복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두 세계를 오가는 프랭키는 결국 하나의 세계를 포착할 수밖에 없다. 이탈리안의 세계, 이에 그는 자신의 딸 페기의 대부와도 같았고 정치적 동지에도 다름 아니었던 지미를 살해하게 된다. 지미의 단말마가 들려온 어둠으로 자욱한 집이 포착된 이후의 시퀀스는 새하얘 창광한 하늘이다. 허나 이제는 음지에서 죽음이 포착되고, 양지의 색채는 회복된 것만 같다. 이 같은 주제의식은 이전 작품들과 결이 다르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양지와 음지가 혼탁하게 섞여진 세계를 포착하던 <디파티드>의 경우에는, 영화의 끄트머리에서까지 마들레인이 잉태한 태아의 모호한 친부라는 상징을 바탕으로 양자의 모호한 구분을 강조했었다. 오히려 적나라하게 다뤄진 것은 양 세계의 역전이었다.


*출구

<디파티드>에서 끝끝내 복권되지 못한 빌리의 신분, 죽음으로 끝맺음했을 뿐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콜린의 진실, 디그냄의 범죄자화 등은 음지에 잠식된 어두운 양지의 현실을 드러내는 장치들이었다. 허나 그것조차도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듯, 스콜세지는 본 작품에 이르러 이 같은 양지를 잠식하는 음지에 심판을 가해 그 몰락을 포착한다. 양지를 위풍당당하게 누비는 마피아들이었기에 영화의 느와르적 요소들은 결코 전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미의 죽음 이후에 청각적으로 고조되는 자욱한 침묵과 적막이나, 인물들을 포착할 때 대두되는 롱 숏이나 헤드룸의 비중 등은 오히려 앞선 느와르의 요소들보다 더욱 느와르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이 같은 미장센들의 이유에는 지미의 죽음을 추측한 것처럼 보이는 페기와 프랭키의 단절이나, 12분 30초와 같은 주체적인 의견이 불가능한 프랭키의 상황에 기인할 것이다. 특히나 영화는 저녁식사를 위해 호텔방을 빠져나가는 장면이나 그 이후에 공간을 포착하는 장면 등에서, 텅 빈 방을 이전보다는 비교적 길게 포착하는 일련의 기이함을 자아내는 연출의 호흡이 눈에 띈다. 프랭키의 세계 속에서 많은 비중으로 커진 헤드룸은 이 같은 텅 비어가는 그들의 세계에서도 비롯할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죽음뿐이다. 복역 이후에 백발이 성한 모습으로 출소한 프랭키는 다른 동료들과 비교한다면 여전히 생존해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자신이 묻힐 관을 선택하고 장례절차를 모색하는 등, 그가 골똘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다. 오프닝에서처럼 달리 인으로 끄트머리도 포착되지만 이제는 프랭키의 방으로부터 나오는 달리 인이며, 포착되는 것은 그를 모르는 간호사와 빨갛게 EXIT라고 적혀 슬쩍 열린 문이다. 그 출구는 곧 삶의 출구, 프랭키가 바라보는 것은 상승하는 삶이 아니라 하강하고 빠져나가는 삶이며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다.


*노장의 변주

정리하여 스콜세지의 집대성처럼 보이지만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삶과 같은 요소들이 이전 작들과 큰 차이를 이루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스콜세지의 이전 작들에서 마피아의 세계에 최후까지 몸담았던 이들의 많은 다수가 목숨을 잃었을지언정, 그 음지에서 빠져나왔던 이들은 괜찮은 삶을 영위해나갈 순 있었다. <좋은친구들>에서 밀고자이자 배신자에 다름 아니었던 헨리는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생을 영위할 수 있었고, <카지노>에서 에이스는 갱들이 설치한 화마를 피해나가 생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본 작품에서는 이 같은 조직을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개인의 운명을 포착한다. 결코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듯,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더 이상 조직에서 벗어나 생을 지속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프랭키에게선 결코 회개할 수 없는 페기라는 존재가 청산할 수 없는 빚처럼 남아있다. 회개 이후의 구원도 본 작품에선 도래하지 않는다. 디에이징을 통해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현실에 밀접하게 접근한 영화라 할 수 있는 <아이리시맨>, 어쩌면 그 정신도 그의 작품들 중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조직의 사멸을 제외한다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음지의 세계와 상실된 개인의 삶, 그리고 배신자라는 것 또한 낭만인 듯, 포착하는 것은 오직 죽음뿐인 것은 결코 로망을 가져선 안 될 어두운 현실에 대한 차가운 경고이다. 가능했던 구원조차 이제는 그저 쇠퇴해가는 목숨만 그저 부지한 삶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느와르 장르뿐만 아니라 그가 다룬 장르에서 다룬 요소들도 총망라한 듯한 본 작품에서는 노장의 변화한 사유가 드러나고 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입구는 보이지 않고, 오직 차갑고 비정한 출구만이 존재하는 현실성, 이 같은 변화가 노장이 다루는 다른 장르에 이식되었을 때의 궁금함을 자아내게 만드는 작품이다.




글_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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