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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Jan 17. 2020

판의 미로

잘 표현된 슬픔

https://artlecture.com/article/1297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접하게 되는 비극들은 불행을 겪게 된 사람의 슬픔보다는 위험에 관한 정보의 습득과 관련해서 생각된다.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 얻게 된 정보로 자신의 주변에 내재된 위험을 제거하거나 멀리 떨어져 안도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비극적 사건의 과정과 결과를 마치 주식의 등락폭을 검토하는 것처럼 우리는 비극을 그렇게 소비하고 있다. 오늘날 비극은, 참혹할수록 소비욕을 자극하는 심리적 상품이 된 것이다.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에 관한 슬픈 고백인 비극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며 심리적 상품 이라기보다는 정서적 경험과 공감에 의미를 두었었다. 


비극은 고대와 중세 유럽에서는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고 근세에는 문학과 예술에서 감정의 충만함을 느끼게 하려 했으며 때로는 차가운 이성과 대립하기도 했다. 현대에 이르러서 비극은 사회, 문화, 예술, 정치, 경제에 이르기 폭넓게 상업적으로 심리적 상품으로써 제공되는 것으로 변용되었지만, 예술을 통해서 전해지는 비극은 지금도 인간성의 완성과 회복이라는 기능적 역할을 포기하지 않았다.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심리적 상품인 동시에 예술의 심미적 역할을 하려 한 작품이다. 


그래서 판의 미로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달팽이가 세상을 탐색하듯 눈의 동공은 커지고 시선이 그림 안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듯이 세심하고 직접적인 감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요구한다. 판의 미로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슬픔이라는 정서로 비극을 탐색하고 공감하기를 바라는 영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술이 오랫동안 그렇게 했듯이 영화를 통해서 이성과 감성이 균형을 이룬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성이 감성을 몰아내고 우리 정신을 장악하려 했던, 인간성의 균형을 잃어 빚어진, 비극적 사건인 스페인 내전을 인간으로서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판의 미로는 예술적 영감과 동화적 기능이 결합된 작품이다. 예술적 영감을 준 사람은 두 사람인데, 현대 예술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국의 사상가 존 듀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해내고자 했으며, 근대에서 빠져나와 현대 예술을 재정립하고자 한 존 듀이의 의도로 시각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베이컨의 작품을 그대로 영화에 활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프란시스 베이컨과 존 듀이의 예술에 관한 생각을 영화의 재료를 혼합하고 채색하는 붓과 같은 용도로 사용했다. 영화의 서사 재료로는 성경과 그리스 신화, 이솝 우화와 안데르센 동화를 조합하고 적절히 배치해 흥미를 잃지 않게 했다. 시각 재료로 사용된 것은 스페인을 상징하는 비잔틴 양식과 근대 스페인의 모습 그리고 감독에게 익숙한 마야문명의 문양이다. 그려진 모델은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적 상황의 오필리아라는 한 소녀다. 그래서 이 글은 프란시스 베이컨과 존 듀이 그리고 동화에 관한 것으로 감독의 의도와 표현방식을 말해 보고자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한 세 가지 연구, 구겐하임 미술관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화가들도 인간의 죽음을 뛰어넘어 영혼이라는 환상을 창조해서 구원과 희망을 선사해 주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죽음을 전혀 그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모습에 더해 부패하는 사체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상징하는 붉은 피를 그려 넣어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죽음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커다란 저항에 부딪혔지만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에 신앙적 자극을 준다는 종교계의 결론으로 허락되기도 했다. 중세와 근대에서의 예술이 죽음이라는 것이 신앙심에 어떤 효과를 어떻게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관해서 그려졌다면 프란시스 베이컨은 죽음 자체를 그렸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생물적 한계인 죽음을 소멸 과정으로 보여준 화가다.



베이컨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인간의 내적 기능이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된다. 뼈와 살과 피와 장기로 분해된 육체를 보면 신경망을 통해서 뇌에 연결되어 고통의 느낌을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신성함은 사라졌다.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한 세 가지 연구』와 같이 우상 파괴적인 그림을 베이컨만 그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죽음을 형상화한 베이컨의 그림처럼 자체의 힘을 갖는 그림은 드물다. 죽음은, 인간은, 이런 것이다. 이 강렬함은 이해를 넘어 감각으로 다가온다. 비평가와 미술가들, 그리고 관람객 저마다의 경험적 이야기인 관례적 평가가 쌓인 이해들 중에서 탁월함을 인정받아 선택된 관습적인 대답들인, 비술 비평을 벗겨내고서도 감상할 수 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이 그러하듯 종교화(프레스코화)처럼 삼면화이기도 해서인지 마치 성경의 구절과 비슷한 말로 “나는 죽음이다”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아마도 이 외침을 들으라는 것이 베이컨이 의도일 수도 있다. 



기록이나 누군가의 증언 혹은 화가 나 사진작가의 그림과 사진으로 재현된 것으로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해는 자신과 관련 없는 객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텍스트와 이미지에 불과하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을 관객에게 체험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자료를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 접근이 되어야 했기에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감각적으로 죽음을 보여준 것처럼 비극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으로 그 의도를 알아챌 것이다. 



영화에서 첫 번째 열쇠지기는 두꺼비이고 두 번째 열쇠지기는 달팽이다. 이 두 캐릭터는 교차되는 감각을 의미한다. 두꺼비는 미각과 청각의 교차이며 달팽이는 시각과 촉각의 교차다. 이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활동에 중요한 동기였다. 그래서 감독도 베이컨의 작업처럼 교차되는 감각을 신경에 전달하고 심상에서 간직하던 죽음의 이미지와 접촉하게 한다면, 아주 멀리 동떨어진 사건이었던 스페인의 비극은 내면의 감각적 비극으로 경험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세 번째 열쇠지기는 후각과 숨이라는 생명 현상이 교차되는 인간(오필리아)이다. 그렇게 다섯 가지 감각으로 인간성의 회복과 완성을 통해서 지하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이다. 




존 듀이


베이컨이 종교와 철학이 낳은 인간 중심주의의 비극을 고민했다면 존 듀이는 실제 생활(경험)에서 멀어진 예술이 회복되기를 원했다. 인간성 회복이라는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인데, 베이컨과 듀이의 공통점이라면 인간성이 상실된 세계대전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베이컨이 비극을 감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듀이(1859 – 1952년)는 베이컨(1909-1992년) 보다 앞서 태어났고 비극의 원인이었던 사상적 흐름을 읽어냈다. 그렇다고 듀이가 이성의 편에 서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성이 저지른 비극의 극복에 주목했다. 그의 저서 『경험으로서 예술』에서 이성이 저지른 것을 고발하기보다는 억압당했던 감정의 해방을 주장한다.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통해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존 듀이는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경험 세계인 일상생활에서 이성이 어떻게 예술을 밀어내고 감각을 억압했는지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생활용품과도 같았던 예술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투옥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투옥되었다는 말로 과격하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등장으로 예술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 됐으며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됐다는 점은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예술이 빠져나간 곳에 자리 잡은 것은 이성의 산물인 텍스트였다. 텍스트가 일상으로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예술과 마찬가지로 경험세계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로 아이들에게는 동화이며 어른들에게는 소설이라는 문학을 통해서 텍스트와 친밀감을 쌓으면서 시작됐다. 이 시기의 문학들은 일상생활과 매우 밀접한 사건에서 출발하면서 끝내는 일상에서 멀어진 이상향으로 끝맺는다. (그래서 영화는 이상향을 제시하지 않고 끝맺는다) 예술이 떠난 자리에 문학이 들어서자 각 분야의 책들이 뒤를 이어 벽면을 장식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지성적 인간이라는 보증서(지금의 상장과도 같은)와 같은 역할일 뿐이었다고 말한다. 물론 존 듀이가 예술이 사회의 중심부에서 작동되던 시절에도 비극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당대적 통찰은 일상생활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경험 세계에 다시 예술 작품들이 들어와 지성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맞추기를 호소하고 있다. 예술작품들이 미술관을 벗어나 광장으로 나오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를 일상과 결합하려 한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살인마 잭의 집』과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영화이지만 시각예술로서의 영화라는 지향점이 존 듀이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동화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 하더라도 역사라는 과거 시제로 말해지는 것들은, 책임을 다했거나 책임질 누군가의 부재로 더 이상 물을 수 없는 것들이다. 과거 시제로 말해지는 것들은 최종적으로 공동체가 책임을 나눠지게 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동화는 시제가 어떻든 현재로 이해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책임이 이야기 안에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화가 세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흥밋거리와 재미를 담아내는지가 문제 될 뿐이다. 동화는 아이들에게 읽히는 화법이 관습적이게 된 것일 뿐이지 그 기능을 이해하고 활용 다면 특정 세대에 국한되는 이야기로 활용할 이유가 없다. 





동화는 우주와 자연계와 같은 차원의 크게 말해지는 신화와는 달리 인간 삶에서 시작되는 작게 말해진 전설이나 민담에서 유래한다. 동화가 흥미를 위해서 초월적인 것들을 더했다면 신화는 인간의 소외를 해소하기 위해서 자연계에 딸린 인간을 말한다. 신화는 그래서 자연계의 변형된 것들과의 갈등 극복을 통해서 신적인 인물로 성장한다면, 동화는 인간의 삶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인간으로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동화가 일상생활에서 출발한다는 점이 존 듀이의 인간성 회복이라는 것과 일치하는 지점이며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서사라는 점이 감독이 영화에 동화를 넣은 이유였을 것이다. 





잘 표현된 슬픔


슬픔을 보여주는 가장 흔한 방법은 불행한 사건을 겪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판의 미로는 정반대로 고통을 경험하는 장면을 최소화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슬픔을 지속적으로 보여줘 감정의 폭발점에 도달하게 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슬픔은, 눈물로 고통의 감각과 슬픔의 감정을 지워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방식의 영화들이 감정을 폭발시켜 눈물로 슬픔을 해소시켜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는 심리적 상품에 가깝다면 판의 미로는 예술이 오랫동안 해왔던 역할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이다. 예술이 누군가에게 이해시키려 창작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경험을 관객이 다시 경험하게 하는 것 같이 영화도 비극적 사건을 경험하게 한다. 즉 예술을 창작하고 경험하는 과정과 비슷하게 영화를 감상하게 한다. 


감독은 스페인 내전이라는 비극을 한 소녀의 이야기로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시각 형식과 서사 방식은, 베이컨의 의도처럼 정서에 곧장 도달할 수 있어야 하며, 존 듀이의 생각처럼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사건이어야 한다. 두 의도를 현재의 정서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동화라는 판타지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넓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영화의 느낌은 심미적 감흥의 여부로 좁혀져 말해질 수 있다. 누구에게는 촉촉한 마음으로 다른 누구에게는 건조한 사고로. 혹은 영화가 감상자에게 원하는, 둘 모두로.


영화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지하세계로 향하는 입구의 비석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새겨져 있다. 이성이 감각을 억압했던 시대를 표현한 것일 수도 있으며, 이성이 저지른 폭력에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다지 알 필요 없는 것들이다. 감독이 표현해야 할 대상이나 내용을 오랜 시간 세심하고 깊이 고민했다는 흔적을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것보다는 판의 미로가 고증에 충실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영화들은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서 고증을 소홀히 하기도 한다. 고증은 옛 모습을 똑같이 재현하는 기능적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심리적 효과에 있다. 판의 미로와 같이 시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의미와 가치를 현재의 경험에 공감시켜 슬픔의 정서로 발현시키려는 영화에서의 고증은 한층 더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한다. 고증한 것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고 그 의문의 이유도 타당하다. 현재와 다름없거나 익숙한 근대가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의 미로는 관객의 부주의함에 기대지 않았다. 고증이 잘못되어 영화에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고증은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의도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의상과 가구, 식기들은 당대 스페인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판의 미로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슬픔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 표현 방식은 존 듀이의 사상과 프란시스 베이컨의 의도와 동화의 기능적 특질을 이용해서, 일상생활에서 감각적으로 발견되는 불행으로 느끼게 해서 곧바로 정서에 도달하게 하고, 동화처럼 현재로 끌어와 관객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도 비극을 외면하지 않게 우리의 정서에 호소한다. 이 점이 다른 비극 영화와의 차이점이다. 


한 시대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관객의 시선을 잡아두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비극적인 사건에 상상과 증언을 더해 서사의 크기와 세밀함을 조율해서 흥미를 끌어내려했다. 판의 미로는 흥미보다는 상상을 더해 구체적인 사건은 관객의 지성과 감정에 맡기고 한 소녀의 마음의 상태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짧은 삶을 살다 간 한 소녀의 비극을 목격하고 인간으로서 알아야 할 슬픔을 예술 작품처럼 기억하게 한다.   


PS-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이 봐도 되는 영화인가요?”라는 질문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매우 예민하다. 아이들이 어른들처럼 무디다면 보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다. 판 PAN은 공포와 불안의 의미인 패닉 PANIC의 어원이 되었으며 판의 미로는 아이들에게 넘치게도 그것을 제공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아트렉처 에디터_꼭그래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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