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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Feb 05. 2020

한국의 보물 '차(茶)문화

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의 한국문화 찾기

https://artlecture.com/article/1390


차(茶)문화의 시작은 고대 중국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당나라로 와서 음다(飮茶) 풍습으로 널리 대중화되었다.

유럽에서의 차의 역사는 17세기 초에 시작한다. 네덜란드인들이 동아시아 항로를 따라 무역기지를 세우면서부터다. 그들은 중국, 일본과의 무역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와 만났다. 기존에 향신료와 도자기가 주축을 이루다 교역품에 차를 추가한 것이다. 이들이 수입한 차는 처음엔 주로 의료용으로 쓰였다. 그러다 점차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한 사교모임으로 확산하였다. 


당시의 네덜란드 상류 사회의 차문화는 ‘니콜라스 마위스’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그림 속 가운데 벽면은 최고 상류층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청화백자로 장식이 되어 있다. 왼쪽으로 새롭게 유럽에 알려진 일본 도자기가 놓여 있다. 테이블 앞의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아시아의 자기문화와 차문화에 대한 그들의 동경을 엿볼 수 있다. 



니콜라스 마위스의 '티타임'



이들의 차에 대한 사랑은 몽테스키외의 『네덜란드 기행』에서도 드러나 있다. 그가 만난 한 상류층 인사가 서른 잔의 차를 마시는 모습에 놀랐던 경험을 이 책에 기록했다. 


차가 유럽에서 고급 음료로 자리 잡은 것은 영국의 찰스 2세 때 왕실에서 티파티를 열면서부터다. 영국에서 차는 엄청나게 귀한 사치품이었다. 그러다 보니 차의 소비도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파티에 초대된다는 것은 왕실과 깊은 유대를 얘기해주기도 했다. 


이때부터 차는 상류 문화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티타임’이란 표현도 영국의 차문화에서 나온 것이다. ‘티타임’은 과거 영국의 식습관에서 나왔다. 원래 이들은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끼만 먹었다. 그러다 중간에 너무 허기져서 차와 함께 빵, 스콘 등을 먹기 시작했다. 이것이 티타임의 유래다. 영국에서 새로운 문화가 된 차는 이후 개척기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후 미국이 대량으로 차를 수입하면서 ‘차 칙령’이 발표되기도 했다. 이 칙령이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켰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차문화


오늘날 중국에서 시작한 차는 이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정신문화와 결합해 특색 있게 발전했다. 차는 사람과의 교류를 위한 필수품이 되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새로 만들었다. 한국 또한 한국의 정서와 어우러진 차문화가 삼국시대 이후로 꾸준히 존재해왔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를 보면 한국의 차문화와 정신이 어떻게 어울렸는지를 읽을 수 있다.

그림 속 풍경은 고요히 달빛이 비치는 밤, 거문고를 타는 노인과 그 옆에서 차를 끓이는 시중드는 아이가 등장한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노인은 욕심 없이 청빈하게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과 함께하고 있다. 시중드는 아이는 오른쪽 아래에서 찻물을 끓이고 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듯 초목은 약간 몸을 눕히고 있다. 그림 속의 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면 거문고 소리가 그 바람을 타고 들릴 듯하다. 



이경윤의 <월하탄금도(月下彈琴圖)>



<월하탄금도>는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는 선비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 세상의 시름으로부터 떠난 삶을 누리는 문인들의 곁에는 언제나 차가 함께 있었다. 차는 이들의 이상적 정신의 음료이며, 세상 만물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그런데 이런 차문화가 언제부턴가 사라져갔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한반도로 건너와 차문화가 없음에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과 달리 차를 마시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는 그의 〈잡기설〉에서 한반도에 차문화 자체가 없었다고 단정했다. 이는 우리가 다완(茶碗)이라고 부르는 찻사발을 막사발로 부르게 된 단초가 되었다. 선비들의 차문화를 몰랐던 야나기로서는 당연했다. 다만 한국은 이를 사소하게 여기고 버려온 것이고, 일본은 반대로 키우고 자신들의 상징으로 키워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조선의 지배 사상의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고려의 불교는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힘을 잃어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찰이 사라졌다, 사찰의 토지는 몰수되었고, 승려는 신분마저 천민으로 추락해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이후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모든 영향력을 상실했다. 자연스럽게 이들이 주도하던 차문화도 그 토대를 잃었다. 


반면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들어온 차문화를 무사 정신의 한 부분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 도자 기술마저 자신들의 문화로 만들었다. 오늘날 서양 사회에서 일본을 표현하면서 ‘젠(禪)’의 나라라고 하는 것도 이후 만들어진 이미지다. 

서양에서 일본의 선(禪)문화의 세계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사례가 루마니아 출신인 ‘첼리비다케’이다. 그는 음악계에서 폰 카라얀과 함께 거장으로 인정받는 사람이다. 


그는 음반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지휘자다. 사람들은 그를 은둔 고수로 불렀는데 이는 일본 선문화의 영향이 컸다. 그의 두어 장밖에 없는 레코드 재킷에는 일본을 방문해서 산사에서 노승과 차를 마시는 사진이 들어가기도 했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일본 정원을 산책하며 일본의 문화를 즐겼다. 그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일본의 선문화를 찾았다. 



첼리비다케



지금도 서양에 일본의 정신세계를 호감으로 이끈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음악과 영감에 대해 일본의 다도와 연결해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의 다도가 세계정신 속으로 스며든 사례는 너무도 많다. 그리고 다도가 스며들어 가는 자리엔 일본의 정신도 들어간다.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고,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뜻이다.

일본 발음으로 일기일회는 ‘이찌고 이찌에’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도(茶道)를 이 네 글자로 설명한다. 그들이 다회(茶會)에 임할 때는 일기일회의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한다. 그 다회가 ‘일생에 한 번 뿐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는 의미다. 이는 16세기 말, 일본의 다도가 완성되던 시기부터 내려오던 말이다. 이 말은 차를 준비하는 사람이나 차를 음미하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차(茶)가 뭐 대단한 것이라고 이렇게까지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는 한국 역사에서 상실과 몰락을 상징하는 특별한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이 천하게 여겼던 도자공예를 일본은 장인으로 키웠고, 유럽으로 이를 수출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 부가 일본을 ‘메이지유신’을 거쳐 근대사회로 이어졌다. 또한, 다도와 함께 유럽으로 건너간 ‘자포니즘(japonism)’은 일본의 위상을 더욱 키웠다. 그리고 이는 조선에 대한 강점으로 연결되었다. 두 나라의 운명이 차에 의해 갈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차문화의 상실은 문화인류학의 입장에서 민족적 손실이다. 한국은 스스로 천하다 여긴 것들이 보물이었음을 알지 못했다. 반면에 일본이 차에서 본 것은 시·서·화·악·예와 공예 등 종합 예술이 함께하는 문화였다. 차문화의 발전이 자연히 그들 문화 전반의 발전을 이끌었던 그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선비들의 차문화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차문화는 이대로 사라진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한국의 문화적 정서에서 차문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 사회에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있다.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이라는 뜻으로, 보통 있는 ‘예사로운 일’을 이르는 말이다. 일상다반사, 항다반사(恒茶飯事)도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흔하다’라는 표현으로 이 말을 쓸 정도로 차를 마시는 것이 서민들에게도 보편적이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불교문화가 쇠퇴함에 따라 차 문화도 힘을 잃었지만, 다산이나 추사 등 고고한 선비들의 사랑을 받으며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이재관의 <오수도(午睡圖)>를 보면 선비들이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 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세속을 떠난 한 선비가 낮잠을 즐기고 있는 어느 날의 풍경을 포착한 것이다. 선비가 책을 베고 있는 모습에 책을 읽다 잠이 든 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이재관의 <오수도(午睡圖)>



선비가 누운 초옥 옆에서 한 아이가 질화로에 다관을 올리고 차를 달이고 있다. 두 마리의 학과 눈을 마주치며 차를 달이는 아이의 모습이 평화롭다. 고고한 인품을 지닌 선비의 상징 학이 그림 속 선비의 삶을 대하는 모습을 말해준다. 


이러한 평화로운 모습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초원시명(蕉園試茗)>이란 작품에서 ‘초원시명’은 ‘파초나무 정원에서 차를 맛본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파초의 아래쪽에는 나무판을 돌로 괴어 만든 서탁이 있고 선비들의 필수품들이 놓여 있다. 서탁의 주인인 선비는 어디론가 가고 없고 사슴만이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들어와 있다. 서탁 옆으로 아이가 쪼그려 앉아 차를 달이고 있다. 곧 돌아올 주인을 위해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김홍도의 <초원시명(蕉園試茗)>




김홍도의 <취후간화(醉後看花)>에서도 차를 즐기던 옛 선비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방안의 두 선비가 책상 하나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늙은 매화나무 아래에서는 선비를 위해 찻물을 준비하는 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 앞의 바위에는 소철이 있다. 김홍도가 〈취후간화’(醉後看花)〉 속에 펼쳐놓은 풍경이다.

선비들에게 차는 자연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차를 마신다는 것은 자연의 일부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행위였다. 김홍도는 바로 이러한 차문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김홍도의 <취후간화(醉後看花)>




이인문의 <선동전다도(仙童煎茶圖)>에서는 어린 선동이 주인공이다. 선동이 차를 끓이는 동안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소나무는 그늘을 만들고 사슴은 선동의 벗이 되어주고 있다. 차의 치유와 장생의 효험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인문의 <선동전다도(仙童煎茶圖)>



한국에서의 차는 선비의 고고한 정신 수양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탐욕에 찌든 속세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는 친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선비들이 차를 대하는 태도는 선계의 물건을 대하듯 소중히 했다. 이를 ‘예(禮)’라고 여겼다. 

차에 대한 예,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존재해 왔다. 

바로 사람과 신에게 차를 달여 바치던 예의범절이 그것이다. 조상을 모신 사당에 차를 우려 올리던 제사의 ‘예’와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예’, 이 모두가 차에 대한 ‘예’였다. 


선비들은 차를 마시며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하며 그 절차 또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그 ‘예’ 속에 군자가 되는 길이 있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 명절 제사를 이르는 ‘차례’다. 차를 올릴 때의 마음가짐이야말로 조상에 대한 최고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가는 길에 가장 소중한 것은 경제 규모 몇 위가 아니고, 인구수도 아니다. 한국의 정신이 살아 있는 문화다.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내적인 흔들림이 없음을 말한다.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자연을 존중하는 자세를 말한다. 또한, 세계 속에서 이러한 문화를 알리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풍요롭게 하는 일이다. 

찻잔 속에 담긴 한국의 혼을 다시 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




글.고산&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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