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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렉처 ARTLECTURE Feb 10. 2020

모네에서 세잔까지: 인상파 걸작展 (1)

모더니즘의 시작_모네에서 세잔까지: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인상파展

https://artlecture.com/article/1403


*인상주의의 탄생 배경과 그 시작

인상주의, 그 작품들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 사조는 결코 혁신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 인상주의는 그들의 선대 사조인 낭만주의자들의 필치, 또한 낭만주의자들이 주로 계승한 루벤스적인 화풍의 계승인 것처럼 보인다. 허나 우리는 작품을 향해 멀어있었던 그 먼 시선을 찬찬히 근접해가보자. 낭만주의 및 루벤스 풍의 바로크도 선보다 색이 강조된 화풍 아래서 온당 근접한다면 그들이 추구하였던 재현은 무너지고야 만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그들보다 비교적 먼 거리에서 그 환상이 무너지며, 또한 그들의 필치는 앞선 선대들이 지향하던 견고한 재현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인상주의자들의 혁신은 이 같은 근접한 거리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보다’라는 지각의 본질에 근접하려는 시도를 선보인다. 우리는 본다는 것에 환상이 있다. 어떻게든 우리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대상을 둘러싼 환경과 날씨의 변화에 따라, 그 대상의 시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한 대상을 어떤 구도에서 보는 것이 과연 옳단 말인가. 앞, 뒤, 측면? 또한 그것을 과연 상정할 수 있을까? 상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어떤 보편자의 시선에서 규정되는가. 우리는 키와 같은 신체적 차이에 따라서, 또한 시력에 따라서 시각이 주관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말이다. 인상주의 작품들을 마주한 근접한 거리와 더불어 주목해야 하는 것이 빛과 시간에 의한 객관적인 시각의 부재, 그리고 우리의 주관적인 시각이다. 또한 구도는 고사하더라도 이 같은 인간의 주관성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대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하는 역할은 당대에 태동한 사진이 이어받았다. 사진은 회화에서의 오랜 논쟁인 이성적인 선과 주관적인 색의 논쟁, 그 조화를 너무도 빠르게 종식시켰고, 재현의 역할이 약화된 회화는 다른 역할과 본령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모색은 더욱 더 근거리에서 무너지는 환영, 시각은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의 환기였고, 객관에 근접하려는 시도는 카메라가 앗아갔다. 인상주의는 이 같은 풍조의 이해를 요구한다. 이 같은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전시를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의 협업을 행한 한가람미술관에서 펼쳐진다. 앞서 언급했듯 당대에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은 대상 그 자체의 객관적이고 견고한 믿음이 무너지고, 빛에 의해 시시각각 변하는 대상의 형체와, 불완전한 눈을 가지고 있는 주관적인 시각이 새롭게 부상하였다. 후자의 경우에는 당대에 태동한 사진이라는 매체와 가장 단적인 대비이기도 하였다. 사진이 대상의 시각에 객관적인 접근이 가능했다면, 인간의 시각과 그것을 옮겨놓는 미술은 선과 색의 논쟁에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인상주의자들은 그 시각이 주관적이긴 했지만, 이에 감정이 투영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순수한 시각 이외의 어떠한 요소도 섞이지 않는, 오직 그것을 시각적으로 조망하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인간이 아닌 기계로서 사진가의 태도로 작업에 임하였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주관적인 색채를 옮겨 담기 위해 자연스레 견고한 선의 강조보다는, 짧은 붓 터치와 색의 강조가 두드러졌다. 또한 생생한 변화의 순간 자체를 화폭에 옮겨 담기 위한 야외작업이 하나의 강령과도 같았으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석튜브의 매체성 자체가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재현을 불가능하게 만든 일련의 한계이자 새로운 시대의 표현법과도 같았다. 이러한 인상주의의 시작은 1859년부터 모네, 르누아르, 시슬리, 피사로등의 교류로부터 그 맹아가 맺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1874년 살롱전에서 낙선하자 자신들이 낙선전을 개최한 이후에 인상주의라는 사조는 태동하였다. 이후 1886년까지 6회의 전시를 마친 이후에 인상주의라는 그룹 자체는 와해되었고, 그 영향은 20세기 중반까지를 주름잡았던 모더니즘 전체로 확장된다.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 <아브레이 마을>, 1855~56




*영향관계바르비종파

허나 인상주의자들은 결코 어느 순간 독립적으로 생겨난 화파가 아니다. 그들의 야외작업과 풍경에 대한 관심은 낭만주의자인 컨스터블과, 빛에 대한 관심은 마찬가지 낭만주의자인 터너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리고 야외작업과 세상을 바라보는 차가운 태도에 있어서는 사실주의, 특히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1800년대에 이르러 바르비종의 퐁테블로는 관광지로 빠르게 급부상했고, 특히나 도회적인 관광지가 아니라, 속세를 잠시 잊을 수 있는 날 것 자체로의 자연을 관조하는 관광지였다. 도시에서 마주하지 못한 살아 숨 쉬는 동식물들과, 노동 및 수렵과 같은 근원적 노동이 잔존하는 공간, 시간, 기후에 의해 즉각적으로 변화하는 그 풍경은 화가들에게도 큰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 본 전시에서는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와 샤르 프랑수아 도비니가 소개되며, 이들의 특징으로는 이전 시대의 이상적인 요소만 취합하던 풍경화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자연을 야외에서 고스란히 옮겨내고자 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카미유 코로의 <아브레이 마을>부터 살펴보자. 당대 발명된 주석튜브를 이용한 야외 작업 속에서 견고한 재현이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작업방식과 매체성으로 인해 뭉뚱그려진 색채가 강조되고, 향후 인상주의에서 온당 붕괴되어버릴 형태감이 예고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과 기후에 의해 변화하는 시각과도 관련된다. 이상적인 고전 풍경화 속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정한 공간, 시간은 바르비종파에 의해 부활된다. 한편 인상주의자들의 색채 그 자체의 강조에 비한다면, 본 작품에서도 비춰지듯 바르비종파들의 작품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형태가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그 형태 간의 경계는 명확하고 견고한 선이 아닌, 불분명하고 일렁이는 색에 의해 구획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것은 도비니의 <강가의 농장>에서도 비춰진다. 향후 더 자세히 비교하겠지만 그가 강물에 비친 집과 인물, 풍경을 묘사하는 태도를 보면, 이를 비교적 견고하게 묘사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진다. 허나 인상주의자들은 물에 의해 더욱 형태가 해체되고, 오색천연의 무수한 색채로 분화되는 그 반짝임을 포착하려 하지 않았던가.




*영향관계우끼요에

이 같은 바르비종파 이후에 태동한 인상주의자들에게는 일본의 채색판화이자 풍속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이 지대하다. 우키요에를 이해하기에 가장 친숙한 예시는 화투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구도와 색채, 그리고 간략화된 형태감을 가장 단적으로 볼 수 있는 비광을 예시로 들어보자. 우선 버드나무와 강을 통해 구획되는 구도를 살펴보자. 버드나무는 왼편 사선으로, 강물은 왼편과 오른편 사선으로 뻗어나가며 공간에 과감한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같은 형체에 색채는 대단히 단순화되어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공산품만으로서 화투패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화투패의 화풍이 비롯된 우끼요에는 당대 일본의 서민층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채색 판화였기 때문에, 색채는 단순하였고 직관적이었으며, 대담한 색채대비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그 색채가 채워지는 형체들은 대단히 간략화 되어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가장 기본적인 우끼요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심층적으로 살펴보자면 풍경을 주로 그렸던 안도 히로시게나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우끼요에들을 살펴본다면, 자연의 역동성을 온당 담아내지만, 한편으로 패턴화되고 간략화되는 우끼요에의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인물화로 유명했던 기타가와 우타마로나 도쿠사이 샤라쿠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과장되고 희화화된 인물들의 표정과 때로는 성에 대한 대담한 묘사도 도드라진다. 이 같은 우끼요에는 일본에서 서구로 수출되던 도자기의 완충제로 구겨져서 함께 동봉되고 발송되었는데, 그 종이들을 펴본 유럽인들, 특히 화가들은 긍정적인 방향의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관계는 인상주의자들 및 그 이후의 사조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나 모네, 고갱, 고흐 등이 대단히 예찬하였다. 그에게 우키요에는 인물에 대한 캐리커쳐의 가능성과 간략화, 그리고 색채의 주관성, 해방을 이끄는 혁신의 영감이었다.



폴 세뤼지에, <풍경>, 제작연도미상



본 전시에서 가장 먼저 우끼요에의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레세르 우리의 <풍경>일 것이다. 황혼 무렵을 그린 듯한 본 풍광은 대지와 강, 숲과 하늘이 구획되고 있고, 이 같은 구성 에 높다란 나무를 그려내고, 이를 작품의 중앙을 사선으로 시원하게 가로지르게 만든다. 이 같은 구성을 통해 작품에 역동적이고도 극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우끼요에의 영향이란 바로 이 구도라 할 수 있다. 분명 사선구도는 바로크 이후에 줄곧 시도되고 있던 것이나, 이처럼 작품을 사선으로 과감히 가로질러 공간 자체를 구획 및 분리하는 구도는 당대의 서구 화가들에게 명백한 우끼요에의 영향이었다. 또한 본 작품에서 세세한 디테일의 묘사는 떨어진다. 작품의 색조로 인해 황혼 무렵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지만, 사실 본 작품의 색채는 매우 단순하다. 세세한 디테일의 간략화, 하양과 검정 내지는 갈색의 단순한 색조로 축약된 대담한 색채구성, 그것이 우끼요에가 인상주의자들에게 미친 형식적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우끼요에의 영향은 후기인상주의로까지 이어진다. 후기인상주의로부터 나비파로 분류되어 비로소 온당 제 위치를 평가받은 폴 세뤼지에 역시 우끼요에의 열렬한 찬미자였다. 그의 작품 <풍경>을 살펴보자. 우끼요에의 인상주의 및 그 이후의 영향 중 하나는 축약을 통한 패턴화였다. 본 작품에서 높게 솟아오르는 나무의 형태는 단순화되어 반복되는 패턴의 형태를 보이고, 그것이 뿌리내린 밭은 그저 하나의 넓은 면으로 환원되어 있다. 폴 세뤼지에와 향후 소개할 고갱은 이 같은 우끼요에의 대담한 패턴화와 색면의 사용을 클루아조니즘이라는 화풍으로 발전시킨다. 본 사조는 대담한 축약을 통한 두꺼운 윤곽선과 색면의 강조, 인물에 대한 미니멀한 단순화가 도드라지며, 인상주의가 주목한 우끼요에의 속성과는 또 다른 관심을 보여준다.



(좌) 레세르 우리, <포츠담 광장의 밤> / (우)  <베를린의 겨울날>, 1920년대 중반




*특징플라뇌르

또한 우리가 인상주의자들에게 기대하는 풍경, 그것 중 하나는 플라뇌르에서 비롯된 풍광이라 할 수 이다. 플라뇌르는 19세기 말 대도시에 거주하는 부르주아지 남성의 시선으로서, 이들이 산책을 하는 이유는 특정한 목적을 띠지 않는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때때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그것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산책을 나가곤하지 않던가. 이러한 시선에서 타인을 바라봄을 상상해보자, 산책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처럼 타인들에게도 어떤 의미, 관심을 두지 않지 않을 것이다. 그저 흘러가는 풍경의 일부이자, 다시 마주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는 그저 지나가는 인물일 뿐이다. 우리는 다시 레세르 우리의 작품을 살펴보고자 한다. 바로 <포츠담 광장의 밤>과 <베를린의 겨울날>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 간의 대화, 시선의 마주침을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길을 걸어가고, 인파 사이를 유유히 무미건조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차가운 풍경, 공간 자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생명 없는 오브제처럼 환원되어버린 그들의 초상들뿐이다. 배경은 인물들을 강조하기 위한 구성으로 사용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인물들이 차가운 배경 속에 익명적으로 녹아든다. 이 같은 플라뇌르는 당대 부르주아지의 취향을, 또한 태동한 개인주의를 드러낸다. 또한 이 풍경을 그려낸 화가들 또한 노동을 숭고하게 담아낸 쿠르베나 밀레, 타인들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가득 찬 고흐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거리를 거닐고 있는 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부르주아지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본 작품에서 풍경 자체의 구성에 관심을 갖지, 그 내부의 특정 피사체나 대상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편 그것은 시각적으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인상주의의 강령과도 연결된다. 그들은 인간의 시선이 아니라, 그저 시각만을 흡수, 촬영하는 사진기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좌) 외젠 부댕, 조수, <바다의 일몰>, 제작연도미상 / (우) 차일드 하삼, <여름 햇빛(숄스 섬)>, 1892



 

*외젠 부댕알프레드 시슬레

인상주의의 주요한 기수들을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이전 사조와 인상주의 사이에 위치하는 화가, 그리고 사조 간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화가 각각을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바로 외젠 부댕과 알프레드 시슬레다. 1824년 태생한 부댕은 마네와 더불어 인상주의자들의 정신적 지주로 여겨진다. 바르비종파와 동세대에 속하지만 바다에서 태어난 그는 줄곧 해양을 야외작업을 통해 화폭 속에 옮겨놓으며, 인상주의의 탄생을 예고했다. 인상주의자들이 선호한 풍경은 바로 강이었다. 수면에 비춰져 산란되고 반사되는 무수한 빛의 변천은 퐁텐블로 숲이 갖는 가능성보다 더욱 무한하였다. 부댕의 작품들은 수면을 바라보며 객관적인 시각의 믿음이 흔들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그의 <조수, 바다의 일몰>을 살펴보면, 하늘과 바다의 색조는 결코 단일하지 않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그 경계가 맞물리는 역동적인 일몰이라는 시간의 풍경은 대단히 다채로운 색조를 갖는다. 그 변화는 단순히 색채에만 상응하지 않는다. 시간이 변화하는 그 흐름은 대단히 빠르게 휘날리는 필치로도 드러난다. 인상주의자들이 화폭 속에 옮겨내고자 하는 것은 빛의 산란에 의한 무수한 색채와 시간에 의한 유동성이었다. 또한 부댕은 노동의 순간을 예찬하고 있는가? 밀레나 쿠르베의 인간에 대한 존엄과는 거리가 멀다. 행위가 강조되지 않는 인간은 그저 풍경의 일부로서, 하나의 시각으로 우리에게 전달될 뿐이다. 정치성이나 주관성을 띤 피사로나 르누아르를 제외한다면, 그들에게선 비정치성이 도드라진다. 때때로 있는 그대로의 시각이 아니라 이상적이라 느껴지는 풍경, 어떤 정치성이 포착되기도 하지만, 인상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차일드 하삼의 <여름 햇빛(숄스 섬)>과 같은 작품들은 마치 매너리즘(후기르네상스 내지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이행단계에 놓이는 사조)에서 얼어붙은 이상성을 구현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허나 당대에 유럽은 타 대륙을 착취함으로써 벨에포크 시대를 이룩했고, 미국 또한 대단히 풍요로웠다.



알프레드 시슬레, <생 마메스의 루앙 강에 있는 바지선>, 1884



오히려 우리는 그 소재가 아니라, 그것을 유실되어버릴 것 같이 그려내는 그 인상주의자들의 필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재빠른 필치로 대상을 화폭 속에 담아내는 그들의 화풍은 영원불변할 것만 같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끝나버릴 것만 같은 아스라한 향수를 풍긴다. 그들은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그 시간이 지나가고 변화할 것이라는 것에는 동일했으며, 그것은 곧 유동적인 화풍으로서 표명된다. 그리고 1839년 영국 국적의 알프레드 시슬레다. 그는 영국인이지만 당대의 변화무쌍하게 변화하는 파리의 미술계에 매료되고, 특히나 인상주의의 선구자들과의 교류는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이에 일생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며, 그 풍광들을 화폭 속에 옮겨내었다. 바르비종파의 풍경에서는 주석튜브의 발생으로 인한 불완전한 형태감이 도드라지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객관적이고 견고한 편이었다. 특히나 물에 비춰지는 숲의 풍경에서 다채롭게 변이하는 인상주의자 특유의 색채가 강조되지 않는다. 수면에 비친 지상의 풍경은 그들에게서 대체로 견고하게 그려진다. 허나 시슬레의 <생 마메스의 루앙 강에 있는 바지선>에서 특히 강에 비친 마을의 풍경을 살펴보자. 비교적 원본이라 할 수 있는 건물은 색채가 단일하며 형태도 탄탄하다. 허나 수면에 비춰진 그 풍경은 어떠한가. 형태는 흐려지고 일렁이기 시작하며, 단일한 색채는 짧은 붓 터치, 색점들로 환원된다. 그 사이에는 간극이 벌어져 다른 색채들이 침범하고, 빛에 의해 시각이 대단히 주관적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 같은 풍경들에 집중한 시슬레는 일생의 대부분을 야외작업에 몰두하였는데 이는 다른 인상주의자들의 일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 1907




*클로드 모네

이제 개개의 작가를 살펴보자. 가장 먼저 인상주의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해돋이-인상>을 그린 사조 내의 가장 대표적인 선각자인 클로드 모네다. 1840년 태생한 모네는 다양한 화가의 영향을 체화한다. 쿠르베의 현실주의적인 태도, 외젠 부댕의 야외작업, 들라클루아의 색채의 강조 등은 모네에게 큰 지양분이 된다. 그는 1859년 르누아르와 시슬리, 피사로 등과 교류한다. 그는 쿠르베 및 터너의 영향 하에서 르누아르와 함께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며, 물에 빛이 반사되어 절대적이지 않고 유동적이고 찰나적인 빛과 색의 변화를 자각하게 된다. 특히 이들과 함께 퐁텐블로 숲에서 풍경화를 그린 것은 그의 화풍에 있어 가장 큰 영향 중 하나였다. 그 숲에서 야외작업을 하던 퐁텐블로파가 인상주의의 선조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는 퐁텐블로 숲에서 작업하며 물에 빛이 반사되어 시각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빛이 유동적이고 찰나적으로 시시각각 색의 변화를 가능케 한다는 사실에 눈뜨게 된다. 그래서 견고한 형태와 색의 조화보다도, 프리즘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색채, 특히나 강렬한 보색대비를 통해 대상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시각적 가능성을 옮겨 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전시대에는 색이란 선으로 구축된 형태를 채워 넣는 부수적인 수단에 다름 아니었다면, 모네의 인상주의에 이르러서는 대상을 변화하지 않는 선으로 구축한 형태야 말로 부수적인 것으로서 등한시 되고, 색채 그 자체가 강조되었다. 또한 모네를 위시한 인상주의자들의 야외작업은 단순히 스케치 부분에서만 끝나지 않고, 채색에서까지 모든 것을 야외에서 마무리한다. 이렇듯 모네는 야외에 나가서 실제로 관찰하고, 변화하는 빛, 날씨를 감각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모네가 화폭 속에 옮겨 담고자 하는 것도 그러한 변화 그 자체였다.



클로드 모네, <아발의 절벽, 에트레타>, 1885



가장 먼저 그의 작품 <수련 연못>이 소개된다. 본 작품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수면에 비친 풍경이라는 점, 그의 말년시대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연작이라는 점이다. 인상주의라는 사조의 이름을 태동케 한 <해돋이-인상>처럼 그는 액체의 풍경을 화폭 속에 옮겨놓기를 선호하였다. 액체에 의한 대상의 시각은 결코 단일하지 않고, 빛에 의해 그 색과 형태가 무수히 변화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본 작품도 견고한 형태라기 보단, 빛과 물에 의한 하나의 뉘앙스, 특히나 수면과 수련만을 포착한 본 작품에서 전통적인 전경, 후경의 구성이 상실된 유동적인 풍경이다. 우끼요에의 영향에서 느껴지는 대담한 구성임과 더불어, 공간을 명쾌히 분리할 수 없는 액체의 특성과도 결부된다. 이러한 본 극은 연작인데, 모네는 연작을 선호하였다. 그가 연작을 선호한 이유는 대상의 어떤 본질, 객관적 형상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 기후, 환경에 의해 줄곧 변화하여 규정될 수 없는 시각의 유동성, 주관성과 관련되었다. 또한 그 시각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의 육체에 매개되었을 때만 존재하는 ‘현상’이다. 모네는 말년에 시각이 크게 악화되었다. 말년의 그가 바라본 수련 연못은 독립적인 대상 그것 자체의 시각이나, 보편적인 시력을 가진 인류의 시각과는 다른 유형의 것이다. 이 시각에 감정이 투영되지는 않았을지언정, 결국 육체, 우리, 화가에게 전달되는 시각의 주관성을 그는 환기한다. 그리고 <아발의 절벽, 에트레타>의 경우에는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회화 내부의 표현이 아닌, 회화 외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두터운 마티에르와 재빠른 필치로 표현한 점에 주목할 법 하다. 또한 바다가 갖는 무수한 색조, 마찬가지로 바위의 형태와 그 견고함은 무수한 색조의 조합으로서 형성되며, 색채만으로 이뤄진 그 형태감 속에서 양자의 경계는 온당 뚜렷한 편이 아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레스트링게의 초상화>, 1878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다음으로 르누아르다. 그는 1814년 재봉업에 종사하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다. 앞서 모네에서 언급했다시피, 그와 함께 퐁텐블로 숲에서 야외작업을 하던 경험이 인상주의자가 된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그는 모네가 1859년부터 교류한 시슬리, 피사로 등과 함께 최초의 인상주의자들 중 한 명이 되었다. 한편 그는 이후에 언급될 드가와 정반대의 인상주의자라 할 수 있다. 드가가 인상주의자가 아님에도 인상주의적인 화풍을 보인다면,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임에도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얕은, 또한 후기에는 아카데미즘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된 관심은 로코코적이라 할 수 있다. 부르주아지들의 안락하고도 평온한 오후와 일상, 유희를 담아내는 시선이 도드라진다. 한편 로코코적인 달콤함 속에서도 그는 분명 인상주의자의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고전주의가 화폭 속에 보다 이상적으로 혹은 작위적으로 구축해낸 것이라면, 그는 인상주의자로서 현실에서 즉흥적이고 찰나적으로 마주한 행복을 생생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허나 1881년 알제리 여행과, 특히 1882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1884년에 인상주의와 결별하여 고전주의로 향하게 된다. 이후 고전적인 여인들과 기쁨의 순간들에 더욱 집중하였고, 이 시기에 이상적인 육체와 양감이 부활했다. 애초에 인상주의 시기에도 르누아르만의 주관적인 감성은 인상주의의 객관성과는 거리가 멀곤 했다. 이렇듯 인상주의자와 고전주의자의 사이를 보여주는 르누아르이지만, 1910년대 말기시기에는 다시금 인상주의로 회귀하였고, 당대에 거동의 불편함과 시각문제를 겪던 그에게서 주관적인 시각이라는 인상주의자로서의 태도를 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랑 부인의 초상화>, 1880년대 후반



르누아르의 화풍은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거칠고 빠르다. 허나 그것은 비교적 배경을 묘사하는데서만 그친다. 인상주의자들에게서 부드러움이나 온화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일반적인 인상주의 작품들은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며 대단히 찰나적이다. 또한 색채는 얼마나 다채로운가. 허나 르누아르는 색채에 대한 일련의 고집이 있었고, 화풍과 인물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다. 그는 노랑을 선호하였다. 그것은 칸딘스키가 말하는 바깥으로 분출되는 법밖에 모르는 광기어린 노랑이 아니다. 르누아르의 노랑은 황금빛에 가깝고 진중하며 고귀한 느낌을 준다. <레스트링게의 초상화>를 보자. 분명 배경에서 거칠고 빠른 느낌이 도드라진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하고 온화한 느낌이 드는 것은 결국 황금에 가까운, 포근하고도 고귀하게 인물을 감싸 안는 노랑의 역할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배경과 의상은 인상주의를 넘어선, 급진적이고 과격한 필치로 해체와 생략이 이뤄지고 있다. 허나 얼굴에서만큼은 이와 대비를 이루는 입체감과 양감을, 특히나 영구히 불멸할 것만 같은 미소의 온화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 르누아르 내부에서 교차하는 두 입장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는 인상주의자로서 빛의 변화, 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고전주의의 열렬한 예찬자로서 이상적 순간, 행복과 기쁨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싶은 욕망이 말이다. 특히나 <폴랑 부인의 초상화>는 그가 고전주의로 회귀하기 시작한 1880년대 후반에 그려진 작품으로, 마치 매너리즘 시기의 브론치노가 나폴리 총독의 부인 엘레오노라를 그려낸 초상처럼, 이상성과 고귀함, 권위를 화폭 속에 영구히 얼어붙게 만든 느낌까지 든다. 즉 르누아르의 작품은 분명 부드러운 구석이, 특히 인상주의자들에게 느껴보기 어려운 심미성이 분명 내재한다. 이는 르누아르의 주관성이 내재된 것으로, 노랑과 고전주의에 대한 그의 취향이다. 그래서 르누아르는 분명 인상주의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내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상주의자라고도 요약할 수 있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공장>, 1873



*카미유 피사로

다음으로 최초의 인상주의자들 중 한 명인 카미유 피사로다. 그는 1830년에 태생하였고, 미술을 전공하던 도중 모네와 교류하여, 그 만남은 함께 인상주의를 태동시키는 역사적 사건까지 이어진다. 그는 최초의 인상주의자로도 꼽히지만, 최후의 인상주의자로도 꼽히는데, 말 그대로 마지막까지 인상주의 화풍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그가 온당 인상주의에만 집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치 터너처럼 빛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염원하였기에,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신인상주의적인 화풍으로 전향한다. 인상주의 시기와 최후의 그에게선 견고하고도 객관적이던 대상의 형태를, 불완전한 색채에 상응하는, 보다 거친 붓터치로 환원시키는 화풍이 도드라진다. 허나 신인상주의의 피사로는 이를 한층 더 세밀하게 분할한다. 그는 모네나 드가 등에 비한다면 보다 얇고 촘촘한 점들의 세밀한 집합을 통해 일렁이는 색을 포착하였다. 이 시기에 피사로는 인상주의의 모색 방향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고한 것. 점, 선, 면 중에서 바로 점을 보여준 것이다. 허나 주관적으로 마주한 세계를 다시 한 번 분할해내는 엄격한 화풍은 곧 고루하졌고, 무엇보다 점묘법으로 촘촘하게 묘사된 세계는 오히려 탄탄하게 느껴져 인상주의자들이 추구한 역동성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 다시금 인상주의로 회귀하였다. 또한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특징인 내용 없음, 비정치성, 순수한 시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회화에서는 분명 현실에 대해서 열망하는 그만의 이념이 투영되어 있었다.



(좌) 카미유 피사로, <에라니의 일몰>, 1890 / (우) <풍요로운 수확>, 1893



피사로의 초기 작품인 <퐁투아즈의 공장>이다. 앞서 언급한 바르비종파의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더욱 급진적으로 형태감이 붕괴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또한 점묘법으로 향하기 이전의 피사로는 전형적인 인상주의의 화풍을 보여준다. 허나 피사로의 독특한 점은 바로 정치성이다. 그는 쿠르베나 밀레처럼 노동자, 농민들의 삶을 숭고하게 여겨 그가 직접 농민으로 살아가기도 했고, 특히나 사회주의자로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은 그의 사상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본 작품의 공장, 다른 인상주의자라면 분명 새로운 시대의 풍경이자 마치 사진기처럼 풍경을 바라봄에 자연스레 포착된 시각에 다름 아닐 것이다. 허나 피사로이기에 이 공장이 내뿜는 괴괴한 연기는 공장이라는 거대한 기계의 부품으로 노동계층을 전락시키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비판이라 결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그는 신인상주의, 점묘법으로 향하게 되는데 <에라니의 일몰>은 이에 대한 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비교적 두텁던 점들은 대단히 세세한 작은 점들로 환원되어있고, 인상주의의 다채로운 색채는 점묘법에 이르러 그들이 효과를 내고자 하는 하나의 색조로 귀결되고 있다. 또한 그들이 잃어버린 형태감은 다시금 견고하게 재건되고 있지만, 작품 자체의 대단히 평면적인 구도와 더불어 일체의 어긋남도 없는 견고한 짜임새의 구성은 오히려 지루함과 삭막함을 동반한다. 하나의 색채로 귀결되어버려 인상주의자들이 그려낸 일몰만큼의 매력을 느끼기 어렵다. 이후 그는 다시금 인상주의 화풍으로 회귀해 최후의 인상주의자로서 남게 되는데, <풍요로운 수확>은 이 같은 선회한 화풍과 정치적인 인상주의자로서 노동에 대한 예찬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줄곧 반복되는 에라니는 그가 살아온 세계로서, 그 공간에 살아가는 농민에 대한 애정, 함께 살아가는 농민화가로서 자신의 자부심을 일깨우는 소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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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 계속




글 아트렉처 에디터_박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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