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찬실이들에게 건네는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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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소수성은 있다. 신체적 결함이라든지, 사회적 지위라든지, 다수에 포섭되지 않는 한 모두에게나 존재하는 그런 것. 이런 소수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람들에게 혹은 사회에게 소외당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그런 소외된 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유쾌한 위로와도 같다.
자신과 작업하던 감독이 돌연사하여 졸지에 실업자가 된 찬실. 가난에 허덕이며 달동네에 이사를 가고 평소 친하게 지낸 여배우의 가사도우미가 된다. 주어진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고 설상가상 십 년 만에 찾아온 사랑마저 난관에 부딪힌다. 그런 도중, 자신이 살던 단칸방 옆방에 자신이 ‘장국영’이라 주장하는 귀신까지 나타나고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듣게 된다.
찬실은 철저하게 소수자다. 자신의 삶을 영화를 위해 받쳤건만, 그녀는 주연, 즉 다수가 아니다. PD라는 미명 아래 예술혼을 불태우기보단, 감독 밑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했을 뿐이다. 때문에 감독의 사후, 회사 대표마저 그녀를 외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은 감독이 하는 것이었지 그녀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다. 나름의 가치관과 신념을 가지고 살았을 찬실의 삶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순간이었을 테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절망적이거나 부정적이라 매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삶이라는 듯, 적절한 자조와 유머를 섞어 관객들에게 다가간다. 그렇기에 중년의 나이에 직업이든, 가정이든 무언가 안정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찬실은, 그렇지 않은 자기 상황을 인정하고 다시금 시나리오를 쓴다. 발연기라는 네티즌들의 비판에 시무룩한 여배우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하며 삶을 이어간다. 한글을 몰라 공과금을 내는 것조차 힘든 주인집 할머니도 한글을 배우며 시를 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찬실’이라는 것이다. 젊어서는 청춘이라는 이유로 삶을 착취당하고, 여성(혹은 남성)이라는 이유로 부당함에 침묵해야 하고, 정체성이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한다. 그렇기에 우울하고, 허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찬실’은 좌절하지 않는다. 영화는 허구적 낭만과 비루한 현실을 오가며 끊임없이 수많은 ‘찬실’에게 위안을 건넨다.
김초희 감독의 “무언가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라는 말처럼, 마지막 쇼트에서 장국영 귀신이 달리는 기차가 상영되는 스크린을 보며 기립박수를 치는 것처럼, 세상 모든 ‘찬실’이가 진득하게 나아가길, 영화는 되뇌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HI_5DjAOL0
글 아트렉처 에디터_강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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